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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9)화 (19/139)
  • 19화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내내 가슴 한구석 어딘가에 꼭꼭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에 묻은 손수건을 가슴에 꼭 품은 안나가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등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시종 대부분이 침대에 누워 잠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나가 힘없이 침대에 누워 가슴에 묻고 있던 손수건을 다시 얼굴로 가져가려는데 누군가 톡톡 등을 두드렸다.

    “안나. 벌써 자는 거야? 씻고 자야지.”

    “응? 어, 아니, 아니야. 자는 거 아니야.”

    “어? 그건 또 뭐야?”

    어깨를 잡으며 물어오는 마샤의 목소리에 놀란 안나가 꼭 쥐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 어, 이거. 별거 아니야. 벌써 다 씻었어?”

    안나가 빠르게 낚아챈 손수건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응. 안나 너도 어서 씻고 와. 이제 곧 방에 불이 꺼질 거야. 내일은 한 시간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이잖아. 관료들 서른 명의 음식을 준비하려면 정신없을 거야.”

    “아, 맞다.”

    이놈의 황궁은 뭐 이리 행사가 많아? 도대체가 특별하지 않은 날을 쉽게 찾을 수가 없네. 황궁 주방이면 그냥 황제의 식사만 준비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오만 사람들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해야 하는 건지.

    쯧쯧, 혀를 찬 안나가 손수건을 드레스 가슴 안쪽에 감추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작은 호의로 내밀었을 손수건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바보 같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그래. 그냥 땀을 많이 흘리니까 불쌍해 보여서 준 걸 거야. 아니지, 그래도 상대는 제국의 황제인데, 자신의 손수건을 선뜻 내어 준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 그나저나 이 손수건을 돌려주어야 하나? 그냥 가지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썼던 걸 돌려주면 그걸 또 받으려나?

    모르겠다. 깨끗이 빨아서 가지고 있다가 돌려달라고 말하면 주든가 해야지. 안나가 찬물에 담그려던 손수건을 다시 코끝에 가져다 댔다. 희한하게 따뜻하다고 느끼게 하는 향이 콧속 가득 파고들어 왔다.

    정말 신기하네. 인공적인 향수 냄새는 아닌데 엄청나게 좋은 향이 나.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지?

    “그래. 아직 깨끗하니까 나중에 빨자. 에이, 그리고 설마 돌려달라고 하겠어? 황제가 그렇게 치졸한 건 말이 안 되지.”

    필리프가 준 손수건을 다시 드레스 안쪽에 넣은 안나가 몸을 씻으며 침대 매트리스 안에 감춰 둔 수첩을 떠올렸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무언가를 바꿔 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쉽게 발을 들일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다른 이의 몸을 빌려 살아가게 된 것도. 언제까지 마음 편하게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어.

    입술을 앙다물며 다짐을 새긴 안나가 빠르게 몸의 물기를 닦으며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벗은 드레스 안에 꽁꽁 감춰두었던 손수건을 다시 소중히 옷 안에 품었다. 어쩐지 가슴 한쪽에 뜨거운 무언가가 들어차 넘실대는 기분이 들었다.

    * * *

    숨을 죽이고 숙소 방 사람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안나가 고단함에 몇 번이나 그대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다잡으며, 손등에 힘을 주어 눈가를 꾹꾹 문질렀다.

    어두운 방 안에는 시종 각자가 내뱉는 고른 호흡 소리만이 가득했다. 수첩을 손에 쥔 안나가 꾸물꾸물 느리게 침대를 빠져나갔다. 숨을 그대로 멈추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뎌 벽난로 앞에 선 그녀가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벽난로 우측에는 허리 높이의 통로가 커튼으로 덮여 있었는데, 통로는 주방 뒤쪽으로 향하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시종들이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려 설치된 공간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커튼 뒤로 통과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통로의 바닥이었다. 딱딱한 돌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신발을 신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허리를 구부린 안나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흡!”

    맨발에 닿는 돌바닥의 차가운 냉기에 그대로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안나가 이를 악물어 비명을 삼키고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천천히 복도를 통과했다.

    “하아…….”

    통로 끝 계단에 서서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긴장이 풀리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그래. 일단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첩을 들여다보았지만, 며칠 동안 수첩은 잠잠했다. 주머니에 숨겨온 손가락만 한 크기의 양초에 불을 붙인 안나가 확인하듯 수첩에 글이 적혀있는지 살펴보았다.

