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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1)화 (21/139)

21화

네? 잠시만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황제의 말에 당황한 안나가 숨을 내쉬려던 것도 잊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번뜩 고개를 드니, 여유로운 표정을 한 필리프가 술잔을 집어 입술을 적시는 것이 보였다.

“커, 컥컥.”

너무 오래 참고 있던 숨을 급하게 들어 마시려다 그만 사레가 들려 한참을 캑캑거려야 했다.

“무, 물을 좀!”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안나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히는 잔을 들어 그대로 목구멍 안으로 들이붓고, 액체를 모조리 삼켜버린 후에야 깨달았다. 술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황제가 마시던 술!

“흐헉! 죄, 죄송합니다, 폐하.”

들고 있던 잔을 그대로 놓은 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생기침을 해 칼칼한 목구멍이 숨을 쉴 때마다 따끔거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가지가지 한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죄송합니다, 폐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입고 있던 재킷 안쪽에 꽂혀 있던 손수건을 내던지듯 밀어주었다. 슬금슬금 손을 뻗은 안나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손수건을 집어 입가를 닦았다.

“네가 황궁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황제의 여자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사람은 없을 테니.”

태연하게 내뱉은 그가 테이블에 나뒹굴고 있는 술잔을 바로 세웠다. 무심하게 술병을 기울인 그가 빈 잔을 채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마른 혀가 자꾸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침을 모아 삼켜 입안을 적신 안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죄,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필리프가 허탈한 탄식을 뱉으며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내 여자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 건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깨문 안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폐하.”

성에가 낀 듯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의 여자가 된다는 의미는 하나였다.

그러니까 약간 수청을 들라는 의미인 건가? 으악! 정말 진짜 그러면 어떻게 하지? 설마 지금 당장? 여기서? 그래.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 침실에 불려갔을 때도 분위기가 조금 야릇했었어. 만약 그대로 기절하지 않았으면 그날 뭔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끝을 길게 늘인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높이의 차이가 훌쩍 벌어지니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고개는 점점 발끝을 향해 수그러들었다.

안나가 앉은 의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무릎을 굽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얼굴이 코앞이었지만, 굳어 버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한에 걸린 사람처럼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데, 기다란 손가락이 턱밑으로 들어와 억지로 안나의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지금 설마 제국 황제를 상대로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건가?”

“에? 아니, 그게 무슨!”

당신이 황제의 여자 어쩌고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그딴 상상 하지 않았을 거라고! 당황해 붉으락푸르락해진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필리프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제가 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네가 할 일이야 뻔한 것이 아닌가.”

“…….”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될 뿐이지.”

말을 하면 할수록 가슴 속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도저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여전히 코앞이었다.

“나도 너를 베르나에게 보내고 싶지는 않아.”

안나가 굳은 채로 멀뚱멀뚱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가 입꼬리를 설핏 올려 웃으며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표정인데. 맞아! 그의 침실을 찾아 기절해 버리기 직전 보았던 표정이야.

“아무래도.”

안나의 얼굴에서 떨어진 시선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잠시 안나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단단한 손끝으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쭉 말하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요. 심장이 너무 뛰어서 금방이라도 가슴을 가르고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시선을 피하면 좀 나을 것 같았지만, 그가 시선의 엇나감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꽤 마음에 들거든.”

저기요, 주어가 빠졌잖아요. 내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 맞나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나의 시선을 꼭 잡아 붙든 그가 입을 열었다. 먼저 따스한 숨결이 뺨에 와 닿았다.

“네… 요리 말이야.”

가파르게 상승했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수치심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탈한 안나의 표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필리프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네 실력이 뛰어난 건지, 내 입맛에 유독 네 요리가 잘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

“너를 이대로 보내면 어쩐지 후회하게 될 것 같단 말이지.”

뭐라 대꾸해 줄 기운도 없었다. 잔뜩 긴장해 쭈그리고 있던 어깨에 뒤늦은 뻐근함이 찾아들었다.

