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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0)화 (20/139)
  • 20화

    집무실을 나선 필리프가 빠른 걸음걸이로 침실로 향했다. 내내 업무가 끝없이 이어졌다.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쁜 일과의 마지막은 수행원의 내일 일정에 대한 보고였다. 눈을 감은 채로 수행원의 보고를 듣던 필리프가 의자에서 등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수행원이 등 뒤 시종 전부를 방 밖으로 내보낸 이후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 오늘 오후 재단사와의 만남을 잠시 미루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일정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내내 별실에 계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제가.”

    “다른 일정이 확인되는 대로 즉시 보고하도록.”

    수행원의 보고를 듣고 있던 필리프가 불쑥 그의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폐하.”

    피곤이 짙게 서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은 필리프가 집무실 안 모든 시종을 물리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며칠 전 수행원이 자신의 분부에 따라 안나 스완을 조사한 내용에 대한 보고를 올린 적이 있었다. 황궁 주방 시종이 되어 오 년간 일해 온 그녀의 삶에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황궁 주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언니를 잃고, 약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시피 크게 앓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폐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걷도록 할 테니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수행원을 대기시키겠습니다.”

    몸단장 시종이 든 얇은 재킷을 받아 직접 입은 필리프가 침실을 벗어났다. 이제 막 주방 시종들이 업무를 마무리할 시간, 조금 서둘러야 했다.

    “폐하. 중앙 정원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뒤따르는 시종의 말을 무시한 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필리프의 발이 향하는 곳은 황궁 주방을 가로지르는 통로였다.

    오늘 하루 내내 베르나가 제게 했던 말이 잊히질 않았다.

    ‘설마 제게 미천한 음식 시종 하나 내어 주시는 것에 인색하게 굴지는 않으시겠지요.’

    감히 나를 떠보았겠다?

    간밤 베르나 황녀의 방문 목적은 한 가지였다. 분명 어디에서 자신과 음식 시종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거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비틀어진 필리프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것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필리프였기에, 일단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주방장님!”

    시야 멀리 주방을 나서는 시종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행렬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종들이 저마다 대화를 나누며 통로 안쪽으로 향했고, 그 자리에 발을 멈춘 필리프가 먼발치에서 시종의 무리를 주시했다.

    그리고 시종 일행의 마지막, 지친 기색으로 주방을 나서는 안나 스완의 얼굴이 보였다. 옆 시종과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

    안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필리프가 건넨 손수건이었다. 마치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두 손바닥 위에 손수건을 내려놓은 그녀가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손수건에 묻는 것이 보였다.

    “저, 폐하.”

    “쉿. 조용히 해.”

    황제의 행렬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황궁 시종들의 시선이 느껴져 수행원이 황급히 황제의 곁에 다가섰지만, 황제의 손길이 급히 그를 저지했다.

    한참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가뿐하다는 표정으로 공중에 양팔을 쭉 뻗었다 내린 그녀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주방을 완전히 벗어났다.

    또다시 이 기분이다. 간질간질 배를 긁어내는 낯선 감각. 안나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필리프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지.”

    계획을 바꿔 침실로 돌아온 필리프가 술을 내올 것을 지시한 이후 안락의자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술과 안주를 챙겨 침실로 들어온 수행원의 손에는 미색의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뭐지?”

    “베르나 황녀님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폐하.”

    미간에 굵은 주름을 세운 필리프가 거칠게 편지 봉투를 낚아챘다.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는데, 그녀가 고국에 바치는 선물이라 칭한 광산 채굴권에 대한 사항이 적힌 서류였다.

    “그래, 지금 내게 확답을 받고 싶으시다?”

    뻔히 드러나는 베르나의 수작에 필리프나 낮은 비웃음을 뱉었다.

    필리프는 황제 즉위식이 있고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 명백한 살해 시도에 시달려왔다.

    이에 음식에 독극물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늘 필리프의 앞에서 먼저 음식을 맛보는 음식 시종을 따로 두었고,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음식을 먹지 못했었다.

