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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화 (10/139)
  • 10화

    “저… 그냥 주방장님께서 만드셨다고 하면 안 되겠죠?”

    “지금 황제 폐하께 거짓을 고하라는 말이냐.”

    “아, 아닙니다. 서, 설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잘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카라나의 앞에 선 안나가 푹 고개를 숙였다.

    “입맛이 아주 까다로운 분이시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음식에 만족하지 않으셨다면 그 음식을 만든 이를 내쫓으시지 다시 부를 분이 아니시니.”

    “아, 예.”

    다정한 카라나의 음성을 들으니, 잔뜩 쪼그라들었던 가슴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대신들과 식사하던 황제는 안나의 채소 볶음을 가리키며 요리를 만든 이에게 술과 함께 곁들일 음식을 준비해 올 것을 지시했다.

    “그럼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죠?”

    “저녁 식사 이후라고 말씀하셨으니 너는 저녁 준비에서는 빠지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저녁 식사 이후라면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안주를 준비하라는 이야기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주종이었다.

    “저, 혹시 폐하께서 어떤 술을 드실지는 말씀해주셨나요?”

    “보통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는 조금 독한 술을 드시는 편이시니 증류주를 드실 것 같구나.”

    “아, 예.”

    “그나저나 안나, 빠르게 요리 실력이 늘었구나.”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곁눈질로 보고 배운 것뿐인데요. 그동안 주방장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아, 역시 상사 비위 맞추기 스킬은 아직 죽지 않았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안나의 등을 톡톡 두드린 카라나가 다시 주방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카라나는 주방 시종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상에 오를 요리에 시종들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곤 했다. 안나가 일했던 식당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정말 다행이야. 카라나 주방장님은 너무 인자한 분이시고, 놀만 부 주방장님은 조금 무섭지만, 또 나름 다정하시잖아? 마샤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친구지. 그럼 이 주방에서 악한 캐릭터는 카밀라 한 명뿐인가?

    카밀라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진저리가 쳐졌다. 안나가 고개를 크게 흔들어 카밀라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집중하자. 곧 황제의 술상을 차려내야 하잖아.

    아마 증류주를 마실 것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증류주가 어떤 술인지를 모르니 선뜻 메뉴를 정할 수가 없었다. 독한 술이라고 했으니 위스키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그런데 위스키 안주는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지?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은 보통 간단한 과일 안주를 주문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과일 몇 종류를 썰어 내놓을 수는 없고.

    와인 안주를 만들라고 했다면 좋았을 것을, 평소 별로 접해본 적도 없는 위스키 안주를 만들라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안나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 마샤. 나 잠시만 방에 다녀올게.”

    “응. 그래.”

    빠르게 주방을 벗어난 안나가 주변을 살피며 뛰듯이 복도를 통과했다. 시녀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혼이 나더라도 당장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안나가 소지품을 정리하며 베개 밑 깊숙이 숨겨 두었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제발 무언가가 적혀 있길. 제발, 제발. 요행을 바라는 제 모습이 볼썽사나웠지만, 당장 의지할 것이라곤 이 작은 수첩이 전부였다.

    [그분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이 술과 함께라면 그 궁합을 인정하시겠지. 그 전에 기름기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말자.]

    안나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적힌 글귀를 읽어내렸다. 짧은 글이었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순간 위스키라면 사족을 못 쓰던 민 사장이 양주 안주에는 초콜릿이 최고라며 떠들어댔던 것이 얼핏 기억이 났다. 그래. 상큼한 느낌이 들도록 다양한 과일을 준비하고, 그 위에 녹인 초콜릿을 입히자. 견과류를 잘게 썰어 곁들인다면 그 모양도 나쁘지 않겠지.

    다음은 기름기 있는 음식. 상식적으로 위스키 안주로 기름기 있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수첩에 적힌 글을 믿어보기로 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이라니, 그 범위가 너무 넓은데. 안나가 복도를 통과하며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안나. 너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대.”

    “응. 혹시라도 준비가 일찍 끝나면 도우러 갈게.”

    안나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황궁 내 메인 주방 뒤쪽 문을 열었다. 백 평 정도 크기의 널찍한 이 공간은 황제의 식탁에 오를 음식의 재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으아, 엄청나네.”

    보통 그날그날 음식의 재료를 선택하는 것은 주방장의 몫이었기에, 제대로 보관고를 살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꼼꼼히 재료를 살피던 안나가 아침에 제가 캐 놓은 약초가 들어 있는 소쿠리를 발견했다.

    어, 밀가루잖아.

