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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화 (8/139)
  • 8화

    “안나, 너 괜찮겠어? 혹시 몸이 안 좋으면 내가 주방장님께 말씀드려서…….”

    “아. 아니야, 마샤. 난 괜찮아. 어서 가자.”

    마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안나의 얼굴에 달라붙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억지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마샤를 안심시킨 안나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주방에 들어섰다.

    “안나. 여기 재료를 준비해 놓았다.”

    주방에 들어서니 놀만 부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재료가 담긴 커다란 통을 가리켰다. 주방 사람들의 의심을 받는 것을 피하려 요 며칠 늘 마지막까지 주방에 남아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을 보여준 까닭인지, 자신을 대하는 카라나와 놀만의 태도에 조금씩 신뢰가 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네, 주방장님.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역시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 악문 안나가 통에 담긴 재료를 정리하며 마샤를 돌아보았다.

    “마샤는 먼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줘. 자, 봐 봐. 이렇게 하면 쉬울 거야.”

    마샤에게 달걀 분리법을 가르쳐주고, 서둘러 둥근 볼에 재료를 담았다. 준비된 재료를 힘차게 섞고 또 섞다 보니 혼란스럽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계속 섞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섞어도 그만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자 마샤가 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응. 아직 멀었어. 계속 섞다 보면 그 액체가 크림처럼 변하거든. 그렇게 될 때까지 무조건 강하게 저어야 해.”

    “네가 어제 종일 소스만 만들라는 얘기를 듣고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일손이 느니 혼자서 만들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마요네즈가 완성되었다. 피클과 양파를 빠르게 다진 안나가 소스 통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마샤. 혹시 로즈메리를 좀 딸 수 있을까?”

    “약초 정원에 있을 거야. 내가 따다 줄까?”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여기 다진 양파를 물에 좀 담가줘. 레몬도 얇게 썰어 주고.”

    “응, 알았어.”

    앞치마에 손을 닦은 안나가 주방장에게 허락을 구한 뒤 주방을 벗어났다. 약초 정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지만, 다시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며 자신을 정원 앞으로 안내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통한 능력이었다.

    “오호라! 허브가 풍년일세!”

    약초 정원에 들어선 안나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총 여섯 개의 구역으로 나뉜 공간에 각각 다양한 종류의 허브가 재배되고 있었는데,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허브와 약초가 즐비했다.

    안나가 정신을 놓고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귀여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약초 잎에 아침 이슬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우와. 고수도 있네? 아, 쌀국수 먹고 싶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해 먹을 방법이 없겠지? 육수 내는 건 어렵지 않아도 역시 소스가 문제야.”

    애초에 정원을 방문한 목적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이건 나물 종류인가? 뜯어다가 한 번 무쳐 볼까? 아, 참기름이 없구나. 나물에 참기름이 없으면 안 되는데. 가만, 그런데 참기름은 언제 발명된 거지? 기름 짜는 기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정신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느라 누군가 자신의 등 뒤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또 너로군.”

    한숨 섞인 말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안나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급하게 몸을 일으킨 탓인지 들고 온 소쿠리에 다리가 걸리며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공중에 나풀거리던 안나의 몸이 흙바닥에 나뒹굴기 바로 직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얼굴과 얼굴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따뜻한 필리프의 숨결이 뺨에 와 닿는 순간 안나의 몸이 파르르 경련하며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차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쿵쿵 뛰었다. 이 커다란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어떻게 해.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잖아. 가만. 뭐지? 이 좋은 냄새는? 이 남자에게서 나는 향기인가? 향수는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이 사람 몸에서 원래 풍기는 향인가?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뱃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손바닥에 닿는 이 단단한 것은 혹시 근육인가, 돌인가. 창도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딱딱하다. 단단한 그의 팔에 갇혀 넋 놓고 그의 미모를 감상하려다가 문득 자신이 제국 황제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왓!”

    안나가 괴성을 지르며 필리프의 품을 벗어나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미쳤어, 서안나. 제정신이 아니야. 정신을 놓아도 분수가 있지. 뭐라고 하지? 죄송하다고 빌어야 하나? 가만. 넘어지려는 나를 잡아준 건 저 남자잖아. 그렇게 죄송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빌자.

