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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8)화 (28/139)
  • 28화

    주방으로 돌아온 안나가 테이블 끝에 들고 갔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황제의 저녁 테이블에 올릴 음식 손질이 끝나서인지 주방 안이 한산했다.

    주방 뒤쪽에 카라나의 모습이 보여 그녀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녀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제의 수석 시종 중 한 명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석 시종에게 이야기를 들은 카라나가 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예, 주방장님.”

    “달지 않은 호박파이를 준비할 테니 가져다드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카라나가 주방 뒤쪽 음식 저장 창고로 향했다. 안나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퍼지는 것을 경계한 황제는, 며칠 전 카라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여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지만, 지금 내게는 안나 스완이 필요해.’

    ‘…예, 폐하.’

    ‘그대가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해. 괜히 주방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면 곤란하니.’

    ‘알겠습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라나는 황제의 음독 시도 당시 황궁에서 내쳐질 뻔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필리프 황제의 구제를 받았고, 그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황궁 수석 주방장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에게 황제는 생명의 은인, 그 이상의 존재였다.

    황제가 필요하다는 이유 하나면 족했다. 카라나에게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차는 달게 드시는 것을 좋아하시니, 설탕을 따로 준비하도록 해라. 찻물을 너무 진하지 않게 우리도록 하고.”

    “예, 주방장님.”

    안나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준 카라나가 주방 곳곳에 있는 시종들을 불러모아 차례로 일감을 주었다. 안나에게 쏠릴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자. 문밖에 황제 폐하의 시종이 있을 테니, 그분을 따라가도록 해라.”

    안나에게 따라붙는 시선이 있는지를 재차 확인한 카라나가 안나의 손에 은쟁반을 들려주며 말했다. 쟁반을 받아든 안나가 바로 주방을 나섰다.

    시종을 따라 황궁을 나선 안나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황혼이 깃든 노을빛이 너무나도 고왔다.

    “빨리 따라오거라.”

    날카로운 시종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안나가 부지런히 시종의 뒤를 따랐다. 날이 저물어가는 중이라 내리쬐던 햇볕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황궁 주변을 빙 돌아 커다란 청동 조각상을 지나, 병풍처럼 주변을 빙 두른 나무 틈을 통과하니 광활한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 여기로 지나가거라.”

    정원 우측 끝에 선 시종이 바닥까지 늘어진 나뭇가지를 들어 틈을 내어주었다. 들고 있던 쟁반을 힘주어 잡은 안나가 작은 틈 사이를 통과했다.

    “…….”

    나무 틈을 통과해 고개를 드니 자그마한 공간 끝에 기대어 선 새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아…….”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데, 필리프가 먼저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다가왔다. 황금빛 노을이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리로.”

    쟁반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그의 모습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아닙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자그마한 연못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카라나 주방장님께서 호박 파이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이시라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매번 긴장감이 심해지고, 가슴의 떨림이 커졌다. 차분히 숨을 고른 안나가 찻잔 위로 찻물을 따랐다. 주전자 손잡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떨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나가 힘주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순간 따뜻한 온기를 지닌 필리프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주먹 위로 얹어졌다.

    “왜 그렇게 떨고 있지?”

    그의 손이 닿자마자 힘이 풀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단단한 손끝이 파고들었다. 손바닥 안쪽을 간지럽히듯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면 그만 돌아가 봐도 괜찮아.”

    다정한 그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들어 다급히 답했다.

    “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좀…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이 설레어서요.”

    안나의 답을 들은 필리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의 움직임이 점점 대범하게 얽혀들었다.

    “저… 자, 잠시만.”

    그의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분명 엉망으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그에게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순순히 안나의 손을 놓아준 그가 살짝 몸을 물렸다.

    “앉아.”

    “…예, 폐하.”

    필리프가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의 반대쪽 의자를 빼내어 주었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은 안나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나 이외의 사람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야.”

    필리프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머금었다.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안나는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황금빛 노을 때문인지, 드레스 틈을 파고드는 눅눅한 여름 공기 때문인지, 귓가를 간지럽히는 산새의 지저귐 때문인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라나의 음식이야.”

