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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6)화 (26/139)
  • 26화

    아니, 저기요. 그게 그렇게 눈물까지 매달고 웃을 일인가요?

    머쓱한 표정을 지은 안나가 필리프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그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단번에 지워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너무 걱정할 것 없어.”

    “…….”

    “어려서부터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욕심이 많았지. 제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꼭 손에 넣으려 했으니까.”

    필리프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렸던 베르나였지만,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베르나가 제 자리를 노리게 될 것을 예상했던 필리프는 그녀의 주변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사람 몇 명을 심어 두었었다.

    “결혼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테니까, 쉽게 일을 꾸미지는 못할 거야.”

    베르나가 결혼해 제국을 떠난다고 해서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격에 대처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지?”

    “…예?”

    “키스 말이야. 너와 내가 키스한 것을 황녀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잖아.”

    “아, 그, 그게…….”

    필리프는 마치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듯 턱을 괴고 안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내비치는 순간, 필리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그냥 얼버무렸습니다.”

    “왜?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어차피 본 것을 확인하려 한 것이었을 텐데.”

    “하지만!”

    혹시라도 필리프가 곤란해질까 봐 나름 배려하여 사실을 감춘 것이었는데,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말을 멈추지? 계속해.”

    “아, 아닙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다. 수틀리면 언제라도 저년의 목을 치라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화를 삼키자. 욱하는 성질을 그대로 내보이면 안 된다.

    후우. 깊게 심호흡한 안나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필리프와 눈을 맞추었다. 안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은 필리프가 불시에 화제를 바꾸었다.

    “곧 수확제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

    “예? 아, 예. 물론입니다.”

    수확제? 뭐지? 약간 추석 같은 개념이겠지?

    “행사가 열리기 전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

    필리프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술병으로 향했다. 함께 시선을 돌린 안나가 그제야 오늘 필리프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너도 함께 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

    “…네? 어디에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또 언제 가는지도…….”

    “그날 말해 주지.”

    아, 진짜 답답하게 구네.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안 될까요?

    “내일은 황궁 기사단 만찬을 준비해야 할 거야.”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인지, 필리프가 술병을 테이블 바깥으로 죽 밀어놓았다. 황궁 기사단 만찬이라. 엄청 바쁘겠네. 잠깐, 기사단 만찬?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안나가 문득 자신을 기다리겠다던 케이든을 떠올렸다.

    “맞다!”

    케이든이 오늘은 꼭 나와 달라는 말을 건넸었는데,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는데. 설마 오늘도 그렇게 미련하게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에? 아, 아닙니다. 주방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그만. 하하하하.”

    어색하게 웃은 안나가 이마 아래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뱉은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리된 접시를 직접 은쟁반에 옮겼다.

    “제가 하겠습니다!”

    황제가 직접 식기를 정리하게 할 순 없어, 안나가 급히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다급하게 뻗은 손끝이 그의 손등을 스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상하지.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 그게 싫지가 않으니.”

    “…….”

    낮게 깔린 나른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잡힌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귓가를 느릿하게 쓰다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심장이 가슴을 벗어날 것처럼 팔딱거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구라도 네게 해가 될 것 같은 행동을 한다면 즉시 나를 찾아오도록 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머릿속이 그대로 텅 비어버리는 느낌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답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그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간신히 입술의 틈새를 벌린 안나가 기어들어 갈 것처럼 낮은 소리로 답했다.

    “…네.”

    찬찬히 안나의 얼굴을 훑은 필리프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의 손에 쟁반을 들려주었다.

    “그,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긴장을 견딜 수 없어 빠르게 내뱉은 안나가 허둥지둥 뒤돌아서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강하게 끌리는 마음이,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안나가 그의 체온이 닿았던 오른쪽 손가락을 느리게 매만졌다.

    그는 나에게 과연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 그 크기가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비슷한 종류의 마음인 걸까?

