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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2)화 (22/139)
  • 22화

    근사한 필리프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안나는 문득 한식당 동료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근데 키스하면 어떤 느낌이야? 정말 막 머릿속에 종이 울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래?’

    ‘글쎄. 머릿속에 종까지 울리는 건 아니야.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가 좀 곤란한데… 음… 발가락이 그냥 확 오므라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뭐 암튼 그래. 너도 해 보면 알 거야.’

    키스와 발가락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에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 누군가와 처음 입을 맞추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냥, 폭신한 무엇과 입술을 맞대는 것이 키스구나, 정도의 감상을 가르쳐 주었던 기억을.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토록 발가락이 확 오므라드는 것일까. 실제로 그와 키스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

    심장이 너무 뛰어 무슨 말이든 꺼내 보려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안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있다가는 부정맥으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 뭐야.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저 기분 탓인가?

    안나가 저도 모르게 삼킨 숨이 민망하게도 큰 소리를 내며 목구멍을 넘어갔다.

    “자, 잠깐만.”

    파드득. 안나가 몸을 비틀었지만, 필리프가 가볍게 그녀의 뺨을 감싸듯 잡아 움직임을 저지했다.

    “내가 이러는 게 혹시 기분이 나쁜가.”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음기가 묻어있는 낮은 목소리가 안나의 온몸 전체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고작 숨 한 번 닿았을 뿐인데, 그의 숨결이 닿은 살결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대답이 없지? 설마 진짜 기분이 나쁜 거야?”

    그가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끝이 반쯤 갈라지는 나른한 음성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기분이 나쁜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긴장감에 말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필리프가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조금씩, 아주 느리게 그녀의 눈가가 사르르 접혀 들기 시작했다. 입술을 살짝 말아 문 필리프가 눈썹을 미세하게 찡그리며 잡은 안나의 볼을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살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손을 조금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뜨거운 맥박이 닿은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니까… 아마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뺨을 타고 올라간 필리프의 손끝이 안나의 발개진 눈가와 코끝에 닿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안나의 매끄러운 얼굴 곳곳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앙다문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고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뱉어졌다.

    “나는 기분이 좋은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안나의 입술에 닿지 않은 필리프의 손이 바람이 흩뜨려 놓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싫으면 이야기해.”

    가늘게 몸을 떤 안나가 연거푸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손의 움직임을 멈춘 필리프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혼란스러움에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적어도 거부할 마음이 없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필리프가 안나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주 살짝 벌어져 있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이제껏 맡아본 적 없는 달콤한 향이 풍겼다. 휘청거리는 몸이 자신에 품에 맞춘 듯 맞아 들었다.

    입술 위에 촉촉하고 폭신한 것이 닿는 순간 머릿속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기 직전, 필리프는 안나에게 피할 시간을 주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를 보는 순간, 안나는 그저 답 대신 눈꺼풀을 슬쩍 내리감았다. 이것이 충분한 답이 되었기를 바라며.

    어쩌면 그는 자신이 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도 없었다, 피할 생각 따위.

    기다란 손가락이 안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미끄러져 내려간 손이 안나의 목덜미를 강하게 감싸 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커다란 손이 매끄럽게 허리를 감고 소름이 돋은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온몸의 털이 그대로 쭈뼛 서는 아찔한 두근거림이 찾아들었다.

    입술 사이로 뱉어지는 숨결이 너무 뜨거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절로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그의 혀가 벌어진 입술 틈을 망설임 없이 헤집었다.

    “으읍!”

    키스를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몽롱해진 정신을 애써 다잡으려 노력했다. 안나가 예전에 경험했던 키스를 떠올리려 해 봤지만, 바로 얽어 오는 적나라한 혀의 감촉에 머릿속 생각은 바로 흐트러졌다.

    숨을 쉬는 방법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오른손이 끊임없이 뺨을 쓰다듬어 입술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그의 혀가 확보된 공간을 여유롭게 유영했다. 안나가 간헐적으로 호흡하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힘이 실릴 리 없는 손이 그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으, 읏… 읏…….”

