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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화 (9/139)
  • 9화

    “폐하. 국무 회의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바로 회의실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뒤를 따르는 수행원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필리프가 걸음을 멈추어 서서 황궁 복도를 응시했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신기한 여자야.”

    “예? 폐하?”

    “아니야. 잠시 집무실에 들르겠네.”

    “알겠습니다, 폐하.”

    저도 모르게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끌어내린 필리프의 얼굴에 평소 같은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회의 자료는 준비되었나?”

    “예, 폐하. 집무실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제 앞에 서면 늘 주눅이 든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희한하게도 겁을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은근슬쩍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오던 커다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 입꼬리가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아침 식사는 건너뛸 테니, 이른 점심을 준비하라고 해.”

    “예, 폐하.”

    침실을 나서 집무실로 이동하던 중, 우연히 약초 정원으로 향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잔뜩 신이 난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가는 듯한 모습에, 의식하지 못하고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약초를 구경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자신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밝은 얼굴로 하염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아, 잠시 멈춰 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려는 낭창한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바짝 맞닿은 가슴으로 여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다란 속눈썹이 크게 한 번 깜빡거리고 곧 화들짝 놀라며 품 안을 벗어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만들기가 까다롭다고 하여 점심은 혼자 먹을 생각이었는데, 황궁 대신들을 모두 불러 함께 식사해도 괜찮겠군.’

    커다란 눈망울이 사정없이 떨리는 것이 보이는데도, 여자는 애써 의연한 척 당황스러움을 감춰 냈다. 여자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한시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대신들과의 식사 자리를 억지로 만들어낸 것은.

    투명하고 맑은 볼이 붉어지고 귓바퀴마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의 반응을 보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일개 황궁 시종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차를 준비해.”

    “예, 폐하.”

    집무실에 도착한 필리프가 의자에 앉아 궐련 개비를 꺼내 들었다. 궐련 연기를 길게 내뿜은 그가 집무실 안 수행원을 모두 물리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등을 기댔다.

    피운 궐련 개비의 수가 늘어나고 집무실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 들어찬 후에도, 필리프는 단호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금세 스쳐 지나갈 감정이라 생각했다. 괜히 감정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고작 하찮은 황궁 시종 따위에게 오랫동안 감정을 품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 믿었다.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책상 위 보고서로 시선을 내린 필리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안나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고, 빠르게 두 가지의 요리를 완성했다. 기존 타르타르 소스에 강렬함을 더하려 일부러 매운맛을 제거하지 않은 양파를 사용했다.

    “저, 이대로 올려도 괜찮을까요?”

    완성된 소스를 황제의 테이블에 오를 그릇에 옮겨 담던 카라나가 안나가 만든 요리를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채소 볶음이야 자주 상에 올리던 것이니 큰 상관 없겠지.”

    안나가 만들어낸 것은 쇠비름 볶음과 순무 나물이었다. 재료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대체재를 충분히 활용해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래. 식당 외국 손님들도 내 나물을 엄청나게 좋아하며 뷰리풀, 원더풀을 외쳐대곤 했으니까 자신감을 가지자. 그 콧대 높은 양반도 분명 괜찮다고 쌍 따봉을 들어 보일 거야. 케이 푸드의 위대함을 기억하자.

    “그럼 저는 계속 소스를 만들겠습니다. 저녁에도 올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시종 한 명을 더 보내주마. 카밀라!”

    가만, 카밀라라면.

    주방 뒤쪽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던 까만 머리의 여자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침부터 자신의 성질을 있는 대로 긁어 놓은 여자가 아닌가.

    “아, 괜찮습니다, 주방장님. 저와 마샤 두 명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아침에 보니까 꽤 힘들어 보이던데.”

    “아, 아니에요. 마샤와 손발이 잘 맞아서 끄떡없습니다. 이제 손에 익어서 시간 내에 충분히 완성할 수 있어요.”

    혹시라도 카밀라와 함께 일하게 될까 두려워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다. 간절함에 치맛단을 잡은 손끝에 하얗게 힘이 실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밀라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예, 주방장님.”

    휴, 다행이다.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좀 힘든 편이 훨씬 낫지. 마샤에게는 좀 미안하긴 하지만.

    “저, 마샤. 미리 소스를 만들어 놓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어? 어… 그런데 얼마나?”

    저 착한 아이가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안나가 마샤의 어깨를 주무르고 허리를 다독여 주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좋아하시니 또 찾으시지 않을까? 급하게 준비하려면 망칠 것 같아서 그래.”

    “응, 알겠어. 아까처럼 하면 되는 거지?”

    “역시 마샤밖에 없어!”