    소쿠리 바로 옆에 놓인 커다란 밀가루 포대를 보는 순간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그래. 이거면 되겠어!”

    * * *

    안락의자에 앉아 회의 서류를 훑어보던 필리프가 벽난로 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십 분. 오늘따라 어쩐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내일 일정은.”

    “오전에 재무 회의가 있고, 오후에는 지방 영주들의 황궁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사품은 제대로 준비되었겠지.”

    “예, 폐하.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래. 이제 나가 봐.”

    필리프의 눈치를 살피던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음식을 들일 준비가 되었으니, 제가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

    필리프가 손을 들어 수행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내가 여자 한 명도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 보이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저.”

    필리프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민 표정으로 물끄러미 수행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황제와 시선을 마주한 수행원이 바로 발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괜한 말을 꺼내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나는 제 주제를 모르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죄, 죄송합니다, 폐하.”

    “내가 계속 자네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이유가, 자네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필리프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수행원이 침실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말씀하신 술과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들라 해.”

    느릿하게 열린 문틈으로 먼저 쓱 고개를 들이민 안나가 필리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아, 폐하. 으,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은쟁반을 쥔 여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짜증이 여실히 드러났던 미간에서 힘을 푼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흩어진 서류를 갈무리했다.

    “저, 어디에 놓을지 말씀해 주시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어째서 이리도 즐거운 것일까. 필리프는 식사 테이블에 오른 채소 볶음이 여자의 솜씨임을 확신했다. 채소 볶음을 만든 이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침실로 가져오게 하라 명한 것은 제 확신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여기에 올려놔.”

    “예, 폐하.”

    빠르게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동그란 뚜껑이 덮인 접시 두 개와 자그마한 접시 한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테이블 앞 의자에 앉은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단단히 굳은 얼굴을 한 여자가 접시의 요리 덮개를 열자, 잘게 썬 채소가 군데군데 보이는 납작한 밀가루 빵이 보였다. 반죽이 너무 납작해 이것을 빵으로 일컬어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산해진미를 준비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초라해 보이는 음식을 받으니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벌컥 화가 치밀었다. 접시에 담긴 음식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필리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지?”

    “아, 예. 오늘 폐하께서 증류주를 드실 것 같아 준비한 요리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이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여자가 작은 접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 소스와 함께 드시면 되는데, 간을 보시고 양을 조절하십시오. 그리고 혹시나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시면, 이것을 드셔보십시오.”

    여자가 마지막 접시의 덮개를 열었다. 초콜릿으로 코팅된 과일을 보는 필리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오랜만인데.”

    “예?”

    “손도 대기 싫은 음식을 한꺼번에 받아보는 것 말이야.”

    안나에게서 눈을 돌린 필리프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술잔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무심한 표정의 필리프를 내려다보던 안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괜한 기대를 했군. 이제 됐으니 그만 나가 봐.”

    침실에 막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슨하게 풀려있던 그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맨 처음 마주했을 때 보았던 표정이었다.

    “뭐 해. 나가 보라니까.”

    술잔을 든 필리프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안나를 흘끔 올려다보며 말했다.

    “드셔보십시오.”

    “뭐?”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와 눈을 맞춘 안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술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셔서 준비한 것입니다. 고기 요리를 준비하라면 그리했을 것이고, 해산물 요리를 준비하라면 그것으로 준비했을 것입니다.”

    안나의 말을 듣던 필리프가 입가를 설핏 들어 올렸다. 부들부들 몸을 떨어대면서도 꾸역꾸역 제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는 꼴이라니. 겁대가리를 온전히 상실해 버렸거나, 제 음식에 그만큼 자부심이 있다는 뜻일 테지.

    “자리에 앉아.”

    “…예?”

    테이블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던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필리프가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먹어도 안전한 음식인지 확인해 봐야지.”

    기미를 보라는 뜻인가? 하긴. 이 시대에는 왕을 독살하려는 세력이 어디에나 있었다고 하니,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금세 수긍한 안나가 황제가 지정해준 자리에 앉았다.

    “이런. 포크가 하나뿐인데.”

    포크를 잡은 필리프가 허둥지둥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안나를 저지했다.

    “자. 먼저 쓰도록 해.”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지금 빨리 가져오겠습니다.”

    감히 황제의 식기를 사용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필리프가 손사래를 치는 안나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절로 억 소리가 나는 악력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어차피 아무리 비틀어 봐도 이겨낼 수 없는 악력이었다. 빠르게 저항을 멈춘 안나가 그가 내민 포크를 받아들었다. 단단한 그의 손끝이 안나의 손등을 스쳤다. 손끝 하나 스친 것이 뭐라고, 다시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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