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3)화 (33/139)
  • 33화

    표정 없이 서늘한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완전한 타인을 대하는 듯 냉정한 필리프의 시선에 가슴 한쪽이 아프게 저렸다.

    그냥 이대로 땅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비현실적이라 바랄 수 있는 생각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안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필리프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려 나왔다. 말을 뱉는 순간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라, 들었던 고개를 그대로 바닥으로 떨구었다.

    “폐하께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제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베르나 황녀님 그리고… 그분께도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라…….”

    잠자코 안나의 말을 듣던 필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단정하게 묶여있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닌가? 적어도 그럴듯한 변명 정도는 생각해 올 줄 알았는데.”

    빈정거리는 말투에 가슴 속에 불길이 치밀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접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저를 찾으신 분은 폐하이십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감정이 외침처럼 토해져 나왔다. 물끄러미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필리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이마에 새겨지는 깊은 골이 현재 그의 심정을 대신해 주는 듯했다.

    “목소리 낮춰.”

    “제 말이 틀렸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저에게 음식을 해 오라 말씀하신 분도 폐하이시고, 침실로 부르신 분도 폐하이십니다. 또 제게 먼저 입을 맞추신 것도!”

    한번 뱉기 시작한 말이 멈추지 않았다. 서늘하게 굳어가는 그의 표정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 순간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거짓말 같은 이 삶을 살기 전, 원래 서안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집을 떠나고, 가스비와 전기세를 낼 돈이 없어 얇은 여름 이불 하나로 겨울을 버텼고, 라면 반 개로 하루 끼니를 해결했었다. 도움을 청할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잘살아 보려고 했다. 남부럽지 않은 삶까진 아니어도 그저 평범하게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 세월이 힘겨웠지만,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떠올려보니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힘들다는 말은커녕, 누구에게도 제대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도, 주방일을 하며 멘토가 되어 주었던 선배들에게도.

    그런데 왜 지금 이 남자의 앞에서 그간의 서러웠던 삶을 드러내고 싶은 것일까.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에게 위로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일까. 왜 그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 주길 바라는 것일까. 하필이면 왜 이 남자가 꼭꼭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풀어 버린 것일까.

    한껏 구겨져 있던 필리프의 미간에서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안나가 입술 안쪽을 아프게 깨물며 참아 보았지만, 기어이 눈물방울이 눈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뺨이 흘러내린 눈물로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먼저 저를 찾지 않으시면, 저는 절대 폐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폐하는… 제 처지에 감히 차마 상상으로도 품을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목구멍이 콱 조여들어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안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내내 닫혀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너를 황녀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네 음식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였다.

    “네 음식이 내 입에 잘 맞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너 이외에도 수없이 많으니까.”

    “…….”

    “그냥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는 뜻이 되겠지.”

    아마도 눈물샘이 고장이 나버린 것 같았다. 수많은 양파를 썰 때도, 슬픈 드라마를 볼 때도 잘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는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기가 무섭게 눈물이 다시 빠르게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흐느낌이 멈추질 않았다.

    “네게 물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내 생각이 틀렸나?”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슬쩍 필리프를 올려다본 안나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턱 끝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묻지.”

    필리프가 안나에게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마음은 점점 진정되는 것 같은데 헐떡거리는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삼킨 울음으로 몸이 끊임없이 들썩거렸다.

    “떠나고 싶은 건가?”

    필리프의 질문을 들은 안나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바로 아니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케이든과 함께 이곳을 떠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필리프를 마음에 품고 있기에,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떠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난 떠나고 싶은 건가?

    침묵이 길어지자 핏발 선 필리프의 눈에서 초조함이 드러났다. 어떤 감정을 내리누르듯 긴 한숨을 내뱉은 그가 다시 한번 재촉하듯 물었다.

    “대답해 봐. 그와 함께 떠나고 싶은 거야?”

    이 질문에는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안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멈췄다. 두 눈을 크게 깜빡여 눈물방울을 없앤 안나가 깨끗한 시야로 필리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그대로 다무는 것이 보였다.

    안나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베르나 황녀와의 대화에서 멋대로 움직인 안나의 입은 베르나와 공조를 약속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은 확실하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제 언니의 죽음과 황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직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몸의 주인이 아닌, 서안나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를.

    “만일 언젠가 그와의 일을 기억해낸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일까?”

    “저는… 제 마음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안나가 확신하는 말투로 답했다. 어느새 마음이 필리프 한 사람으로 꽉 차버렸고,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게 믿도록 하지.”

    오랜 침묵을 끊은 필리프의 목소리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쉽게 제 말을 믿어주리라 생각지 못했던 안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내 결정에 내가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

    필리프의 팔이 순식간에 안나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대로 끌려간 안나의 몸이 넘어지다시피 필리프의 몸 위에 안착했다. 그의 기다란 눈매가 휘어지더니, 얼굴 가득 숨이 막힐 정도로 관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에 울렁임이 번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안나의 얼굴을 쓸어내린 손이, 살짝 부어오른 그녀의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안나가 긴장감에 바닥으로 떨구었던 시선을 끌어올려 조심스레 필리프를 살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 아래 부근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었다.

    몸이 바짝 밀착함과 동시에 심장이 반응해 오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에 귀에도 들릴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코끝에 닿는 체향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금 침실로 갈 생각인데… 어때, 함께 가겠어?”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필리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전기가 이는 느낌에 안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진동 같은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연신 마른침을 꿀꺽거린 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기어 들어가는 소리이지만 분명히 알았다고 의사 표현을 했는데, 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어왔다. 슬쩍 올려다본 입술이 매끄럽게 휘어 있었다. 안나가 필리프와 똑똑히 시선을 마주하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네. 가겠습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으며 밀착된 몸을 떨어뜨렸다. 집무실 문을 연 필리프가 등 뒤를 따라붙는 시종을 모두 물린 채 자신의 뒤를 따르는 안나에게 보폭을 맞춰 주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두 번째로 그의 침실에 발을 들이자 다시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쳐대기 시작했다. 아니, 겁도 없이 왜 바로 따라간다고 한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호기롭게 따라온다고 한 사람치고는 너무 떠는 것 아닌가?”

    흘끔 안나를 바라본 필리프가 테이블 위에 술잔을 집어 안나의 손에 들려주었다.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드레스에 문질러 닦은 안나가 술이 반쯤 채워진 술잔을 공중에 들었다.

    “자, 한 잔 들어. 밤은 길고도 길 테니.”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안나가 그가 건넨 술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차라리 모든 것이 흐릿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필리프가 여전히 멍하게 굳어 있는 안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눈이 많이 부었는데?”

    시선이 오래도록 맞물렸다. 손을 뻗어 퉁퉁 부어오른 안나의 눈가를 닦아준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온기를 느낄만한 여유도 없는 짧은 입맞춤이었다.

    “한 잔 더 하겠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내려놓는 안나의 모습에 필리프가 나직한 미소를 지었다. 술잔을 테이블 멀찌감치 밀어 놓은 그가 안나의 허리를 감싸며 상체를 낮추었다.

    필리프의 커다란 손이 안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고 팔을 쓸고 내려와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안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뺨에, 목덜미에 그리고 귓가에. 몸 곳곳에 퍼지는 그의 숨결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