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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8)화 (38/139)
  • 38화

    ‘이것이 쓰일 날이 올 것입니다. 목구멍 안이 막히는 느낌이 들고 혓바닥이 굳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 약초를 그대로 삼키십시오.’

    ‘유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반년 이상 꾸준히 드셔야 합니다.’

    ‘누가 나를 해치려 할 것이란 말인가? 대체 누가.’

    ‘황제 폐하와 사냥을 나가셨을 때 은신처로 사용하던 곳을 기억하십니까? 약초가 떨어지면 그곳으로 오십시오. 꼭 직접 오셔야 합니다.’

    선황의 서거 이후 아무도 모르게 황궁을 빠져나갔던 이레네 칼리프는, 필리프의 황제 즉위식을 일주일 앞두고 다시 황궁을 찾았다. 그녀가 짊어진 커다란 보따리에는 검푸른 약초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약초가 황태자님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유모.’

    ‘다시 뵙게 될 때까지 건강히 지내십시오.’

    멋대로 황궁에서 도망친 그녀를 잡아 심문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필리프는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다.

    황제 즉위식이 있고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이레네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증상이 느껴졌고, 약초를 삼킨 후에야 마비에 걸린 듯 굳었던 혓바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백한 살해 시도였지만,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즉위 기간 내내 다양한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선황의 모습을 보며 자랐기에 면역이 된 반응이었다.

    필리프는 그 즉시 자신의 음식을 먼저 맛보았던 시종 전부를 불러들여 이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관련자를 완벽하게 색출해내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시간이 입을 열게 만들 때까지.’

    음식을 맛보았던 시종은 총 일곱 명. 필리프는 이들을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두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만을 제공하며 심문을 이어갔다. 심문이 이어지고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필리프가 신뢰했던 시종 중 한 명인 파이만 스피로스가 관련을 시인하게 되었다.

    파이만 스피로스는 황제의 시해 시도가 단독 범행이었음을 주장했다. 육 개월 간의 지루한 재판이 이어졌고, 단독 범행이 인정된 파이만은 파이스 항구 앞 악명 높은 선박에서의 평생 노역이 결정되었다.

    재판이 끝나고 나머지 음식 시종들은 모두 결백이 인정되었는데, 안나 스완의 언니인 루이사 스완도 심문을 받았던 시종 중 한 명이었다.

    잠시 지난날을 떠올리던 필리프가 품에 안긴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충격에 기절해 버린 듯 한참이 지나도 그녀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출발하지.”

    “예, 폐하.”

    산짐승들은 고지가 낮은 숲에는 잘 침범하지 않기에 긴장을 놓은 것이 실수였다. 계곡을 지나는 순간 뒤따르는 짐승의 정체를 눈치챘다. 먹잇감을 찾아 산과 숲을 헤매던 들개였다.

    들개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필리프는 일부러 안나를 품에 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면 분명 약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먼저 달려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숲 곳곳에 미리 공격할 만한 무기들을 숨겨놓았다.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아 적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불시의 공격에 대비할 요량이었다.

    들개가 바로 등 뒤로 다가왔음을 느끼는 순간 바로 상체를 낮췄고, 발밑에 숨겨둔 창을 쥐며 등을 돌렸다.

    꿰에에엑!

    정확하게 뻗은 칼은 들개의 머리뼈를 관통했다. 뼈가 갈라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고, 바로 필리프의 곁으로 다가온 호위병들이 들개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으으으음…….”

    마차에 탄 필리프가 안나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내내 가쁜 숨을 뱉던 그녀의 입술이 평소보다 훨씬 붉어져 있었다.

    “폐하. 산 밑을 바로 통과하겠습니다.”

    “아니. 길이 어두우니 도로를 통과해.”

    “알겠습니다, 폐하.”

    황궁까지는 산길을 통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었지만, 급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편히 숨을 쉬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필리프가 안나의 보드라운 뺨에 손을 얹었다. 혹시라도 잠든 그녀를 깨울까, 손끝으로만 조심스럽게 얼굴을 쓸고 매만졌다.

    고작 황궁 시종인 비천한 여자. 이 여자와의 마지막은 가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필리프였지만, 이제는 멈출 자신이 없었다.

    “으으음… 삼겹살…….”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한 안나의 입에서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필리프가 그녀의 등으로 손을 옮겼다. 놀라 흐른 땀으로 축축해진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 * *

    침대가 아닌 곳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고, 베고 있는 것이 베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다음으로 느껴졌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 안나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어두컴컴한 주변 상황을 한 번에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제 다 잔 건가?”

