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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4)화 (14/139)
  • 14화

    카밀라는 안나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안나와 마샤의 앞을 가로막은 카밀라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안나를 훑어내리며 물었다.

    “그 말이 진짜야?”

    안나와 마샤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물어 오는 말에 대꾸해 주고 싶지 않아 발길을 재촉하려는데, 카밀라는 끈질기게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귓구멍이 막힌 거야? 조금 전에 물었잖아. 그 말이 진짜냐고.”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그 말이 뭔데?”

    카밀라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설명해 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딱한 안나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밀라의 얼굴에 당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좋아.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설명해 줄게.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사실이야?”

    숨을 길게 내쉰 카밀라가 한 자 한 자 끊어 물었다, 이야기를 엿들었으면서도 굳이 제 말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 기억을 조금 잃은 건 사실이야.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좀 비켜줄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카밀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그녀를 뒤로하고 등을 돌리는데, 등 뒤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꽂혔다.

    “네 언니의 이야기가 궁금하면 나한테 묻는 편이 나을 거야. 내가 마샤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당장 등을 돌려 카밀라에게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으라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마샤가 강하게 안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냥 무시해. 늘 그랬잖아.”

    “응, 마샤.”

    주방에 들어서고 정신없이 바쁜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침을 준비하고 마른 호밀 빵과 귀리 죽으로 간단히 식사를 때웠다. 잠시의 휴식 시간이 주어져 마샤에게 이야기를 들으려 했지만, 카라나 주방장과 놀만 부주방장이 차례로 찾아와 안나의 몸 상태를 물어왔다.

    “몸이 좋지 않으면 점심에는 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도 괜찮다.”

    “아닙니다. 충분히 회복되었으니 함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난번과 같이 채소 볶음을 준비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황제의 식탁에 올랐던 음식 접시들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오면 음식 시종들이 개미 떼처럼 접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황제가 어떤 음식에 관심을 보였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안나도 관심 없는 척 슬금슬금 접시를 살펴보곤 했는데, 제가 요리한 음식 접시가 많이 비어 있는 것을 보면 감출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저번에 요리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채소 볶음을 완성하고, 마샤를 도와 버섯 손질을 도왔다. 고기를 굽는 일을 자청하고 싶었지만, 황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고기 굽는 일은 카밀라에게 돌아갔다.

    “자, 점심 먹고 저녁 식사 준비 전까지 돌아오도록 해. 모두 수고했어.”

    “예, 주방장님.”

    놀만 부인이 시종 각자의 접시에 노루고기 조금과 빵 반 덩이, 콩 열 알 정도를 담아 주었다. 도대체가 간에 기별이 갈 것 같지 않은 양이었지만, 안나 이외에 음식의 양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걸 먹고 주방일을 하라는 건 좀 심한데. 그래도 전에 일하던 주방에서는 밥 하나는 제대로 챙겨줬었는데.”

    안나가 기름기 없이 바짝 구운 노루고기 한점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불평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고기가 너무 질겨 마치 고무를 씹는 기분이었다.

    “안나. 자, 이거.”

    돼지고기를 가득 넣은 김치찌개에 갓 지은 쌀밥을 넣고 비벼 치트키인 김 한 장을 올려 한입 가득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데, 마샤가 안나의 옆에 앉으며 잔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응. 과실주. 너 저번에 잘 마시길래.”

    “아, 고마워.”

    그래. 이 포도 주스라도 있으면 좀 낫지.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은 안나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나. 네 언니 얘기 말이야.”

    “어, 마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면 이야기해 줄게.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어, 벌써 다 마셨네? 더 가져다줄까?”

    “아니야. 괜찮아.”

    만약 마샤가 없었다면 이 생활에 이토록 쉽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문득 마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안나가 덥석 마샤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마샤.”

    “어? 갑자기 왜.”

    “그냥.”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마샤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잡힌 손을 빼냈다.

    “자, 잔을 이리 줘. 한잔 더 마시고 싶은 거 다 알거든?”

    안나의 손에 있던 잔을 빼앗은 마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안나가 접시에 남은 음식을 말끔히 비워냈다.

    가만. 점심은 맛있게 먹었을까? 고기라면 내가 더 잘 구울 수 있는데. 저번에 공들여 구웠던 양고기를 그 사람도 참 맛있게 먹었었지.

    문득 혼자 남는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필리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한번 물꼬가 트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정갈한 동작으로 커트러리를 다루는 커다란 손을 상상하기가 무섭게 얼굴 가득 뜨겁게 열이 올랐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십 대 정도로 보이긴 하지만, 당최 서양 사람 나이는 짐작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연애는 많이 해 봤으려나?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아무래도 꽁냥거리는 연애는 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처음 봤을 땐 찬바람이 쌩쌩 부는 냉혹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탈한 구석이 있는 것이 신기하단 말이지. 산해진미를 전부 먹어 보았을 텐데, 또 별것 아닌 소박한 음식을 잘 먹는 것도 그렇고.

