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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7)화 (27/139)
  • 27화

    “자, 안나. 이것을 이 정도 크기로 다듬어라. 너무 크면 보기 좋지 않으니까.”

    “예, 주방장님.”

    “안나! 채소 다듬는 것이 끝나면 이쪽으로 와서 해산물 손질을 돕도록 해.”

    “예, 부 주방장님.”

    어딜 가든 이놈의 일복이 문제였다. 채소 손질이야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지만, 손이 빠른 이유 때문인지 언제나 안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배가 넘는 일감이 주어지곤 했다. 안나가 한숨을 쉬며 수북한 채소 더미로 손을 뻗었다.

    탁탁탁탁.

    멍한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채소를 썰어 빠르게 손질을 마친 안나가 젖은 손을 닦으며 놀만 부인에게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고강도의 업무를 해내면서도 체력의 한계를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젊음이 최고인가.

    “어?”

    놀만 부인이 서 있는 조리대 앞에 오징어 몇 마리가 놓여 있었다. 가만, 이 시대 사람들도 오징어를 먹었나?

    “먹물을 이 그릇에 담도록 해라.”

    “예. 아, 그럼 몸통은 잘게 썰어 손질할까요?”

    “뭐?”

    놀만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먹물만 사용할 것이니, 남은 것은 들통에 담아 버리면 된다.”

    무슨 말이지? 먹물만 사용하고 이 맛있는 오징어를 그냥 버리라는 소리야? 그냥 굽기만 해도 훌륭한 맥주 안주가 되는 이 오징어를? 안 되지.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저, 그럼 제가 이 몸통을 좀 써도 될까요?”

    “이걸?”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아직 오징어 맛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간단한 재료만으로도 수십 가지의 요리가 가능한 훌륭한 음식 재료를 이대로 폐기 처분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냥, 칼질 연습도 할 겸 해서요. 이게 아무래도 좀 미끄러워서 잘 썰리지 않으니까 칼질 연습에는 제격일 것 같아서요.”

    “뭐, 그렇게 해라.”

    “네. 감사합니다!”

    놀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허락의 말을 뱉었다. 쾌재를 부른 안나가 먼저 오징어 먹물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이야, 이거 몸통이 워낙 큰 놈이라 먹물 주머니도 큰데? 아, 이걸로 파스타 해 먹으면 정말 맛있을 텐데.

    고소한 먹물 파스타를 떠올리며 꿀꺽 군침을 삼킨 안나가 나머지 내장을 뚝딱 제거하고 입과 이빨을 제거했다. 총 열 마리 오징어의 먹물 주머니와 내장을 완벽히 제거하는 데는 고작 5분 정도가 걸렸을 뿐이었다.

    분리한 먹물 주머니를 깨끗한 그릇에 옮겨 담아 뚜껑을 덮어 보관하고, 오징어 몸통과 다리는 따로 한데 모아 담았다. 슬쩍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정신없이 맡은 재료 손질에 열중인 모습이었다. 오징어 통을 소중히 품에 안은 안나가 주방 조리대 끝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키친타월이 있었으면 손질이 훨씬 쉬웠을 텐데. 아쉬움을 삼킨 안나가 소금을 묻혀가며 오징어의 머리 쪽부터 껍질을 벗겨냈다.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주방 시종들의 소금 사용이 제한된 터라 소량의 소금으로 오징어 열 마리의 껍질을 분리해야 했다.

    안나가 슬쩍슬쩍 카라나와 놀만의 위치를 확인하며 빠르게 오징어 손질을 마치고, 깨끗하게 손질된 오징어를 폭이 깊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이따 쉬는 시간이 되면 잠시 훈제 실에 다녀와야지. 연기를 입혀 살살 구워주면 맛이 정말 끝내주겠지? 마샤를 데리고 가서 맛보여줘야겠어. 안 먹어 봐서 모르지, 한번 먹어보면 앞으로는 없어서 못 먹을걸?

    뿌듯한 마음에 키득키득 웃던 안나의 머릿속에 문득 필리프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에게도 꼭 맛보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먹어 본 적 없는 생소한 음식을 바로 먹으려 하진 않겠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인데 생소한 음식에 거부감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 다른 음식을 해 주면 되지 뭘.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손질된 오징어 그릇을 조리대 가장 안쪽으로 밀어 넣고 먹물 주머니가 담긴 그릇을 들고 놀만에게 향했다.

    “저, 다 분리했습니다.”

    “그래. 상태가 좋은 것으로 골라 컵에 따르도록 해라. 컵은 카라나에게 전해주고.”

    “예, 부 주방장님.”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카라나가 안나의 손에서 새까만 먹물이 가득 담긴 컵을 빼앗아 들었다. 은쟁반에 컵을 받쳐 든 카라나가 향하는 곳은 별궁이었다.

    황녀님께 드리려는 모양이지? 아, 그러고 보니 예전 페스트가 창궐할 때 오징어 먹물이 즉효가 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오징어 먹물의 인기가 상당해졌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건강을 위한 욕구는 끝이 없구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안나가 주방을 돌아보며 시종들의 일을 거들었다. 처음 안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던 시종들도 있었지만, 안나가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일손을 거들면서 그들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자, 이리 줘. 이건 내가 할게.”

