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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2)화 (32/139)
  • 32화

    “찾으셨습니까, 폐하.”

    지하 별실 문을 연 카르만 에르트가 필리프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녀의 움직임은?”

    필리프가 바로 본론을 꺼내 놓았다. 베르나의 감시를 위해 그녀의 주변에 붙여 놓은 인원 중 유일하게 그녀의 의심을 사지 않은 이는 카르만 에트르뿐이었다.

    “오늘 황궁으로 돌아오신다고 들었습니다.”

    필리프가 황궁을 떠나 있는 내내 황녀도 황궁에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보고를 들은 후였다. 황궁을 떠나며 혹시라도 그녀가 일을 꾸밀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냈는가.”

    “황녀님과 수행원 세 명만이 함께 길을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다고 판단해 미행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자네마저 발각되면 곤란하지.”

    베르나가 황궁을 떠날 때까지는 그녀의 행적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말없이 카르만의 보고를 듣던 필리프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네는 먼저 황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해. 나도 곧 별궁으로 가도록 할 테니.”

    “알겠습니다, 폐하.”

    황녀가 분명 안나 스완에게 손을 뻗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과 안나 스완 사이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테니, 어쩌면 안나를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려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황궁을 비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내버리고 내내 황궁을 떠나 있었다?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한데. 필리프가 느릿하게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일단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낫겠어.”

    낮게 중얼거린 필리프가 별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제 딴에는 속마음을 감추는 것에 능숙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미세한 얼굴 근육의 떨림으로 그녀가 한 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한 것 같지만, 늘 한두 가지의 실수를 저질러 스스로 제 발목을 잡곤 했으니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잠시 정원에 대기하고 있다가 별궁으로 가지.”

    “예, 폐하.”

    끊임없이 일을 꾸미는 동생에게 놀아나지 않는 방법에 익숙해진 필리프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여전히 안나에 대한 생각뿐이었지만, 당장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시간이었다.

    * * *

    안나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턱을 쥔 베르나가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려는 순간, 입술 사이가 스르르 벌어졌다.

    “제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놀랍도록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안나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안나의 턱을 잡지 않은 손을 드레스 안쪽으로 가져가려던 베르나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는 달리 안나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평온했다.

    “언니의 일로 제가 품은 복수심과 황녀님의 이익을 좇는 일이 깊게 얽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안나의 턱을 잡은 베르나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여전히 안나를 바라보는 베르나의 눈동자에서는 미심쩍은 기색이 드러났다.

    “언니와 관련된 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황녀님이 제 언니를 무척 아끼셨고, 언니도 황녀님을 아끼고 존경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야. 전부 기억이 난 건가? 베르나가 자신과 똑바로 눈을 맞추는 안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실리지 않은 텅 비어 있는 눈동자. 분명 안나 스완이 아프기 전 그녀를 대할 때의 느낌이었다.

    “폐하께서 저에게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물론 황녀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테지만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면, 함부로 건방을 떨 이유가 없겠지. 그래, 한발 물러서 줄 테니 어디 한번 지껄여 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분의 마음을 확실히 얻어낼 시간을.”

    당돌한 안나의 말에 코웃음 친 베르나가 드레스 안쪽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단도 손잡이에는 뚜렷한 황제의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허튼짓을 꾸밀 생각이라면, 당장 접는 편이 좋을 거야.”

    날카로운 칼날이 안나의 목을 겨냥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작은 표정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칼을 내려놓은 베르나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네 언니의 복수를 위해 황제에게 접근했다?”

    “…그렇습니다.”

    베르나는 안나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순간 입꼬리가 스르르 말려 올라갈 뻔했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칼집에 칼을 꽂았다.

    황제의 낙인과 정확히 같은 낙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꽤 고생했었는데, 이 칼은 잠시 그 쓰임을 미뤄도 괜찮겠어.

    “무턱대고 너를 믿을 수는 없어. 내게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말이야.”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뭐야. 꽤 자신 있는 눈치인데? 설마 필리프가 생각보다 더 깊게 안나 스완에게 빠져 있는 것이라면.

    “그 전에 네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어.”

    베르나가 안나에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 기사가 너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황제에게 흘렸다던데? 너와 밀회를 즐기던 그 기사 말이야.”

    “…케이든 아들레드.”

    “황제가 그 이야기를 들은 만큼, 아마 지금 너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는 않을 거야.”

    “염려 마십시오. 둘러댈 말을 생각하겠습니다.”