    “자, 안나.”

    빠르게 자리로 돌아온 마샤가 꽉 채운 술잔을 건네주었다. 술을 홀짝거리며 필리프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던 안나가 부러 마샤를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저, 마샤. 황제 폐하 있잖아.”

    “응. 폐하가 왜?”

    “혼인은 안 하신대? 황녀님이 먼저 결혼을 하신다고 하니까 갑자기 궁금해서.”

    부지런히 접시를 비워 나가던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마 폐하께서 일부로 혼사를 미루시는 것 같아. 아마 부모님 때문이 아닐까? 부부의 연이라는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테니까.”

    부모님이 왜? 안나가 급하게 질문을 이어나가려는데, 벌컥 열린 문틈으로 놀만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었구나. 자, 너희 둘은 지금 황궁 밖에 나갈 차비를 시작하도록.”

    “…황궁 밖이요?”

    당황한 안나와 마샤의 어깨를 밀어 주방을 나서게 한 놀만이 빠르게 뱉어 냈다.

    “새로운 재료가 필요해서 당장 시장에 다녀와야 하겠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내려오도록 해.”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 살게 되고 처음으로 궁 밖을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신이 났다. 옷을 갈아입던 안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황제의 직계가족과 황궁 내에 머무르는 귀족들은 황궁 동쪽 출입구를, 그 이외의 황궁 거주자는 황궁의 남쪽 출입구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남쪽 출입구에 도착하려면 수백 개가 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지만, 처음으로 황궁 밖을 나선다는 설렘 때문인지 조금도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자, 타거라. 여기, 외출증입니다.”

    황궁 정문을 지키던 호위병에게 작은 종이를 내민 놀만이 마차 커튼을 젖히고 안나와 마샤를 먼저 마차에 태웠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근사한 마차는 아니었지만, 실제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는 통에 마차가 끊임없이 덜컹거렸지만, 그마저도 즐거워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우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풍경을 감상하던 안나의 입가에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흘렀다. 하늘이 너무 맑아 눈이 시렸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어 손으로 빛 가림막을 만드니, 햇살을 가린 손이 희게 빛났다.

    “날씨가 엄청 좋아, 마샤.”

    “응, 너무 좋아. 이제 곧 여름이 오겠어.”

    아무래도 환경 오염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시대라 이렇게 하늘이 맑은 건가?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이었더라. 요즘은 미세먼지 때문에 보통 뿌옇게 흐린 하늘만 바라봤던 것 같은데.

    “이쪽에서 내려 주십시오.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정신없이 풍경 구경을 하는 사이 마차가 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마차꾼과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놀만이 종종걸음으로 시장 입구를 지나쳤다.

    “어이, 왔는가. 어서 한잔 하게.”

    “아니, 벌써 얼마나 마신 거야?”

    아직 저녁 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시장 입구 선술집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시선을 빼앗겨 정신을 놓고 그들을 구경하던 안나가 놀만 부인에게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원한 맥주 한 잔만 마시면 진짜 소원이 없겠는데. 시장에 오니까 기름기를 쫙 뺀 통닭도 먹고 싶네. 김이 펄펄 올라오는 닭 다리를 한입 가득 넣고 씹으며,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켤 수만 있다면. 아…….

    선술집을 지나 의상실과 모피상이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치니 각종 향신료와 곡물, 채소, 도축 고기를 파는 상점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익숙하게 골목 모퉁이를 돈 놀만이 커다란 참나무통이 쌓여 있는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아,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급히 가져가야 할 것이 있어서… 와인은 도착했습니까.”

    “아, 예. 오늘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사내가 점포 뒤 겹겹이 쳐 있는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그의 손에는 농구공만 한 크기의 들통이 들려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내일 직접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요.”

    “폐하께서 오늘 저녁 이곳 와인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들통을 받아든 놀만이 와인 값을 치르고 빠르게 점포를 벗어났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점포 안 와인 통을 구경하던 안나와 마샤가 쫄래쫄래 놀만의 뒤를 쫓았다.

    바삐 몸을 움직이는 놀만을 따라 치즈와 향신료를 파는 상점에 들르고,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안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앞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뚱뚱한 체격의 중년의 남자가 놀만의 얼굴을 확인하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예. 저번과 같은 것으로 준비해주십시오.”

    “예, 잠시 기다리십시오.”

    좀 전 와인을 담았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들통을 들고나온 남자가 맥주 맛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요즘은 귀족분들도 수도원 맥주보다 우리 가게 맥주를 더 즐겨 찾고 있습니다. 이거 원, 매일 양이 남아나지 않는다니까요? 어제도.”

    “여기, 삯입니다.”

    놀만이 남자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내며 시끄러운 선술집을 벗어났다. 안나가 놀만의 손에서 들통을 받아들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와인과 맥주를 사러 나오신 거예요?”

    들고 온 쪽지를 확인한 놀먼이 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오늘 저녁에 맥주와 와인 각각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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