    그가 주는 온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모자란 숨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안나가 필리프의 재킷 자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순순히 얼굴을 뒤로 물려 주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젖은 소리를 냈다.

    “들이마시고 내쉬어야지.”

    그가 잠긴 목소리로 친히 숨을 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헐떡이는 모습이 좀 안쓰럽기는 한 모양이었다.

    “핫, 하아…….”

    “좋은 맛이 나는데.”

    “…….”

    “네 입술에서.”

    조금 멀어졌던 그의 얼굴이 다시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다. 간지럽게 닿아오는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다시 시작된 키스는 조금 더 거칠고 농밀했다.

    “…읏…….”

    힘을 실은 혀끝이 안나의 입안 전체를 훑고, 입천장과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까지 닿았다.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에서 흘러 턱 끝에 맺혔지만, 닦아낼 겨를은 없었다.

    혀와 혀가 엉키는 소리와 입안 깊은 곳에서 흐르는 달뜬 신음이 뒤섞였다. 목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키스가 이렇게 좋은 것이었나? 이대로 영원히 키스만 하고 살아야 한대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 단단한 필리프의 어깨 위로 팔을 겹쳤다.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감아 오는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적극적으로 그의 혀를 빨고 핥았다. 그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가는 것이 어설픈 제 행동을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가 주는 자극이, 온기가, 마찰이 너무 좋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살짝 내민 혀를 그가 이로 물어 자신의 입속에 가두었다. 혀끝이 수없이 엉키고 비벼졌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안나의 호흡과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가 뱉어지는 소리를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긴 입맞춤으로 모자란 숨을 더는 참아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그의 혀와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안나가 빠르게 숨을 몰아쉬며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해진 시야가 점차 밝아지고 짧은 숨을 내쉬는 근사한 얼굴이 보였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데.”

    그가 안나의 입술과 턱 끝에 맺힌 타액을 닦아주며 말했다. 손끝이 제법 부드럽고 다정했다. 입술에 틈 없이 밀착되어 있던 온기가 사라지니, 차마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다시 따뜻한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쳐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제대로 된 단어를 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입술은, 계속해서 그의 입술이 주는 열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늘 술을 한잔하고 싶지만, 지금 상태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무리일 테니까.”

    안나의 입술로 향하던 그의 얼굴이 그녀의 뺨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나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손길이 깃털처럼 조심스러웠다.

    “내일 침실에서 함께 한잔하는 것으로 하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바퀴에 차곡차곡 고였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술이 귓바퀴를 스치듯 건드렸다. 간지럽게 닿아오는 숨결에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아쉬움을 삼킨 필리프가 안나에게서 느릿하게 몸을 떼어냈다.

    “그래도 괜찮겠어?”

    잠시 몽롱해진 표정으로 숨만 내쉬는 안나를 바라보는 필리프의 입가가 다시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아,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은 조금씩 안정되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대로였다. 계속되는 마찰로 입안의 얼얼함이 뒤늦게 느껴지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곤할 테니까 먼저 돌아가 봐.”

    “…예?”

    “왜. 데려다줄까?”

    “…아, 아, 무슨! 아, 아닙니다. 그, 그 폐하도 잘, 아니 그럼 안녕히, 아니 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안나가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엉터리 같은 인사말을 전했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등을 돌려 정원 출입구로 향하려는데, 힘이 풀린 다리가 자꾸만 휘청거렸다.

    안돼! 정신 차려, 서안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잖아!

    뒤통수에 와 닿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한발 한발 힘주어 앞으로 내디뎠다. 문제없이 출입구를 통과하니,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한꺼번에 힘이 풀렸다. 출입구 우측 청동 동상 사이에 쓰러지듯 몸을 숨긴 안나의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그대로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에서 무슨 폭발 같은 것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눈앞에 오직 필리프의 얼굴만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아무리 안정시키려 해 봐도 엉망으로 엉켜버린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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