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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화 (13/139)
  • 13화

    “하아… 숨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그만 가자, 마샤.”

    베르나와 안나의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샤가 안나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나란히 걸어 주방으로 향하는데, 마샤가 안나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안나. 너 기억 잘 안 나는 거 맞지?”

    걸음을 멈춘 안나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간 대충 둘러대며 상황을 모면해 왔지만, 언제까지 얼버무림이 통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일단은 마샤가 의심하지 않는 선에서 진실을 이야기하자. 설마 다른 사람의 영혼이 이 몸으로 빙의했다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응. 사실 기억이 나는 것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언니에 대한 부분은 조금도 기억 나지가 않아.”

    마샤가 이해한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충격을 크게 받았을 테니 기억을 잃은 것도 무리는 아니야.”

    “언니에 관해 이야기해 주겠어? 이야기를 들으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때로는 묻어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어쩌면 네가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봉인해 버린 것일 수도 있잖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빙의한 현재 자신의 삶을 알아내지 않으려 했었다. 언젠가는 떠날 몸이니, 그때까지 목숨만 유지하며 그저 버텨 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알고 싶어, 마샤.”

    간혹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기억의 파편이 의미 있는 것이라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몸의 주인이 자신에게 절절히 도움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원래의 세계로의 귀환을 위해서라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의 이야기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 줘.”

    고요히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샤가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 * *

    여러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전실 문을 통과한 베르나가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는 필리프의 얼굴을 마주했다. 살짝 무릎을 굽혔지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필리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자리에 앉아.”

    감흥 없는 눈빛으로 베르나 황녀의 인사를 받은 필리프가 맞은편 의자를 턱짓해 가리켰다.

    “여전하시군요, 폐하.”

    케이프 자락을 정리하는 시종을 손짓으로 무른 베르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하다?”

    “이제 곧 황궁을 떠날 동생에게 조금 더 다정히 대해 주실 수도 있으실 텐데요.”

    상냥하지만 가시가 돋친 말투였다. 필리프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답했다.

    “가식적인 태도로 대해 주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딱딱한 필리프의 태도에 굴할 베르나가 아니었다. 살짝 눈썹을 찡긋해 보인 그녀가 테이블에 놓인 사과주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보내 주신 결혼식 일정을 받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성대하게 치러질 것 같더군요. 뭐, 상대 쪽에서도 화려한 식을 원했으니 적당할 것 같습니다. 다만,”

    베르나는 파이만 제국의 타론 대공과 혼인을 앞두고 있었는데, 타론은 파이만 제국 최대의 부호 공작 가문의 장남이자 차기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름값만 따지자면 베르나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상대였다.

    “대공께서 피로연 일정을 앞당기길 원하시더군요.”

    “일정을 조정하는 것은 무리야. 알겠지만, 너무 급하게 결정된 혼사가 아닌가.”

    “제가 타론 대공과 혼인하는 것이 우리 제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납작 엎드려서 그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라는 이야기인가?”

    목소리를 높인 필리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서 은은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베르나가 시종에게 사과주를 더 내올 것을 지시했다.

    “설마 제가 폐하께 납작 엎드리라 청하겠습니까. 단지 제국과 제국의 만남이니만큼, 너무 우리의 것만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베르나가 시종이 채워준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런 베르나를 바라보던 필리프의 입가에서 웃음이 샜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일정이야 쉽게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어. 그대가 드레스를 고르느라 수선을 떨지만 않았어도.”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인데, 수선을 떤 것이 아니라 신중했다는 표현이 옳겠지요.”

    “평생에 한 번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여유로움을 유지하던 베르나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공중에 팔을 들어 올려 시종을 부른 필리프가 식사를 내올 것을 명했다.

    “일정은 다시 한번 조정해 보도록 할 테니 식사하지. 그대가 체중 조절을 하고 있다고 하여 기름기가 많지 않은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폐하.”

    필리프와 베르나의 자리 앞으로 먼저 냅킨과 식전 빵, 나이프와 포크류, 와인 잔이 반듯하게 놓였고, 곧 채소와 버섯구이, 기름기를 뺀 고기류가 차례로 서빙되었다.