    “죄, 죄송합니다, 폐하.”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숙인 안나가 용서의 말을 뱉었다. 달뜬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슬쩍 웃은 필리프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정원엔 어쩐 일이지?”

    고개를 들어도 된다는 소리인가? 안나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고 먼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 표정이라,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아, 예. 소스에 넣을 로즈메리를 따러 잠시 들렀습니다. 바로 딴 허브를 사용하는 게 맛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당신에게 바칠 소스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구하러 온 것뿐이라고요.

    “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로즈메리 모양이 변한 모양이군.”

    “예?”

    황제가 소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수, 쇠비름, 세이지, 머그워트 그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초들이 소쿠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만, 내가 언제 저것들을 다 따서 집어넣었지?

    “아, 약초가 매우 싱싱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이제 막 로즈메리를 따려던 참이었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소쿠리를 등 뒤로 감추는 안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도 잠시, 서슴없이 부드럽던 그의 눈에 힘이 실리는 것이 보였다.

    “한가롭게 정원 감상을 할 시간이 남은 것을 보니, 소스는 이미 충분히 만들어 놓았다는 뜻이겠지?”

    “예? 아, 한가롭게 감상하는 것은 아닌데……. 아, 무, 물론입니다, 폐하. 추, 충분히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하하하. 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로 흐르는 것은 식은땀이겠지. 설마 눈물이 등에서 흐를 일은 없을 테니.

    “만들기가 까다롭다고 하여 점심은 혼자 먹을 생각이었는데, 황궁 대신들을 모두 불러 함께 식사해도 괜찮겠어.”

    황궁 대신들? 대신들이라면 몇 명을 말하는 거지? 안 되는데. 지금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얼마나 더 만들어야 하는 거지.

    공포에 질린 안나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황제가 등 뒤 시종에게 무어라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다시 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서려 있던 웃음기가 조금 더 진하게 번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멋지다고만 생각했던 그 웃음이 오늘따라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나.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고해야 하나? 아냐. 그랬다가는 감히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고 역정을 낼 수도 있잖아. 아주 가끔 유해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니 섣불리 말을 꺼내선 안 돼.

    머리가 새하얗게 굳어 입을 어버버 거리는 안나를 뒤로한 황제가 정원 중앙으로 발을 옮겼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다시 안나에게로 걸어온 그가 안나의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로즈메리야. 정작 필요한 것은 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예?”

    그가 손수 따 준 로즈메리를 받아든 안나가 고개를 숙이며 더듬더듬 감사하다는 말을 뱉었다. 조용히 숨을 내쉬며 나가 보라는 말을 기다리는데, 그는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갑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낡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 아, 맞다. 그, 그럼 허락 주시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소쿠리를 챙겨 들고 허둥지둥 정원을 나서는 안나의 등 뒤로 남자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제와 똑같은 맛의 소스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엔 신기한 맛이었지만, 아무래도 같은 맛이라면 좀 질릴 것 같거든.”

    발을 멈춘 안나가 등을 돌려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색이 된 자신과는 달리,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의 얼굴에는 짙은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얄미운 입꼬리가 매끄럽게 휘는 것이 여전히 멋스러웠지만, 어제만큼의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딱딱하게 답한 안나가 빠르게 정원을 벗어나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완벽한 외모와 피지컬을 제외하면 장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남자였다. 오만하고 뻔뻔하고 괴팍한 데다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것 같았다.

    주방에 도착해 선반에 소쿠리를 내려놓은 안나가 채취한 약초와 허브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나. 왜 이렇게 늦었어. 자, 네가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어.”

    마샤가 잘게 썬 레몬과 물기를 빼 높은 양파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잘했다는 말을 뱉으며 마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소쿠리 속 쇠비름 한 움큼을 집어 들었다.

    “마샤. 미안하지만 순무 하나와 유채 씨 기름을 좀 가져다주겠어?”

    “응.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소스 만들 시간 부족하지 않겠어?”

    “어, 이건 금방 만들 수 있는 거라서. 딱 삼십 분이면 되거든.”

    소매를 걷어붙인 안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기대하시죠. 내 지금껏 당신이 경험한 적 없는 신세계를 맛보게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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