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9)화 (29/139)
  • 29화

    “황녀님, 타론 대공의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음, 가져와.”

    하를 수도원에서 보내온 와인의 맛을 보던 베르나가 감흥 없는 눈동자로 서신을 응시했다. 손에 잡히는 봉투의 두께가 서신의 어마어마한 양을 짐작하게 했다. 피곤하게 됐군.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미색의 편지 봉투를 열었다.

    [사랑하는 나의 반려, 베르나에게.

    잘 지내고 있소? 나는 매일 그대를 생각하고, 그대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곧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어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요. 물론 그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그대가 보낸 서신은 잘 읽어 보았소. 결국은 이 일이 그대 그리고 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꼭 함께 목표를 이루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소. 실수가 없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그대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분명 서신에 자신과 나눈 이야기를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누누이 일러두었는데, 어리숙한 남자는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어질 내용은 읽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반의반도 읽지 않은 편지지를 구겨 바닥으로 내던진 베르나가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남자의 어리숙함에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화를 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제 말을 의심 없이 믿어 주고 모든 일에 제 계획대로 따라와 줄 만한 남자를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재력 모두를 손에 쥔 남자들이 얼마나 오만한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있는 베르나였다.

    그래. 지금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조금씩 내 구미에 맞게 길들이면 그만이야. 이 남자를 찾고 손에 쥐기까지 자그마치 2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이제 와 전부 그르칠 수는 없지.

    “밖에 누구 있지?”

    “예, 황녀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잽싸게 방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술을 더 가져오도록 해. 수도원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서신을 써 줄 테니, 서신을 전할 이를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황녀님.”

    시종 한 명이 베르나의 발밑을 나뒹구는 서신을 정리하는 사이, 다른 시종이 은쟁반에 받쳐 들고 온 술잔을 베르나의 앞에 놓아 주었다.

    “모두 나가 있어. 다시 부를 때까지.”

    “예, 황녀님.”

    빙글빙글 공중에 돌리던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베르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앉아 금빛 자수가 높인 미색의 편지지를 꺼내든 그녀가 책상 우측 향수병 하나를 손에 쥐었다.

    진한 장미 향이 나는 향수에는 다량의 흥분제가 섞여 있었다. 타론이 서신을 받고 편지지에 얼굴을 파묻으며 개처럼 흥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무심한 표정으로 편지지에 향수를 뿌린 그녀가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운 당신께.

    당신의 편지를 읽자마자 답장을 적습니다. 당신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이 편지에 섞여 조금이라도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드넓은 당신 가슴에 고개를 묻기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 있는 요즘입니다. 당신의 냄새, 체온, 손짓이 곧 얼어붙은 제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주시겠지요.

    오늘은 그리 좋지 않은 소식 하나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을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비밀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지난주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종 한 명이 제 방에 숨어들었습니다.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아 어떤 이유로 저를 공격하려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앞으로 모든 일에 더 신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곁에는 우리를 살피는 수많은 눈이 있으니까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과 그가 들어야 하는 말을 적당히 조합하여 편지를 적는 데에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 적은 편지를 찬찬히 읽어내린 베르나가 다시 한번 편지지에 향수를 뿌리고 봉투를 단단히 밀봉했다.

    * * *

    말에서 내린 필리프가 투구를 벗었다. 새로 주문한 투구는 전과 비교해 상당히 가벼운 편이었지만, 내구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황궁 호위병과 기사단 군수용품 전체의 교체를 고려하고 있는 만큼, 실제 사용감을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새 투구는 어떠십니까, 폐하.”

    필리프 황제의 오랜 무술 스승이었던 빌헬름 바이샤르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제국 내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을 소유한 그는, 필리프가 황태자의 자리에 앉게 된 이후 죽 필리프의 검술을 지도해왔다.

    “글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얼굴에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필리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한 번 겨뤄 볼 텐가.”

    잡고 있던 고삐를 시종에게 넘겨준 빌헬름이 나무 의자에 올려놓았던 투구를 뒤집어씀과 동시에 허리춤에 칼을 빼냈다. 불혹의 나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동작이었다.

    “폐하의 실력이 얼마나 느셨는지,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술을 단련하기 시작하면서 늘 목검이 아닌 실제 검을 들고 대련에 임했던 필리프였다. 실제 전투에 임하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줌과 동시에, 상대를 크게 해쳐서는 안 되기에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공중에서 두 개의 칼날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선제공격은 언제나 그랬듯 필리프의 몫이었다.