    “아니, 난 괜찮은데…….”

    “아냐. 나 지금 할 것도 딱히 없어서 그래.”

    안나가 시종 한 명의 손에서 큼직한 양고기 한 덩이를 받아 바로 손질을 시작했다. 잔꾀를 부리지 않는 안나의 성실함은 도저히 3년을 버티기 힘들다는 한식당에서 자그마치 5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내게 한 원동력이었다.

    “자, 모두 수고했다. 점심 준비 때까지 좀 쉬도록 해라.”

    “예, 주방장님.”

    이 얼마나 기다리던 소리인가.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은 안나가 오징어가 담긴 그릇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마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한참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도저히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구워서 주는 수밖에. 바로 구워서 먹을 때가 제일 맛있지만, 마샤를 찾느라 휴식 시간 전부를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주만 있으면 완벽한데.”

    훈제 실에 도착해 불을 피운 안나가 잘 손질된 오징어를 기다란 꼬치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앗, 마요네즈를 좀 만들어 놓을걸. 간장 마요네즈,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소스에 요걸 탁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인데 말이야.”

    그런데 정말 간장을 만들 방법은 없는 건가? 한식을 만드는데 간장은 필수인데. 여기 볕도 참 좋고 공간도 넓은데 몰래 간장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 숨길 곳은 충분해 보이는데 말이야.

    간장 단지 숨길만 한 곳을 찾아 훈제 실 이곳저곳 눈을 돌리는 사이 오징어가 알맞게 익었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오징어를 바라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흥건히 고여, 아마 조금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굽고 먹고, 굽고 먹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안나가 들고 있는 통에는 손질한 오징어 한 마리만이 남아 있었다.

    “헉! 안돼! 한 마리는 마샤에게 줘야 하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안나가 정성스럽게 구워낸 마지막 오징어를 접시에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제 실을 나서 서둘러 주방으로 발을 옮기는데 저 멀리 황제와 그를 호위하는 수행원 행렬이 보였다.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안나가 복도 끝 커다란 초상화 뒤쪽에 숨어들었다. 그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쿰쿰한 오징어 냄새를 풀풀 풍기기가 싫은 마음이 컸다.

    제발 그냥 가세요. 저 멀리 가세요. 이번 한 번만 그냥 못 본 척 스쳐 지나가세요.

    마치 염불을 외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안나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역시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제 나오지?”

    이럴 때일수록 너무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안나가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초상화 앞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수행원들을 멀찌감치 물려 놓은 필리프의 한쪽 입꼬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거기서 대체 뭘 하는 거야?”

    “아, 저 그게…….”

    “마치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은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야. 내 느낌이 틀린 건가?”

    아뇨, 맞습니다. 눈치 한번 대단히 빠르시네요. 그걸 눈치챘으면 그냥 피해 주면 좋았잖아요. 꼭 이렇게 아는 체를 하셔야 했나요.

    “아, 아닙니다. 새, 새로운 식자재가 있어서 구워 보았는데, 생각보다 냄새가 많이 나서… 그래서.”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그녀가 등 뒤로 감춘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가?”

    “예? 아, 예.”

    필리프가 태연한 표정으로 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됩니다, 이건 마샤를 위해 준비한 건데요. 단호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안나에게 그럴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방금 구워서 조금 뜨거우니 천천히 드십시오. 아, 이건 먹물을 뺀 오징어인데, 짭짤하여 술안주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간이 좋아서 이런저런 요리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구워 보았습니다.”

    필리프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안나와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접시에 오징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오징어 특유의 쿰쿰한 향이 그리 마음에 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흡…….”

    필리프가 순간적으로 안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참는데,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필리프의 입가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음.”

    그가 작게 자른 오징어를 입에 넣었다. 그가 오징어를 씹어 넘기는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던 안나가 조금씩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이게 그렇게 맛있었어?”

    “예?”

    오징어를 삼킨 필리프가 다시 안나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대로 순순히 안나의 의지대로 따라 줄 남자가 아니었다.

    “네 입가에서 이 냄새가 진동하더군. 대체 얼마나 먹어 치운 거지?”

    “…….”

    숨을 들이마시며 그대로 입을 가린 안나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냥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그걸 왜 또 지적하고 난리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어제 입 맞춘 사이잖아. 저 남자에겐 어제 그 입맞춤이 그냥 아무렇지 않은 장난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것으로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다고?”

    “예? 아, 예…….”

    안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다음 요리도 기대가 되는데?”

    등을 돌린 필리프가 등 뒤 수행원들에게 눈짓하자, 수행원들이 일제히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안나의 정수리에 내려앉고, 한동안 움직임 없이 머물렀다.

    “신기하지.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것인데, 네 손이 닿았다는 이유로 다시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듯 반응해 왔다. 심장이 너무 뛰어 눈앞이 깜깜하게 닫히는 기분이었다. 정수리에 머물렀던 그의 손이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와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원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 좋겠는데.”

    “…예?”

    “다과를 준비해서 황궁 밖 정원으로 가져다주겠어?”

    “아, 예. 예! 물론입니다.”

    떨어지는 손끝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안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달큼한 미소를 보인 필리프가 등을 돌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발을 떼어내지 못하던 안나가 그의 손이 닿았던 정수리와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따스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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