    아, 역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네. 그럼 내가 먼저 써보자. 그런데 뭐라고 써야 할까. 그래,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자.

    마샤에게 부탁해 구해 놓은 깃털 펜을 손에 쥐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안나가 차분히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몸에 들어와 있는 거지? 그렇다면 원래 내 몸 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건가? 내가 어떻게 해야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조금 자세히 알려준다면.]

    막힘 없이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문장 첫 부분이 희미해지더니 곧 수첩에 적힌 모든 글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헉! 이게 뭐야!

    너무 놀라 차마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대로 들고 있던 수첩을 놓친 안나가 떨리는 손을 움직여 다시 글자를 적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글자가 적히지를 않았다. 수첩 위에 꾹꾹 펜을 누르던 안나가 허탈감에 작은 탄식을 뱉었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멍하니 수첩의 공백을 들여다보는데, 순간 흰 종이 위에 또렷한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니야.]

    뭐? 아직은 아니라고? 그럼 혹시 방금 내가 적은 글을 읽은 건가? 깃털 펜을 손에 쥔 안나가 적힌 글자 밑에 빠르게 글을 적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글자가 적혔다.

    [그럼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소리야? 그때가 언제인데?]

    상단에 있던 글자가 지워지고 새로운 글이 적히기 시작했다.

    [너는 내 계획에 따라야 해.]

    계획?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안나가 다시 펜을 움직이려는 순간, 종이에 적힌 모든 글자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바로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당장.]

    금세 공백이 된 종이 한 장이 소리 없이 수첩과 분리되었다. 수첩에 글을 적는 이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제가 가진 의문을 풀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 분리된 종이를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은 안나가 다시 발끝에 힘을 주며 지났던 통로를 통과했다.

    통로를 지나 커튼을 통과하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급히 몸을 감추려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구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귓가를 때리는 쨍한 목소리가 행동을 저지했다.

    당장 침대로 돌아가! 당장!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는 오직 안나의 귀에만 들리는 듯했다. 방 안 시종들은 여전히 미동 하나 없이 고른 숨소리를 뱉을 뿐이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건가?

    침대로 돌아온 안나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고 있던 수첩을 베개 밑으로 밀어놓았다. 답답한 기분을 해소하고 싶어 수첩을 이용해보려 했지만, 도리어 고구마 수백 개가 목구멍에 들어찬 기분이었다.

    분명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었지. 아직은 진실을 알 때가 아니라는 소리일까? 기다리면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니 근데, 내가 왜 이 수첩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하지? 나도 내 의지가 있는 사람인데.

    어차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작게나마 의지할 만한 무언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수첩에 적힌 내용대로 행동했고, 그 행동은 어쨌거나 늘 좋은 결과로 이어졌었다.

    당분간은 좀 멀리해야 하겠어.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안나가 베개 밑에서 꺼낸 수첩을 침대 매트리스 안에 꼭꼭 밀어 넣고 눈을 감는데, 문득 절절한 사랑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던 남자가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케이든 아들레드에 대해서도 물으려 했었는데. 분명히 처음 보는 남자인데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안나 스완과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겠지? 사귀는 사이였나? 아, 궁금한데. 다시 수첩에 글자를 적어볼까?

    수첩을 끼워둔 베개 밑으로 손을 뻗으려던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어. 지금 풀어야 할 숙제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 남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지.

    잠깐, 그 남자가 오늘 밤 우리가 늘 만나던 장소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안다고 해도 잘 모르는 외간 남자와 밤늦게 시간을 보내는 건 위험한 일이야, 아무렴. 일단은 자자. 내일도 쉼 없이 일해야 할 텐데.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은 안나가 버릇처럼 필리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자고 있으려나. 책에서 서양 황제들의 업무량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잠 잘 시간은 있겠지? 얼마나 피곤할까?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닐 텐데.

    꼬리를 물고 이어진 필리프에 대한 생각과 상상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가 혼자 있을 땐 무엇을 하려나. 업무를 소화할 때는 내게 처음 보여주었던 모습처럼 냉정한 표정을 짓겠지? 한참을 이어지던 생각의 끝은, 언제나 그랬듯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마무리되었다.

    아, 또 시작이네. 그만, 그만하자. 이러다 정말 날 꼬박 새우겠어.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억지로 참을 청하려 양을 세기 시작했다. 우연히라도 내일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슴 한편에 묻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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