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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6)화 (36/139)
  • 36화

    “먼저 이쪽으로 좀 주십시오!”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왔는데!”

    “거참, 밀지 말라고! 줄을 서, 줄을!”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배급 행렬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궁의 음식들을 맛볼 유일한 기회를 잡기 위해 제국 방방곡곡에서 시민들이 몰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에도 황궁 앞 샤를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 음식과 보급품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십시오.”

    보급품을 몰래 숨겨 놓고 다시 행렬에 끼어드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이의 보급품을 몰래 빼돌리려 기회를 엿보는 자도 많았다. 결국, 황궁 호위병 무리가 광장 곳곳에 투입된 후에야 차츰 소란이 마무리되었다.

    “안나, 얼마나 남았어?”

    “어. 이제 거의 동났어. 이 정도면 저쪽 끝 사람까지 나눠줄 수 있을까?”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음식 배급을 맡은 안나와 마샤가 고개를 쭉 빼내고 행렬의 길이를 확인했다.

    “주방에 남은 음식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거라도 좀 가져올까?”

    “그래. 우리는 나중에 먹으면 되니까.”

    황궁 시종의 몫으로 빼어놓은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안나가 자신의 소쿠리 속 음식을 마샤의 소쿠리로 옮겨 담았다.

    “그럼 내가 빨리 다녀올게. 천천히 배급하고 있어.”

    “응, 다녀와.”

    빵 한 쪽에 혈안이 되어있는 시민들의 모습은 안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배를 곯고 곯아 아사 직전이 되면 늘 걸음을 옮기곤 했던 무료 배급소. 안나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시민들이 오늘만이라도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아앗!”

    급히 발을 옮기다 황궁 입구에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찧어 상당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아픔을 호소할 시간은 없었다.

    “아아. 무릎 다 까졌네. 이거 약 안 바르면 흉 질 텐데. 어디 빨간 약 비슷한 거라도 없나.”

    안나가 부딪힌 다리를 절뚝이며 황궁 서쪽 계단을 올랐다. 붉게 새어 나온 피가 드레스를 적셨지만, 그렇다고 드레스 단을 훤히 걷어붙이고 황궁을 활보할 수는 없었다.

    아픔을 꾹꾹 눌러 삼키며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다. 주방 시종들은 모두 수확제 행사에 투입되었고, 놀만 부인만이 주방에 남아 엉망이 된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나, 벌써 배급이 끝난 거니?”

    “아니요. 음식이 좀 부족할 것 같아 혹시 주방에 남는 음식이 있으면 보충하러 들렀습니다.”

    “그래? 그러면 여기 이것을 좀 가져가도록 해라.”

    놀만이 주방 한쪽에 커다란 냄비 뚜껑을 열고 폭이 깊은 접시 하나에 고기 요리 전부를 옮겨 담았다.

    “자, 혼자 들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싱긋 웃은 안나가 놀만의 손에서 접시를 받아드는데, 놀만이 이맛살을 구기며 상체를 낮추었다.

    “아니, 너 무릎이 왜 이 모양이 되었어!”

    “아, 저 입구에서 미끄러져서요.”

    “당장 약부터 발라야겠구나. 이건 내가 가져가마.”

    “아닙니다. 제가 위치를 아니까요. 금방 가져다 놓고 오겠습니다.”

    씩씩하게 접시를 받아든 안나가 잽싸게 등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왔다. 배급 인원 사이에 홀로 있을 마샤가 걱정되어 아픔을 무릅쓰고 힘차게 발을 옮겼다.

    “어?”

    아, 왜 하필 지금.

    필리프의 얼굴보다, 이제는 낯이 익은 그의 수행원의 얼굴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발을 멈춘 안나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배급은 거의 끝난 것 같던데.”

    빠르게 안나의 곁으로 다가온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들린 접시를 흘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폐하. 음식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잠시 주방에 들렀다 오는 중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안나가 황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드레스 치맛단의 핏자국을 전부 감춰내는 것은 무리였다.

    “다친 것 아닌가?”

    “아, 별것 아닙니다. 이것만 가져다 놓고 약을 바르려 했습니다.”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서 접시를 낚아챘다. 그의 손에 있던 접시는 곧 그의 수행원에게로 옮겨졌다.

    “배급하는 곳에 가져다 놓고 오도록.”

    “예, 폐하.”

    역시 황제라는 자리가 좋긴 좋구나. 누가 되었건 제 수족으로 부릴 수 있고, 모두 이런 행동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이니.

    빠르게 공간에서 멀어지는 수행원의 등을 바라보던 안나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당장 치료해야 할 것 같아.”

    다리 사이로 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다고 느낀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렸다. 어느새 상체를 낮춘 필리프가 제 치맛단을 걷어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저, 아, 폐, 폐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긴 많은 사람이 지나 드는 황궁 복도인데, 어디 아녀자의 치마를 그리 들춰 보고 그러십니까!

    “함께 가도록 하지.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그곳에서 치료받는 것이 낫겠어.”

    “예?”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태연한 표정으로 황궁을 나섰다. 뭐지? 따라오라는 소리인가? 아니,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저 남자는 뭐 이렇다저렇다 확실하게 얘기해주는 법이 없어. 구시렁거림을 삼킨 안나가 부지런히 필리프의 뒤를 따랐다.