    안나가 마샤를 와락 껴안았다. 안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마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는데,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주, 둘이 재미가 좋아?”

    잔뜩 가시가 돋친 날카로운 말투였다. 마샤를 안은 손에 힘을 푼 안나가 카밀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켜 줄래? 우리는 바로 소스를 만들어야 해서 말이야.”

    “아, 일하던 중이었어? 노닥거리던 중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이런 인간 유형이 꼭 한 명은 있지. 안나가 수습 요리사 시절 자신을 잡아먹을 듯 갈궈대던 선배 강민아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나대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해.’

    ‘…예, 선배님.’

    ‘숨만 쉬면서 일해. 아, 숨소리가 너무 크면 칼질에 방해되니까 주의하고.’

    주방 식자재를 몰래 빼돌리던 것이 적발되어 강민아가 해고되던 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깨춤을 춰 댔었지.

    “너 내가 아침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가만, 그런데 강민아는 선배였기 때문에 찍소리 못하고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같은 시종 신세인데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을 이유가 없지. 안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카밀라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남들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열심히 해.”

    “뭐? 너 지금!”

    “너 저거 다 다듬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남들 일에 참견하고 다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안나가 주방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채소 더미를 가리켰다. 부들부들 몸을 떤 카밀라가 악에 받친 말을 뱉으려는 순간, 안나가 마샤의 손목을 잡고 바로 등을 돌렸다.

    “네가 뭘 믿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라.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이것을 마무리하지 않고!”

    막 주방 안으로 들어온 놀만이 카밀라의 말을 잘라냈다. 분을 참지 못해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씩씩거리던 카밀라가 부러 발을 쿵쾅거리며 분풀이를 했다.

    “안나. 너 변했다?”

    “뭐가?”

    “평소엔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카밀라를 피해 다니더니.”

    괜히 그랬나. 마샤에게 달걀을 건네준 안나가 낮게 읊조렸다. 언제까지 이 몸으로 살아가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원래 몸의 주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을 노릇이니.

    “잘했어.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거리는데, 내가 속이 다 시원하더라.”

    마샤가 키득거리며 달걀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일부로 납작 엎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럴수록 더 짓밟으려 들 것이 뻔할 테니.

    그나저나 음식은 맛있게 먹고 있는 걸까? 고개를 든 안나가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전실을 가득 채운 대신들이 필리프가 먼저 포크를 들기를 기다렸다.

    “자, 모두 들지.”

    “예, 폐하.”

    갑작스러운 황제의 식사 제안이었다. 평소 대신들과의 식사를 즐겼던 선황과는 달리, 필리프는 황궁의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대신들과의 식사 자리를 거의 만들지 않았었다.

    필리프의 눈치를 살피던 대신들이 하나둘 포크를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안나의 소스를 그릇에 옮겨 담은 필리프가 먹음직스럽게 구운 청어 살을 집었다.

    “음.”

    소스의 맛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씹히는 채소의 식감이 아삭했고 알싸하게 매운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자신이 직접 여자에게 쥐여 주었던 로즈메리의 향이 한층 강해진 것도 차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지금 그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분명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있을 테지.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를 한계까지 키우고 있을 거야. 불안감과 기대감이 반쯤 뒤섞인 심정으로. 여자의 표정을 상상하던 필리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폐하. 처음 맛보는 소스인데 그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선과 아주 궁합이 좋습니다.”

    대신들의 평도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접시를 비워나가는데, 수많은 생선 요리 틈에 자리한 채소 볶음이 눈길을 끌었다. 평소 늘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던 채소볶음과 그리 다른 바가 없어 보였지만, 멀리서도 고소한 향을 풍기는 것이 느껴졌다.

    시종을 불러 접시에 음식을 덜어내고 바로 포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필리프의 눈치를 살피던 대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채소 볶음을 접시에 덜어냈다.

    “채소라면 질색인데, 이것은 아주 맛이 좋습니다, 폐하.”

    “역시 황궁 주방장의 솜씨라 이리 훌륭한 모양입니다.”

    기름에 익혀 질척해진 채소의 식감 자체를 즐기지 않는 필리프의 입에도 아주 잘 맞는 볶음이었다.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황궁 요리사인 카라나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요리를 먹고 자란 자신이었으니.

    그렇다면 혹시.

    다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린 필리프의 눈가에 가벼운 웃음기가 번졌다. 갑작스럽게 변한 황제의 표정을 살피던 대신들이 일제히 포크를 멈추며 밭은 숨을 들이마셨다. 평소 감정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황제였던 만큼, 늘 면밀하게 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입가를 닦아낸 필리프가 공중에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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