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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5)화 (35/139)
  • 35화

    목욕을 마친 필리프가 목욕 가운을 느슨히 여미며 창가에 섰다. 창가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안나가 떨어뜨리고 간 낡은 수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새벽공기에 따스함이 섞여드는 것을 보니 이제 여름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손수건을 떨어뜨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허둥지둥 침실을 떠나던 안나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필리프가 테이블 위 손수건을 들어 바로 코를 묻었다. 그녀의 체향이 짙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결정이었다. 기억을 잊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전부 믿고, 그녀를 곁에 두기로 한 것은.

    어째서였을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한 것은.

    ‘이제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울분 섞인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의 미래를 꿈꾼다는 것만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안나 스완.”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며 들고 있던 손수건에 남은 체향을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 베인 달콤한 향이 코를 통해 몸 안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이나 손수건에 코를 묻고 서 있던 필리프가 창가 문을 닫으며 등을 돌렸다.

    필리프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내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이제 안나 스완과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순간일 테니, 다가올 공격에 대해 미리 대비해 두는 편이 좋겠지.

    필리프는 마음에 품은 황궁 시종의 배신을 알고도, 끝까지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절대적인 황권 약화의 원인이 된 그 사건은, 황궁 안팎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분명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안나 스완과의 관계를 정리하라 종용하겠지. 시장에 물건 내어 놓듯,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제 딸년들을 내 눈앞에 들이밀면서.

    필리프가 강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궐련 갑을 집어 들었다.

    황궁 안팎 귀족 모두 제 이익을 좇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굳건히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찾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세력을 더 굳건히 하기 위한 완벽한 조건의 상대를 찾을 때까지 결혼을 미뤄왔던 필리프였다.

    “끔찍하군.”

    목소리를 높여 반대 의사를 내비칠 인간들을 떠올리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세게 눌러 두통을 잠재운 필리프가 침실 밖 시종을 호출했다.

    “예, 폐하.”

    “카르만 에트르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황궁, 귀족 세력의 반대에 대응하기에 앞서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안나 스완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 청하던 케이든 아들레드의 모습을 떠올린 필리프가 물고 있던 궐련 개비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케이든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 이외에 다른 어떤 의도도 읽히지 않았다. 그 점이 필리프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

    지금은 안나가 케이든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온다면? 두 사람 사이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견고하고 단단한 것이라면? 기억이 돌아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떠나 케이든에게로 가겠다고 말한다면? 아니,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절대 그럴 수 없지.”

    아버지처럼 순순히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 카르만 에트르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여보내.”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카르만이 필리프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폐하.”

    “예는 필요 없으니, 알아낸 것을 말해 봐.”

    카르만의 인사말을 자른 필리프가 곧장 본론을 꺼내 놓았다.

    “케이든 기사가 황궁을 찾은 이후 따로 안나 스완을 찾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전 둘의 관계는?”

    “아직 정확한 관계를 파악해 내지 못했습니다, 폐하. 두 사람이 정분을 나눈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만남에 꽤 주의를 기울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챈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안나 스완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볼 방법은 있습니다, 폐하. 먼저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아니, 됐어.”

    필리프가 손을 들어 카르만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하지만 폐하. 이번 일은 신중히 처리하시는 것이…….”

    순간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의 눈에서 형형한 사나움이 드러났다. 벌어졌던 입을 다문 카르만이 어깨를 수그렸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들추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필리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스완에 대한 조사는 그만 멈추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황궁 기사단은 수확제가 끝나고 떠나기로 되어 있나?”

    “그렇습니다.”

    “자, 이것을 기사단장에게 전하도록.”

    필리프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 봉투를 꺼내 카르만에게 건넸다.

    “그리고 하나 더. 자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폐하.”

    카르만에게 가까이 다가선 필리프가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차분히 필리프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럼 그만 나가 봐.”

    카르만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필리프가 창가를 향해 등을 돌렸다. 커튼 틈 사이에서 눈부신 금빛 여름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햇살의 빛깔. 자신에게 처음으로 삶의 색채를 느끼게 해 준 여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 * *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수첩에 적힌 글자가 머릿속으로 옮겨져 그대로 뿌리를 박은 느낌이었다. 거세게 고개를 흔들던 안나가 다시 조심스럽게 수첩을 들춰보았다.