    “헉!”

    어둠 속 들려오는 목소리는 필리프의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안나가 반쯤 일으킨 상체를 완전히 세우려는데, 정수리가 딱딱한 곳에 부딪히며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매번 이렇게 놀라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안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든 필리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 여기가…….”

    “곤히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았어. 이제 잠이 깬 것 같으니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지.”

    “예? 아, 예.”

    아, 마차 안이었구나.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잠들어버린 거지? 주춤주춤 마차에서 내리던 안나가 잠들기 전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어? 맞아. 어떤 커다란 짐승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았는데. 뭔가 엄청나게 끔찍한 소리가 들렸고, 그가 나를 품 안에 꼭 안아 주었었지.

    “괘, 괜찮으십니까?”

    “뭐?”

    안나가 마차에서 내린 필리프의 몸 이곳저곳을 요란하게 살피며 물었다.

    “다치신 곳 없으십니까? 분명히 엄청나게 큰 짐승에게 공격받았던 것 같은데.”

    “빨리도 묻는군.”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은 필리프가 시종에게서 재킷을 건네받으며 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보다시피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무릎에나 신경 쓰도록 해. 당분간 조심하라는 얘기 들었지?”

    “아, 예.”

    무릎을 다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나가 드레스 단 사이로 붓기가 거의 가라앉은 무릎을 슬쩍 들쳐다 보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저는 정말 제대로 공격받은 줄 알고 너무 놀라서요.”

    “놀랄 정신이 있었어? 그대로 기절해 버리던데.”

    놀라서 기절했던 거였거든요? 입술을 달싹이는 안나를 돌아본 필리프가 돌연 표정을 바꾸었다. 어? 이거 뭔가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표정인데.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지?”

    “아, 저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다쳤을까 봐 내내 맘을 졸이고?”

    “저, 폐하…….”

    “이렇게 멀쩡한 것을 보니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거야. 안 그래?”

    걱정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필리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황당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안나의 대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말하는 것을 잊었는데.”

    필리프가 황궁 동쪽 출입구를 지나자마자 발을 멈추며 안나를 향해 돌아섰다.

    “내일부터 당분간은 식사 준비에서 빠지도록 해.”

    “…예?”

    “주방에서 내내 서 있는 것이 다리에 좋지 않을 것 같으니까.”

    또 자기 할 말만을 내뱉고 돌아서는 모습이었다. 황급히 필리프의 뒤를 따라붙은 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

    미간을 찌푸린 필리프가 가까이 따라붙은 시종들을 물리며 안나에게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단순히 마음에 품은 상대로만 여길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는 제국의 황제, 이제껏 그 누구도 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고 명령과 복종, 상하 권력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명에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시키는 것이 옳았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듯, 당분간은 조심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눈에 다리 조금 다쳤다고 유난을 떠는 것으로 생각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나가 주변을 살피며 등을 돌려 그에게만 보일 정도로 살짝 드레스를 걷어 다친 무릎을 보였다.

    “약초 때문인지 상처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일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깊은 골이 새겨졌던 미간에 조금씩 힘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안나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무리하지 않을 테니 일하는 것은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살다 살다 더 일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진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간 어떻게든 월차를 야무지게 챙기려 발악했던 과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백팔십도 변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잠시의 침묵 끝에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한다니. 어쩐지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이려는데,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단호해진 그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대신, 내일부터 정해진 시간에 황궁 주치의를 만나 보도록.”

    더 이상의 반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말끝이 단단했다. 그래, 뭐. 사람들의 눈을 잘 피한다면 이 정도는 큰 상관 없겠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럼 돌아가 봐.”

    그가 침실이 있는 복도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던 안나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남자, 잠든 나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단단한 제 다리를 베개로 내어 준 남자, 작은 상처가 덧날까 걱정하며 주치의를 만날 것을 명하는 남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마음도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찝찝한 구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마음은 베르나 황녀와 끊임없이 제게 말을 거는 수첩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지금이 선택해야 할 순간인지도 몰라.

    걸음의 보폭을 넓힌 안나가 빠르게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행사가 전부 마무리되지 않은 것인지 숙소 안이 고요했다. 안나가 주변을 살피며 매트리스 깊숙이 숨겨 두었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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