    호박파이로 시선을 내리며 말한 그가 안나에게 먹어보라는 듯 포크를 건넸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안나의 완곡한 거절 의사에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파이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파이가 좀 탄 것 같은데.”

    “…예?”

    어? 분명 앞뒤 고루 잘 익은 것을 보았는데. 게다가 갓 구웠을 때 파이를 넘겨받았지만, 탄내는 전혀 나질 않았는걸.

    “그, 그럴 리가…….”

    “내 입에만 그런 건가? 어디, 먹어 봐.”

    필리프가 놀라 벌어진 안나의 입안으로 불시에 파이 조각을 밀어 넣었다. 입속 파이를 씹기 시작한 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파이는 아주 부드럽고 고소했다. 잘 익은 호박 조각을 신중히 씹었지만, 탄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져?”

    입안의 파이를 꼭꼭 씹어 넘긴 안나가 입을 벌리는데, 다시 커다란 파이 조각이 입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고소한 호박 향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자, 마셔.”

    안나가 파이를 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필리프가 그녀의 앞에 찻잔을 밀어주었다. 찻잔을 든 안나가 찻물과 함께 입안에 남은 파이를 삼켰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제 입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 역시 카라나의 솜씨야.”

    “…예?”

    뭐야.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거였어?

    허탈한 안나의 얼굴과는 반대로 필리프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만연했다. 커다란 손이 안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결 좋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려 놓았다.

    “그러니까 내 말에 잘 따라주는 게 좋을 거야. 결국은 전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오만한 말을 뱉은 그가 안나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속도 모르고 상승하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한 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내내 열 번도 넘게 필리프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 다행히 그는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밝히던 노을이 조금씩 걷히면서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주방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주변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괜한 소문으로 필리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빈 접시를 잠시 내려다보던 안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저는 이만.”

    “음.”

    안나가 쟁반을 잡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또 그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훅 딸려 나간 몸이 그의 품에 안착했다. 쟁반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무릎 아래에 떨어져 내렸다.

    “폐하…….”

    “괜찮아?”

    여유롭게 안나의 허리를 당겨 안은 그가 귓바퀴에 얼굴을 기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바짝 닿은 가슴으로 전해졌다.

    안나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허리, 가슴, 어깨 뺨을 쓸어 자리한 곳은 귓불이었다. 소리를 삼키려 입술을 깨무는데 뜨거운 숨결을 담은 음성이 귓바퀴에 밀려들어 왔다.

    “조심해야지.”

    “…아, 그…….”

    다소 짓궂은 음성이었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온몸에 열이 올랐다.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밭은 숨을 내뱉는데, 말캉한 입술이 귓불이 닿고 뜨거운 무언가가 귓바퀴 안을 파고들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생경한 감각에 뱉으려던 소리를 그대로 삼킨 안나가 질끈 두 눈을 감으며 다급한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안나가 다급하게 몸을 웅크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 꿈틀거려 보았지만, 어느새 방향을 바꾼 손끝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굽었던 등이 자연스레 펴지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안나의 호흡이 일정해진 후에야 그가 밀착하고 있던 가슴을 떼어내 주었다. 한꺼번에 몰린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저는 그럼…….”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쟁반에 접시를 정리하는 안나를 바라보던 필리프가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테이블 위 쟁반을 잡아들기 바로 직전, 안나의 입술에 말랑하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짧은 입맞춤이었다.

    두어 걸음 뒷걸음친 안나가 빠르게 등을 돌려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중심을 잡기가 힘겨웠지만, 발가락에 힘을 주어 어렵사리 비좁은 공간을 통과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황제의 호위병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안나가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몽롱해진 정신을 다잡기 위해 하나, 둘, 셋, 넷, 다섯. 차례대로 숫자를 셌다.

    낮은 돌계단을 올라 황궁 안에 들어서고서야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안나가 조심스레 등을 돌려 보았다. 시야 끄트머리 즈음 시종들을 이끌고 정원을 나서는 필리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가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눅눅한 여름 바람이 안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려놓았다. 너무나도 싫어했던 이 여름이라는 계절이, 어쩌면 조금씩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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