“걱정인 것은, 황녀의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이지.”

원래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간 필리프가 술을 가득 채운 잔을 안나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비뚤어진 기분을 술로 풀고 싶지는 않아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두 번 권유하지 않았다.

“황녀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행동을 보여 줘야 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일 밤, 황궁 중앙 정원으로 오도록 해. 정확한 시간은 따로 일러 줄 테니까.”

황궁 중앙 정원은 시종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었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뭐라 부가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장은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알겠습니다.”

땀이 차오른 손바닥을 치맛단에 비벼 닦아낸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시면 그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던 필리프가 그대로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황제의 집무실을 나선 안나가 떨리는 입술 안쪽을 아프게 깨물었다.

* * *

제국의 큰 명절인 수확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황녀의 결혼에 이어 수확제를 연달아 개최하는 것이 황궁 재정에 무리가 되었지만, 중요 연례행사를 축소 개최할 수는 없었다.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예, 폐하.”

샤를 광장에서의 연회와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음식에 대한 보고를 들은 필리프가 서류를 덮으며 수행원을 물렸다. 깍듯한 인사를 전한 수행원이 집무실을 나서자 묵직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것으로 오늘 황제로서의 공식적인 일정은 마무리되었지만, 하루 내내 필리프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비공식적인 일정이 남아 있었다.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집무실을 나서던 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락해 주시면 그만 물러나겠다는 말 자체는 당돌했지만, 목소리에서는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왜 그랬을까.

안나 스완을 곁에 두고 싶은 제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그저 하룻밤을 지새우면 그만이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가지고, 취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한낱 황궁 시종 신세일 뿐이니.

종 줄을 잡아당겨 수행원을 부른 필리프가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별궁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할 정원이니, 베르나가 자신과 안나 스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

“황녀가 아직 황궁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예, 폐하. 좀 전에 항구에 내리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타론 공작을 만나기 위해 오늘 하루 황궁을 비웠던 베르나였다. 그래, 시간이 완벽히 맞아떨어지겠군.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황궁 롱 갤러리를 지나, 중앙 정원으로 향하는 복도를 돌았다.

“말씀하신 대로 정원 우측으로 테이블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 이제 부를 때까지 물러나 있어.”

“예, 폐하.”

정원 문을 온전히 개방하지 않아도 창문을 통해 정원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시종이 빼준 의자에 앉은 필리프의 시선이 정원 출입구로 향했다. 밤바람이 맑았다.

잠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정원 입구를 통과하는 안나의 얼굴이 보였다. 필리프의 위치를 확인한 그녀가 천천히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제껏 그녀에게 들어본 것 중 가장 딱딱한 목소리였다. 즉시 고개를 들라 말한 필리프가 반대쪽 의자를 가리켰다.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일부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라 말한 것 같은데.”

필리프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시선 끝은 고집스럽게 테이블을 향해있었다.

“내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해. 당장 베르나에게 넘겨줄 테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시선도 함께였다.

“아,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고?”

“…예. 저야 폐하께서 시키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니까요.”

필리프의 손바닥이 수그러드는 안나의 턱밑을 파고들었다. 흠칫 놀란 그녀가 바로 몸을 뒤로 물려, 그녀의 뺨에 닿지 못한 필리프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낙하했다. 잠시 안나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시선을 돌려 정원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창문에서 바로 시선을 뗀 그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안나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녀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홱 고개를 틀었다.

“저, 폐하…….”

분명 그녀가 아닌 창밖 상황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몇 초간 숨을 몰아쉰 필리프가 충동적으로 안나의 어깨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너무 몰라 외마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안나가 내쉬려던 숨을 그대로 삼키며 놀란 사슴처럼 껑충 뛰어올랐다.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졌지만, 안나의 몸은 필리프의 팔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필리프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며 대롱대롱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안나의 모습에, 필리프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아… 저… 그게…….”

팔에 힘을 푼 필리프가 파르르 떨리는 안나의 불안한 눈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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