    “하앗!”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필리프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내리쳐지는 검을 막기 위해 빌헬름이 대각선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간신히 필리프의 검 끝부분을 받아친 빌헬름이 필리프의 머리에 사선으로 검을 뻗었다. 상대의 동작이 커지는 틈에 공격을 시도할 요량이었다.

    “핫!”

    첫 공격이 유효 공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즉시 수비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손목 힘으로 빌헬름의 검을 밀어낸 필리프가 그대로 팔을 뻗어 빌헬름의 목 가까이 칼을 가져다 댔다. 보호구가 없는 빌헬름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 스치기 직전, 빌헬름이 온 힘을 다해 필리프의 뒷날을 뿌리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련이 이어졌다.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상대의 빈틈을 노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 안나! 저기 좀 봐. 황제 폐하 무술 대련하시나 봐!”

    약초 정원에 들렀다가 주방으로 돌아가던 길, 무심코 창밖을 바라본 마샤가 필리프와 빌헬름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와. 폐하 대련하시는 거 보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예전에는 자주 황궁 바로 옆 카이소 성에서 무술을 연습하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황궁 시종들이 폐하의 모습을 보려고 창문 앞에 주르르 달라붙었잖아.”

    “아, 그랬었지…….”

    “저것 좀 봐! 진짜 빨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창문 앞으로 바싹 다가간 안나가 필리프를 찾아냈다. 맹렬한 기세로 서로에게 창을 겨누던 두 사람이 잠시 서로에게서 떨어져 숨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갑옷과 투구로 꽁꽁 가려져 있는 두 사람 중 필리프가 누구인지 알아채는 것은, 안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왼쪽에 계신 분이 폐하이시지?”

    “잠깐만. 두 분이 워낙 키가 크셔서. 원래 폐하가 쓰시는 투구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검은 투구를 쓰지 않으셨네. 저분이 맞나? 하아, 두 분 다 너무 빨라서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

    마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린 창문 밖으로 길게 고개를 빼냈다.

    “마샤, 그러다 다치겠어!”

    마샤의 허리를 단단히 붙든 안나가 필리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움직이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고 물 흐르듯 유연했다. 투구 속에 가려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대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제 가야겠다, 안나. 너무 늦으면 부주방장님께 한 소리 들을 거야.”

    “아, 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늘이 아니라면 또 언제 그가 대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걸. 마샤가 힘주어 안나의 옷깃을 잡아끌었지만,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

    “저기!”

    안나와 마샤의 입에서 동시에 새된 비명이 터졌다. 급하게 상대가 뻗은 칼을 피하다가 바닥에 넘어진 남자의 투구가 벗겨졌다. 필리프였다.

    “안나, 네 말이 맞았어. 저분이 황제 폐하셨구나.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여기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안나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그가 다친 건 아니겠지? 갑옷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혹시라도 보호구가 없는 곳에 칼이 닿았기라도 한다면.

    “안나. 이제 정말 가야 해. 우리 저번에도 늦었다고 한 시간 내내 잔소리 들었잖아.”

    “어, 알았어. 아, 마샤. 너 먼저 가. 나 조금만 있다 갈 테니까.”

    “아니, 그래도.”

    “나 때문에 너까지 혼나면 안 되지. 어서 가. 나 바로 따라갈게. 진짜야.”

    곤란한 표정을 짓는 마샤의 등을 힘주어 밀어낸 안나가 창밖으로 상체를 길게 빼내며 필리프의 상태를 살폈다. 필리프가 제 얼굴 앞으로 뻗은 남자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꽤 공격적인데? 평소와는 전혀 달랐어.”

    빌헬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이 흐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오늘 폐하께서 평소와 다르셨으니까요.”

    한쪽 무릎을 굽혀 대련의 예를 갖춘 빌헬름이 급하게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술 대련 시에는 언제나 방어보다는 공격에 중점을 주셨던 폐하께서, 어쩐 일인지 오늘은 방어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방어에 주력하는 상대가 나보다 월등히 힘이 강했기에, 속여 베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한 필리프가 먼저 빌헬름에게 악수를 청했다. 필리프의 손을 맞잡은 빌헬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셨습니까?”

    “…뭐?”

    “내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다고 느껴지면, 그때부터는 내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니까요. 오늘 폐하의 검술이 달라진 것이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한동안 빌헬름을 응시하던 필리프가 황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그의 눈동자가 닿은 곳은 황궁 주방이 있는 곳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