    “하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글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 신경 쓴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없으니, 잊어버리자. 저 수첩에 이해하기 힘든 글이 적힌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손길에 절대 속아서는 안 돼.]

    다시 머릿속에 수첩 속 글자가 울렸다.

    아니, 그는 내 말을 믿어 준 사람이야. 자신의 곁에서 바로 내쳐 버릴 수 있었지만, 그는 나를 자신의 곁에 두기로 했어. 나는 속은 적 없고, 그는 속인 적 없어.

    안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 선반 위에는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양의 식자재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자, 모두 모였으면 해야 할 일을 일러 주겠다.”

    삼삼오오 모여든 주방 시종 가운데 선 카라나가 시종들에게 일을 분배해 주었다. 안나와 마샤는 고기 요리와 음식 분배에 배정되어, 바로 고기가 보관된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고기 누린내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으앗! 냄새!”

    즉시 코를 틀어막은 안나가 창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창고 한쪽에는 소금으로 염장한 고기가 쌓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고기들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아, 피를 뽑아서 보관해야 했는데.”

    안나가 코를 막은 손에 힘을 풀지 않으며 고기의 상태를 체크했다. 어차피 황궁 사람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구워서 배분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차마 이대로 구워 배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황궁의 음식이니, 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먼저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마샤. 우리 시간이 얼마 정도 있지?”

    “두 시간 안에 고기 손질을 마치라고 하셨어.”

    “두 시간이라.”

    잠시 고민하던 안나가 커다란 소쿠리에 누린내가 심한 고기 부위를 옮겨 담기 시작했다.

    “안나, 왜 나눠서 담아? 바로 구우면 되는 거 아니야?”

    “어, 마샤. 굽는 것보다 빠르게 조리할 방법이 있거든. 자, 이렇게 고기를 분리해 줘.”

    마샤와 함께 고기 손질을 마친 안나가 바로 훈제 실로 이동했다. 며칠 전 고기를 구우면서 불에 탄 나무를 한쪽에 잘 모아 놓았는데, 그 숯이 제 쓰임을 할 시간이었다.

    “자 여기에 한꺼번에 부어 줘.”

    “응.”

    고기를 굽지 않고 뜨거운 숯을 넣어 삶아내면 어느 정도의 누린내를 잡을 수 있었다. 안나와 마샤가 대량의 고기를 삶아내고 있을 때, 채소 손질을 마친 시종 몇이 훈제 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고기 구우라고 하지 않았어?”

    “응. 이제 구울 거야. 미안한데, 여기 이걸 고기 위에 좀 뿌려 주겠어?”

    안나가 미리 배합해 놓은 향신료 병을 내밀었다. 미리 삶은 고기를 굽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잘 익은 고기를 커다란 통에 담아내기 직전, 안나가 분리된 살점을 살짝 떼어 냈다.

    “자, 마샤. 이거 한번 먹어 봐.”

    “응?”

    다른 시종들의 눈을 피해 마샤의 입에 고기를 넣어준 안나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우와! 뭐야?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았는데 엄청 맛있어! 부드럽고!”

    “진짜? 다행이다.”

    마샤의 호들갑에 주방으로 돌아가려던 시종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며 안나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뭐야? 정말 그렇게 맛있어?”

    “어? 아냐. 별것 아닌데.”

    “나도 좀 먹어 봐도 돼?”

    “어. 자, 여기 살짝 맛을 봐.”

    안나가 살점을 조금씩 나눠 시종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고기를 맛본 시종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뱉었다. 매번 죄 말라빠진 딱딱한 고기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던 시종들에게 막 구운 고기는 산해진미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거 정말 향신료로만 구운 거야? 진짜 맛있다.”

    “내가 나중에 남는 고기 있으면 또 구워줄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던 시종들이 구운 고기가 든 통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도착해 구운 고기와 채소 볶음, 과일을 배분하던 안나가 어젯밤 필리프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제국 동쪽 끝에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가 있는데, 바다를 끼고 있어 경치가 아주 근사한 곳이야. 작년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별장을 지어뒀지.’

    ‘…예.’

    ‘여름이 지나기 전, 함께 다녀올까?’

    손을 맞잡고 그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을 상상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안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필리프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가슴 속에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것이 차곡차곡 고여 들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감정, 아마 행복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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