    베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럼 돌아가 봐. 내일 밤 카밀라를 통해 다음 접선 장소를 알려 줄 테니.”

    “알겠습니다, 황녀님.”

    베르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자신을 통제하던 무언가도 함께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안나가 깊은 탄식을 뱉었다.

    복수를 위해 황제에게 접근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언니의 복수라고 했으니, 언니의 죽음과 황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 분명 베르나 황녀가 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르나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는 순간, 안나의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제 입을 통해 뱉은 말이지만, 자신이 의도했던 말은 아니었다.

    한동안 자리에 앉아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힌 안나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시종의 모습이 보여 빠르게 발을 움직이며 복도를 벗어났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황제와 꽤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안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그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임기응변이 발휘된 걸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자기 암시하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걷던 안나가 황궁 주방으로 향하는데, 멀리 주방 문 앞에 서 있던 황제의 수행원과 눈이 마주쳤다.

    “따라와.”

    살짝 열린 주방 문틈으로 놀만의 얼굴이 보였다. 안나가 입 모양으로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수행원의 뒤를 따랐다.

    아, 근데 어떻게 된 게 매일 이렇게 바쁘냐. 휴식 시간 조금을 제외하면 하루에 열 시간 정도를 주방일에 매여 있어야 하고, 중간중간 이런저런 사람에게 불려가는 일도 많고, 홀로 남는 시간에도 메뉴를 연구하느라 쉴 틈이 없으니.

    “그야말로 극한 직업이야.”

    안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황제의 수행원이 바로 뒤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니, 그런데 얘도 대단하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연애도 했다는 거 아냐. 절절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던 케이든을 떠올리다가 순간.

    “악!”

    비명을 내지른 안나가 걸음을 멈추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기사가 너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황제에게 흘렸다던데? 너와 밀회를 즐기던 그 기사 말이야.’

    아니, 대체 언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 거야!

    그래. 며칠 전 기사 행렬이 황궁에 초대되었고, 그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했었지. 그때 그 남자가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이 틀림없어! 미쳤어, 미쳤어. 누구랑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야!

    “아, 죄, 죄송합니다. 턱에 발이 걸릴 뻔해서 그만.”

    어이가 없다는 수행원의 시선이 따라와 안나가 재빨리 변명의 말을 내뱉었다. 수행원이 내딛는 결음의 폭이 넓어져 종종걸음으로 간신히 그의 등 뒤를 따라붙었다.

    화가 났을까? 분명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거야. 물론 입맞춤의 시작은 내가 아니었지만, 화답한 건 사실인걸. 아, 어쩌나. 뭐라고 하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감을 삼키는 사이, 황제의 집무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을 두드려 안나가 도착했음을 알린 수행원이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집무실 안이 진한 술 냄새와 뿌연 궐련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평소처럼 예를 차리고 그의 답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고개를 들라는 말이 들려오질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당장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고 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조금도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지?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가시 수만 개가 박혀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 들어.”

    말끝이 거칠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있었더군. 꽤 오랫동안 정분을 나눈 눈치이던데?”

    “저, 폐하.”

    “다시는 함부로 내 말을 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필리프가 안나의 턱을 살며시 움켜쥐며 고개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눈가가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그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그간 그놈과 만나 시시덕거리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 건가?

    “네가 누구와 어떻게 놀아나던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안 그래?”

    사정없이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무엇일까. 계획을 들킨 것에 대한 당혹감? 조금 더 치밀하지 못했다는 자책?

    “우리 아버지가 아끼던 주방 시종 하나가 있었지.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었어.”

    안나의 턱을 잡았던 손을 놓은 필리프가 갑자기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가 그 여자와 정분을 나누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어. 나는 묻지 않았고, 아버지는 먼저 얘기해 주지 않으셨으니까.”

    궐련에 불을 붙인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 쪽으로 흰 연기를 뿜었다.

    “어느 날 귀족 한 명과 그 여자가 혼인하겠다고 나섰어. 아버지는 그 결혼을 허락했고, 둘은 황궁을 떠나 제국 변방에 살림을 차렸지.”

    궐련을 끝까지 태운 필리프가 궐련 개비를 바닥에 던지며 말을 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 여자는 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했지. 아버지의 눈에 들려 안간힘을 쓴 이유는 오로지 황궁 내 기밀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어.”

    바들바들 몸을 떠는 안나의 앞에 바짝 다가와 선 필리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말해 봐.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내게 접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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