    숙소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에야 안나는 자신이 식기를 주방에 반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이, 귀찮게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안나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머릿속에 다시 한번 케이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나. 오늘은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얼굴은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 얼굴을 보고 확실하게 말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더는 과하게 들이대지 않겠지. 그런데 대체 둘만의 장소가 어디인 줄 알아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주방 개수대에서 접시 설거지를 마친 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는 장소를 신통하게 가르쳐 주곤 했던 발이 오늘은 절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가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래. 바보가 아닌 이상 오늘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제풀에 지쳐 포기하겠지. 모르겠다. 그냥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잠시 황궁 복도를 방황하던 안나가 숙소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내내 잠잠했던 발이 바로 방향을 바꾸게 했다.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즉시 몸에 힘을 푼 안나가 발이 안내하는 길을 꼼꼼히 살폈다.

    “으앗!”

    황궁 서쪽 복도를 가로질러 각종 장식품이 화려하게 전시된 갤러리로 접어들었다. 갤러리 우측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석상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는데, 발끝을 뾰족하게 세운 다리가 줄지어 세워진 석상 틈을 파고들었다.

    뭐야. 상체를 낮추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얼굴을 석상에 들이받을 뻔했잖아.

    깜짝 놀란 마음을 다잡을 시간도 주지 않은 다리가 보폭을 넓혀 걸었다. 석상 틈을 통과해 검은 천 사이를 뚫으니, 어두컴컴한 동굴과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건 뭐지?”

    더듬거리던 손에 버석거리는 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겠다 싶어 천이 닿았던 손에 힘을 푸는 순간이었다.

    “헙!”

    천으로 덮인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케이든이 몸을 일으키며 안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너무 놀라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안나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니, 도대체!”

    “오늘도 오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저기요.”

    “그리웠습니다. 다시 당신을 안게 되는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이 구역 얼빠인 서안나가 어째서 이 미남자에게 크게 끌리지 않았는지, 오늘에서야 확실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신, 너무 느끼해. 얼굴도, 멘트도. 역시 내 취향이 아니야.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더 시간을 끄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나가 서둘러 말을 뱉었다. 어둠에 가려 케이든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제가.”

    살며시 들어 올린 이마에 무언가 촉촉한 감촉이 닿고, 곧 단단한 손바닥이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왔다. 곧바로 질겁한 안나가 몸을 버둥거렸지만, 허리를 감싼 손의 악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손 놔요. 놓지 않으면 소리치겠어요.”

    밀착된 몸으로 느껴지는 온기 자체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었다. 분명 낯선 감각은 아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지 않게 할 테니,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사님. 제 마음은 늘 기사님을 향해 있을 것입니다.’

    머릿속이 들끓었다. 차라리 기억나지 않았으면.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달콤한 사랑 고백을 하는 케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안나와 케이든의 입술이 겹쳐지는 모습, 으스러질 듯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는 모습이 차례로 보였다.

    “아니야!”

    “괜찮습니까. 자, 숨을 쉬십시오.”

    안나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푼 케이든이 들고 있던 작은 횃불에 붉을 밝혔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안나의 등이 흐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왜 이렇게 땀을! 안 되겠습니다. 당장 제 등에 업히십시오.”

    “놔요!”

    케이든의 팔을 뿌리친 안나가 현기증이 나도록 세게 도리질을 쳤다. 분명 원래 이 몸의 주인은 눈앞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원래 주인의 삶에 협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실 당신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앓은 이후로 그 전 기억이 전부 희미해졌어요. 당신뿐 아니라 내가 알던 모든 이에 대한 기억이요.”

    요동치던 맥박이 차츰 가라앉았다. 횃불에 비친 케이든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했던 그 많은 시간이 정말 하나도.”

    잠시 말을 멈춘 케이든이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까?”

    안나가 케이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낮게 실소한 그가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긴 침묵 끝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명 다시 기억해 낼 것입니다.”

    “저는.”

    “나를, 그리고 우리를.”

    마지막으로 뱉어 놓은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답변도,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도 해 줄 수 없었다. 케이든이 안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몸이 휘청일 것 같았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다잡았다.

    안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케이든이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쥐여 주며 먼저 등을 돌렸다. 조용히 한숨을 흘린 안나가 천천히 어두운 공간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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