    “처음이야.”

    처음이었다.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리던 필리프가 수행원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지금 당장 안나 스완을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아무리 탐탁지 않은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황궁 시종 하나를 내어 주지 않아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베르나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약점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틈을 보이면 그 즉시 그 틈을 파고들려 할 테니.

    그렇다면, 넘겨주는 것이 옳을까?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감정의 정체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를 제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필리프의 입가에서 깊은 한숨이 흘렀다. 그가 테이블에 놓인 궐련 상자를 집으려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안나 스완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그대로 궐련 상자를 내려놓은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를 뵙습니다.”

    낡은 치맛단 우측을 잡은 그녀가 무릎과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예의를 차리는 것에 서툴러 보이는 그녀였는데, 어느새 예법이 완벽히 몸에 익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붉은 볼과 입술을 그대로 바라보던 필리프가 안나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예? 아… 예, 폐하.”

    나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것 같긴 했지만, 모아 쥔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필리프의 입꼬리가 솟아오르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간질거림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황녀가 곧 결혼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아, 예, 폐하. 전해 들었습니다.”

    찻잔을 들어 찻물을 머금은 필리프가 집무실 가운데 소파가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쭈뼛쭈뼛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는 여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연회와 피로연 음식을 우리 쪽에서 준비하기로 했어.”

    “아, 예.”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황궁의 주방장도 아닌데. 안나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카라나의 솜씨야 믿을 만하고, 또 네 솜씨도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으니 요리를 기대해 봐도 괜찮겠지.”

    말을 하는 필리프의 눈썹이 느릿하게 들렸다. 눈썹 아래의 눈동자는 늘 그랬듯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얼굴에 잠시 정신이 팔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안나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아, 예. 무, 물론입니다, 폐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황으로 벌게진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본 필리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무표정일 때는 몰랐는데,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이 소년처럼 느껴졌다.

    아니, 저렇게도 밝게 웃을 수 있는 남자였구나. 와, 웃는 모습도 정말 근사하네. 그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잘생긴 게 최고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잖아.

    “어젯밤 네가 한 음식을 먹었어.”

    안나가 꿀꺽 침을 삼켰다. 여전히 서 있는 그녀를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한 필리프가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음식을 만든 이가 아닌, 갑작스레 나를 찾은 불청객과 함께 음식을 먹었던 것이 조금 아쉽더군.”

    그가 테이블에 놓인 술잔에 가득 과실주를 따랐다. 아니 근데 아무리 도수가 낮다고 하지만, 너무 술을 자주 마시는 거 아닌가? 이 시대에 병에 걸리면 제대로 된 치료법 찾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지금은 젊어서 괜찮다고 하지만, 간이 안 좋으면 나이 먹어서 고생할 텐데.

    “신기한 일이지. 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혀를 차며 술잔을 내려다보던 안나가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저 수, 술을 많이 드시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어서 그냥.”

    피식 웃은 필리프가 공중에 들었던 잔을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장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나의 태도에 웃음이 터지려 했지만, 부러 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녀가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군. 네 음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예?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베르나 황녀가 곧 제국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고? 간신히 이 세계에 조금 적응하게 되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머리를 크게 얹어 맞은 기분에 몸이 휘청일 지경이었다. 다급히 정신을 수습한 안나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저, 폐하. 몹시 외람되지만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음,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단호한 그의 답에 눈물이 찔끔 흐를 지경이었다. 그래. 사실 일개 황궁 시종인 제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 뿐인 것을.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말하다니.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인간이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떠올렸던 인간이 저토록 차가운 인간이었다니. 저 남자를 떠올리며 보냈던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맵시 있는 모양새로 술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필리프가 안나가 앉은 쪽으로 비스듬하게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대체 그게 뭐냐고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을 숨긴 채,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꾸며내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저…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안나의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안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입술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데, 굳게 닫힌 입술이 벌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는 숨을 참지 못할 것 같아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가 안나보다 조금 빠르게 입술을 벌렸다.

    “네가 내 여자가 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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