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5)화 (15/139)

15화

“먼저 침실로 돌아가 있어. 목욕물을 준비하고.”

“예, 황녀님.”

복도를 지나기 전, 뒤따르던 시종을 모두 무른 베르나가 별궁 북쪽 끝 커다란 청동 장식물 뒤 쪽문을 열었다.

몸집이 작은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좁은 문 뒤의 공간은 원래 장서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다. 화재로 보관되어 있던 장서들이 모두 불에 탄 이후로는 황궁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황녀님!”

“쉿!”

먼저 도착해 베르나를 기다리고 있던 카밀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르나가 오랫동안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인지 확인했느냐.”

“정확히 사실인지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예. 저도 앓고 난 이후 그 여자가 좀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저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또… 설명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달라졌다? 차분히 카밀라의 말을 듣던 베르나가 복도를 지나며 마주쳤던 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나 스완은 수많은 시녀 사이에서도 단연코 그 외모가 눈에 띄는 아이였다. 처음 제 언니와 황궁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황궁 내 남자들의 시선을 모두 앗아갈 정도였으니.

안나 스완을 황궁 주방에서 일하라 명한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황궁의 법규상 남자들의 출입이 절대 금지된 주방에 틀어박혀, 그대로 빛을 잃은 채 시들어 가기를 기다렸다.

“그래, 뭐랄까. 조금 밝아진 것 같더군. 평소에는 절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고 느꼈었는데 말이야.”

자신을 바라보던 안나의 눈동자를 떠올린 베르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티 없이 흰 피부와 서늘한 눈빛, 창백한 카라 꽃 같던 그녀가 어째서 곧 개화를 앞둔 붉은 장미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계속 옆에서 감시하도록 해.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예, 황녀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최대한 몸을 사리도록 하고. 튀는 행동은 금물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황녀님.”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떠나기까지 고작 한 달여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시간은 없었다.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뒤탈을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이만 돌아가 봐.”

등을 돌린 베르나가 쪽문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데, 카밀라가 다급하게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 황녀님. 혹시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잽싸게 몸을 일으킨 카밀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도 듣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목소리를 낮추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지. 베르나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꾸며냈다.

“요즘 황제 폐하께서 안나 스완의 요리에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식사 중에 그 여자를 전실에 부르신 적도 있고, 또 며칠 전에는 그 여자를 직접 침실에 부르셨다고 합니다.”

“…침실에?”

“예. 술과 어울리는 요리를 준비하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까다로운 남자가 요리에 관심을 보이고, 일개 요리 시종을 침실로까지 불러들였다? 성급하게 나서 일을 그르치기 전에 먼저 확인해 봐야겠어. 들고 있던 횃불 손잡이를 느리게 덧그린 베르나의 입꼬리가 삐죽 솟아올랐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예, 황녀님. 말씀하세요.”

카밀라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베르나가 카밀라의 대답을 듣지 않고 빠르게 등을 돌려 어두컴컴한 공간을 빠져나왔다.

“황녀님.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복도 끝에서 대기하고 잇던 시종이 베르나의 등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대로 침실로 향하려던 베르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일 재단사가 언제쯤 찾아오기로 했었지?”

“말씀하신 대로 아침 식사 이후에 들르라 전했습니다.”

“일정을 미루도록 해. 내가 다시 지시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황녀님.”

예복의 재단은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재단사 따위를 만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나가 상쾌한 표정으로 침실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 * *

“아앗!”

칼질하던 안나가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손가락을 손바닥 안에 잡아 가두었다. 뭐냐, 서안나. 주방에서 처음 일하던 햇병아리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칼질 실수라니.

“뭐야, 너 괜찮아?”

“어, 괜찮아.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왜 그래. 칼질할 때는 조심해야지. 줘 봐. 약 발라야 하는 거 아냐?”

“아냐. 깊게 베이진 않았으니까 흐르는 물에 씻고 대일밴드… 아니, 천으로 그냥 좀 감아 주면 돼.”

엄청난 시간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생각보다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불편함은 의외로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더욱 크게 다가왔다. 방수 밴드의 소중함을 이토록 크게 느끼게 될 줄이야.

“자, 손가락 이리 줘.”

발 빠른 마샤가 어느새 깨끗한 천을 들고 와 안나의 손가락에 덧댔다.