    * * *

    필리프가 향한 곳은 황궁 동쪽 출입구였다. 입구에는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는 그중에서 가장 허름해 보이는 마차 앞으로 이동했다.

    “폐하. 여기 있습니다.”

    수행원에게서 낡은 외투와 색이 바랜 모자를 받아 든 필리프가 마차의 휘장을 걷으며 안나를 돌아보았다.

    “먼저 타.”

    “예?”

    뭐야. 함께 밖으로 가자는 이야기였어? 잠시 당황했지만, 황궁을 나갈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안나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홀로 남아 분투하고 있을 마샤를 떠올리니 희미한 죄책감이 피어올랐지만, 자신은 황제의 명에 따르는 것뿐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슬며시 죄책감을 지워냈다.

    “출발하지.”

    “예, 폐하.”

    긴 다리로 멋들어지게 마차에 올라탄 필리프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슬쩍 마차 내부를 훑어보던 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황제의 마차는 온갖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마차잖아? 예전에 놀만 부인과 시장에 방문했을 때 탔던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네.

    “황궁 밖에서는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아.”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낡은 재킷을 걸친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치 그가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아,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머쓱한 기분에 고개를 수그린 안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안이 넓지 않아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길이 슬쩍슬쩍 안나의 옷깃을 스쳤다. 아무 사심이 담기지 않은 담백한 손짓에도 심장은 그대로 반응하며 쿵쾅거렸다.

    아, 왜 이렇게 어색하지? 도대체 몸에서 힘이 빠지질 않네. 뭐야. 이 안은 또 왜 이렇게 조용해. 내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잖아.

    그와 나란히 앉아있으니, 그와 함께했던 밤이 생생히 떠올랐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슬쩍 올려다본 그는 그저 천하 태평한 모습이었다.

    “자, 이쪽으로 다리를 뻗어.”

    그가 창에 얼굴이 들러붙다시피 몸을 물린 안나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아, 괘, 괜찮습니다.”

    “지금쯤이면 상처가 굳어 꽤 통증이 느껴질 텐데.”

    몸을 돌린 안나가 드레스 단을 걷어 올렸다. 흐르던 피가 굳어 피딱지가 되어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살짝 다리를 움직이니 무릎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읍!”

    급히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앓는 소리가 잇새를 갈랐다.

    “조금 더 빨리 말을 몰아.”

    “알겠습니다, 폐하.”

    수확제로 제국 곳곳에서 몰려든 시민들 때문에 마차가 쉽게 속력을 내지 못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필리프가 멀리 보이는 산 끝자락을 가리켰다.

    “라이젠 산을 통과하는 것이 빠르겠어. 잠시 말을 멈추게.”

    “예, 폐하.”

    마차를 몰던 근위병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리 끝자락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뒤따르던 마차에서 내린 호위병들이 일제히 황제의 마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최대한 몸을 편히 하도록 해.”

    가볍게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필리프가 마차에서 내려 근위병과 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근위병이 뒤따르던 마차로 옮겨타고, 고삐를 건네받은 필리프가 안장을 밟아 말에 올라탔다.

    설마 직접 말을 몰려는 것인가?

    차창 밖으로 길게 고개를 내민 안나가 말에 올라탄 필리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힘찬 구호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으앗!”

    좀 전 근위병이 마차를 몰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속도였다. 마차의 덜컹거림이 심해져 차창 밖으로 그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시야에 가려져 있던 커튼을 친 안나가 그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말을 모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잖아? 그런데 황제가 직접 마차를 몰아도 괜찮은 건가? 원래 영화에서 보면 이런 순간에서는 꼭 적이 나타나서 화살을 쏘고 그러던데. 괜찮겠지?

    늠름한 그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그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져 마음 편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안나가 뒤따르는 마차와 필리프의 모습을 번갈아 확인했다.

    산 입구에 마차가 멈춰 서고, 먼저 말에서 내린 필리프가 직접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자, 이제 내리… 아니, 머리가 왜.”

    “예? 머리가 어때서…….”

    무심코 정수리로 손을 뻗는데, 비단결처럼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이 죄 엉켜 버린 것이 느껴졌다.

    아, 맞다. 내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 어쩜 좋아. 왜 꼭 이 남자 앞에서만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야.

    안나가 황급히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마차를 빠져나왔다. 필리프가 낮게 웃는 것이 보였지만, 그의 비웃음에는 이미 면역이 된 안나였다.

    “둘은 입구를 지키고 자네는 내가 떠나고 십 분 후 나를 따르도록 해. 자네는 먼저 출발하고.”

    “알겠습니다, 폐하.”

    호위병들에게 지시를 내린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 위로 손을 둘렀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예? 아, 물론입니다. 사실 통증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서요.”

    거짓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 무릎을 찍어 내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제대로 걷기엔 무리인 상태였다. 하지만 필리프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마음에 안나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골짜기를 넘으면 금방이니, 오래 걷지 않아도 될 거야.”

    “예.”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먼저 발을 옮기는 필리프의 뒤를 따랐다. 절뚝이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자.”

    땅을 보며 걷느라 그가 바로 제 앞에 멈춰 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 즈음으로 손바닥을 뻗어왔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안나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제 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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