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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7)화 (37/139)
  • 37화

    밖에서 바라볼 때는 몹시 울창해 걷기가 불편해 보이는 숲이었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은 숲은 완만한 평지였다. 짙은 안개 사이로 넓게 펼쳐진 넓은 평지 끝에 다다르니 맑은 계곡 옆으로 폭이 좁은 길이 나왔다.

    “우와. 물이 엄청나게 맑아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물 앞에 멈춰선 안나가 환호성을 뱉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낮은 웃음을 터뜨린 필리프가 잠시 멈춰서 선발대의 신호를 기다렸다.

    “잠시 앉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필리프가 계곡 앞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바위에 앉은 안나가 다친 무릎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환부는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갈라진 상처 틈으로 고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쩜 좋아.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모양이네.

    “자, 신발을 좀 벗어 봐.”

    “아, 저, 폐하. 제가 벗겠습…….”

    안나의 발목을 잡은 필리프가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게 했다. 계곡물은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상처가 심하니 신호가 오면 바로 출발해야 하겠어.”

    “예.”

    “혼자 걷는 건 무리야. 더는 고집 부리지 마.”

    단호한 필리프의 말에 차마 괜찮다는 답을 뱉지 못하고 그대로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필리프의 시선은 골짜기 사이 틈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틈 사이에서 자그마한 구슬 한 개가 굴러 내려옴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자, 업혀.”

    “네?”

    설마 진짜 제 등을 내어줄 줄이야. 너른 그의 등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대로 그에게 와락 안겨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남아 있는 이성이 행동을 망설이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 황제의 등에 업혀도 되는 건가? 혹시 누가 보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어떻게 해. 가뜩이나 황제를 깎아내리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여동생도 있는데. 그냥 걷기에 무리가 없다고 안심시키는 편이 나으려나?

    “당장 업히지 않으면 그대로 계곡물에 빠트릴 테니 선택해.”

    “예? 아, 저기 폐하. 저는.”

    “셋을 세지. 하나.”

    “전 정말 괜찮습니다.”

    “둘.”

    아무리 그래도 설마 빠트리기야 하겠어? 아니야, 저 단호한 표정을 좀 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남자야. 고민을 멈춘 안나가 그의 등에 몸을 묻었다.

    계곡 옆으로 뻗어있는 골짜기는 빛이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고,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몸을 통과할 만큼 좁았다.

    그래. 이 정도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안나가 그의 등에 조심스레 얼굴을 묻어 보았다. 부디 이 길이 짧지 않았으면. 도착지가 가깝지 않았으면.

    안나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필리프가 조금씩 걸음의 속도를 늦춰주었다. 그의 등에서 얼굴을 떼어내지 않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씩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향이 부드럽게 콧속을 파고들었다.

    “폐하.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래. 밖에서 대기하도록 해.”

    “예.”

    호위병의 목소리를 들은 안나가 필리프의 등에서 황급히 얼굴을 떼어냈다. 어둠이 사라지고 작은 움집 같은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키 작은 나무들이 주변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었고, 오래된 짚단으로 움집 주변이 막혀 있어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폐하라 불러야 하겠군요.”

    짚단을 걷어내고 움집에 들어서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여인이 필리프의 얼굴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약초 구경도 좀 하고, 치료도 부탁하러 들렀어.”

    필리프가 업힌 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제야 아직 필리프의 등에 업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안나가 그의 등을 치며 내려가겠다 호소했다.

    “상처를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움집 벽면은 다양한 종류의 말린 약초 다발이 수북이 걸려있었다. 잠시 안나의 얼굴을 바라본 여인은 움집 안쪽 얇은 천이 깔린 곳에 누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상처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 거동을 줄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안나의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말린 약초 다발 속에서 거무스름한 약초 한 움큼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 누워 여인이 약초를 빻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린 약초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약재상인 듯싶었지만, 왜 약재상이 이런 으슥한 곳에 홀로 사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드린 약초는 아직 남아 있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같은 것으로 준비할 수 있겠는가.”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들이 단지 약초를 사고파는 사이에 불과하다면 황제가 굳이 직접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사람들에게 목격될 것을 무릅쓰고 굳이 험한 숲길을 걸어 이곳을 찾은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빻은 약초를 안나의 환부에 바른 여인이 손가락만 한 크기의 약병 속 액체를 손바닥에 묻혀 환부 주변에 발랐다. 희한하게 그녀의 손끝이 닿는 손마다 미세한 열기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

    한참 안나의 환부 주변을 문지르던 여인이 일순간 손의 움직임을 멈추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안나와 똑바로 눈을 맞춘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맥을 좀 짚어 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물론입니다.”