    여우 같은 인간.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한 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필리프의 모습을 확인한 베르나의 가슴 속에 불길이 일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 고고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 후사도 없는 황제의 자리, 그대로 평온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제 폐하도 슬슬 혼처를 알아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 혼사가 먼저 결정되어 가슴 속에 늘 죄송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쪽에서 자리를 좀 알아보겠습니다.”

    베르나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막힘 없이 내뱉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필리프가 입안 음식을 천천히 씹어 넘기고 답했다.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을 텐데,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지.”

    “가족의 일 아닙니까. 게다가 어서 결혼하여 후사를 보시는 편이…….”

    “글쎄. 결혼과 후사의 여부와 상관없이 늘 위협받는 것이 내 자리이니까.”

    필리프가 베르나의 말을 끊으며 술잔을 들었다. 분명 어젯밤에 마셨던 술과 같은 술인데, 지독하게 쓴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식탁에 오른 음식을 찬찬히 살피던 필리프의 시선이 익숙한 채소볶음 접시에 고정되었다. 채소 볶음을 개인 접시에 옮겨 담고 급하게 포크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음식을 씹어 넘기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더는 사교계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까.”

    “그럼 그날 대공과 인사를 나누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몇 마디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고 전실 내에 온전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제 쪽으로 채소 볶음 접시를 옮기라 지시한 필리프가 술과 함께 음식을 맛보았다.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맛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화려한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입맛을 돋우는 음식. 채소 볶음을 씹고 음미할수록 머릿속에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 피어올라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희한하군요. 평소에는 잘 쳐다보지도 않으시던 채소 요리만 드시는 것이 말입니다.”

    지나가는 듯한 베르나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제 앞에 놓인 채소 볶음 접시가 거의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리프가 작게 자조적인 탄식을 뱉었다.

    누군가가 기대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은 필리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업무를 처리하고 그 대가로 세상의 주인으로서 모든 특권을 누렸다.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불만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 채 진행될 삶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평생 이어질 삶의 색채는 회색빛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색채의 화려함 따위 느끼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대로 기절해 버린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어두운색으로 가득하던 시야에 화려한 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필리프가 베르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피로연 음식은 우리 쪽에서 준비하겠다고 해.”

    “예?”

    “그대의 말대로 그대는 곧 황궁을 떠날 사람이 아니던가. 제국의 황녀에게 표하는 마지막 예의라고 해 두지.”

    필리프가 잡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식사의 마무리를 알렸다. 베르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필리프가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다음 일정이 좀 촉박한데, 급히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쯤 마무리하지.”

    베르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똑바로 지켜보며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녀를 별실로 안내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베르나를 남겨두고 빠르게 전실을 나선 필리프가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알아보았는가.”

    “예, 폐하. 안나 스완이 오늘 문제없이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음.”

    그저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금씩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터질 듯 발갛게 부풀어 오르던 볼과 귓바퀴, 거칠어지던 호흡과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던 눈망울이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낙하하기 직전 간신히 그녀의 허리 아래로 팔을 뻗었다.

    “다행이군.”

    “예?”

    “아, 아니야.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지?”

    “예, 폐하. 재정 회의가 준비되어 있고, 회의가 끝난 이후에는 제후들과의 회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카플란 영주가 황궁을 방문하기로 되어있는데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는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수행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필리프가 수행원의 말을 잘랐다.

    “아니. 식사는 됐어. 간단한 다과 자리 정도로 준비해.”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일주일에 한 번 황궁을 찾는 지방 영주들과의 식사 자리를 보통 거르지 않았던 황제였기에, 수행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녁 식사는 모든 일정이 끝난 이후 침실에 준비하고.”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말을 멈춘 필리프가 잠시 생각을 다듬듯 허공을 응시했다.

    “식사는 됐어. 술과 함께 먹을 안주를 준비하라고 일러 둬.”

    “예, 폐하.”

    “음식은 어제 안주를 만들어 준 여자에게 맡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폐하.”

    다시 무거운 잿빛으로 흐려진 시야. 그저 시야에 다양한 빛이 들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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