“그런데 어쩐 일로 손을 다 베였어. 우리 주방에서 칼질을 제일 잘하는 네가.”

“아냐, 내가 뭘.”

“아니긴. 사실 나도 네가 이렇게 칼질을 잘하는지 몰랐잖아. 매번 칼질하기 싫다고 하더니.”

“어? 어… 그냥 베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니까 빨라지더라고.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천이 감긴 손가락으로 시선을 내린 안나가 빠르게 뱉어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샤에게만큼은 거짓을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일 마샤가 진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제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나으려나? 아냐, 분명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마샤였더라도 그랬을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떠볼까?

“마샤, 그런데 있잖아.”

“응. 왜?”

“너 만약에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어디로 가보고 싶어?”

“시간 여행?”

잠시 고민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마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살고 싶지는 않아.”

“그럼 혹시 네가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될 수 있다면, 누구로 살아보고 싶어?”

“빙의? 음, 글쎄.”

이번에는 고민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던 마샤가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그럼 원래 그 사람은 지금 내 몸으로 빙의되는 거야? 서로 영혼이 바뀐다는 말이야?”

“…….”

“안나?”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럼 혹시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지금 자신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안나, 왜 그래. 먼저 물어 놓고는.”

“…어? 어, 아니야. 그냥, 나도 생각해 보느라고.”

“아무튼, 난 지금이 편하고 좋아.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거나 다듬자. 시간 별로 안 남았잖아.”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채소 더미로 손을 뻗었다.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더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원래 자신의 삶, 서안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설마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이 몸의 주인이 제 몸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그래, 수첩!

곤란한 일이 닥쳤을 때 요행을 바라며 들여다보았던 수첩을 직접 사용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장 칼을 내려놓고 방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 몇 시간만 더 버티자.

크게 심호흡한 안나가 빠르게 채소를 손질하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맥주와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기 위해 저녁 요리에서는 제외되었으니,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수첩과 관련된 의문을 해소해 봐야지.

“마샤. 정원에서 로즈메리를 좀 따 오너라.”

“예, 주방장님.”

소쿠리 속 마지막 채소 손질을 마친 안나가 급히 칼을 내려놓으며 뒤돌아섰다.

“앗, 제가 다녀오면 안 될까요?”

“안나 네가?”

“예, 저녁에 준비할 안주에 적당할 재료도 좀 찾아봐야 해서요.”

“그래, 그럼 다녀오도록 해라.”

아싸! 그래, 모든 일은 생각난 김에 처리하는 것이 옳다. 약초 정원과 숙소 사이에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대충 핑계를 대면 될 일이야.

앞치마를 끄른 안나가 빠르게 주방을 나서 황궁 서쪽 복도를 가로질렀다. 숙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 어? 발이 또 왜 이래!

멋대로 멈춘 발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었다. 가고 싶은 목적지와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는 발을 멈추려 다리에 잔뜩 힘을 실어보았지만, 그럴수록 몸의 중심을 잃은 상체가 흐느적거려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자아낼 뿐이었다.

미치겠네, 정말.

왜 꼭 이런 상황에서만 저 남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일까. 간신히 버둥거림을 멈추었을 때 스무 발자국 정도 앞의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저벅저벅.

즉시 고개를 숙였지만, 귀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수치심은 점점 크기를 키웠다.

“고개를 들어.”

고개를 완전히 들어 올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살포시 위로 추어올렸다.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 중이었지?”

그의 목소리에서도 웃음기가 담뿍 묻어났다. 종이 인형처럼 팔랑이는 모습을 전부 본 것이 틀림없었다. 안나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급히 약초 정원에 다녀오라고 하셔서…….”

“그 길은 약초 정원으로 가는 길이 아닐 텐데.”

번쩍 고개를 들어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가 향하던 곳을 바라보았다. 평소 황녀의 시중을 드는 시종을 제외한 다른 시종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별궁으로 향하는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변명의 말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저 그것이요. 아, 제가 잠시 기, 길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도착하여서…….”

횡설수설. 제 귀에도 엉망진창으로 들리는 말을 그가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등허리가 축축해지고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더 들어주기 힘들었는지, 그가 손바닥을 공중에 올려 안나의 말을 끊어냈다.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얼굴에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이 정도로는 꼬투리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안나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던 그가 나지막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무도회에는 네가 참석해야 하겠어. 춤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비웃는 게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격이 그리 좋은 남자는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