    내내 그녀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부드러운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안나의 손목 위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은 그녀가 두 눈을 내리감았다.

    맥을 짚는 시간이 꽤 길었다. 한동안 안나의 손목에서 손을 떼지 않은 그녀가 번쩍 두 눈을 뜨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길고 가는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약초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이 필리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떠나라는 듯한 태도였다. 갑자기 변한 그녀의 태도에 필리프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약초 다발을 받아 들었다.

    “또 들리도록 하지.”

    짧은 인사를 전한 필리프가 움집을 나서고 안나가 급히 그의 뒤를 따르려는데, 여인이 등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떠나야 할 운명이니, 떠날 곳에 너무 정을 두지 마십시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안나가 그녀를 향해 등을 돌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예? 아, 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움집 안으로 들어온 필리프가 안나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움집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퉁퉁 부어올라 시퍼렇게 변했던 무릎 주변의 붓기가 놀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좋은 약초인 것 같아요. 붓기가 많이 가라앉아 혼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나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만 갈까? 날이 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야 하니.”

    “예.”

    어느새 밖은 해가 기우는 참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본 안나가 부지런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녀의 유모였던 이레네 칼리프라는 여인이야.”

    골짜기를 넘어 계곡을 지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의 유모요?”

    짧은 시간에 불어난 계곡물이 바닥을 축축하게 적셔 걸음을 걷기가 쉽지 않았다. 안나의 등 뒤로 자리를 바꾼 필리프가 그녀를 호위하듯 걸으며 말했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여인이었어. 그녀의 능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는 황녀였고.”

    “그런데 왜 황궁을 떠나 이런 곳에 살고 계신 거죠?”

    “자신의 능력을 헛되게 사용하려는 사람 곁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신비한 능력? 안나가 여인이 제 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결국은 떠나야 할 운명이니, 떠날 곳에 너무 정을 두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마치 경고처럼 느껴졌다.

    “잠깐.”

    해가 저무는 속도가 빨랐다. 계곡을 완전히 벗어나자마자 주변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필리프가 재킷 안쪽에 넣어둔 횃불에 붉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필리프가 들고 있던 횃불을 가슴 아래로 내리고 입구 주변을 응시했다. 건너와도 좋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바삭바삭.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풀잎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안나가 그대로 몸을 굳혔다. 움직임의 정체를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선발대의 신호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분명 짐승이야. 그래, 이 시대에 산짐승, 들짐승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더군다나 이렇게 해가 지면 사람보다는 움직임이 훨씬 자유로울 텐데. 커다란 멧돼지면 어쩌지? 예전 멧돼지들은 사람을 그대로 찢어 죽였다고 하던데. 두려움에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쉬잇.”

    안나의 몸의 떨림을 읽은 필리프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뭐라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 근육이 와르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야.”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횃불을 끈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안나의 몸을 들어 올린 그가 그대로 어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붉은 안광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짐작이 맞았다. 짐승이었다. 그것도 크기가 어마어마한.

    입구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문제는 뒤따르는 산짐승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들을 따라붙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혼자였다면 분명 쉽게 따돌릴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을 안은 그의 다리는 쉽게 속력을 내지 못했다.

    붉은 안광이 안나의 얼굴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열 걸음 앞, 다섯 걸음 앞, 그리고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벌어진 짐승의 입속으로 번쩍이는 이빨이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안나가 그대로 눈을 감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빠지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인지,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인지 분간해낼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안나가 이제껏 들어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소리가 귓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 확실하게 끊어 놓도록!”

    무시무시한 포효와 신음 그리고 울부짖음이 번갈아 귓가를 때렸다. 끔찍한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기를 한참, 부드러운 손끝이 안나의 고개를 제 가슴 속에 파묻게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려움은 좀처럼 부피를 줄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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