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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화 (7/139)
  • 7화

    “폐하. 식사를 마치셨으면 이만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대기해.”

    시종들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섰다. 황제는 식사가 끝나고도 전실 안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공중을 응시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그의 입가에는 내내 잔잔한 미소가 걸려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모든 일에 언제나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황제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부드러운 표정에 당황한 시종들이 쉴 새 없이 몸을 움칠거렸다.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던 황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침실에서 술을 한 잔 더 하고 싶으니 준비해.”

    “예, 폐하. 그럼 함께 드실 안주를 들이라 주방에 이르겠습니다.”

    “음.”

    시종장이 황제가 유일하게 깨끗이 비운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대구 요리와 소스를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빈 소스 접시를 내려다보던 필리프의 입가에 한층 더 진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지금 말을 바꿔 당장 소스를 내오라 한다면 그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첫 순간만큼은 분명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날 것의 표정을 지을 테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릴 테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거야. 여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시종장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빈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잔잔한 웃음소리를 내던 황제가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예?”

    “간단한 과일을 준비하라고 일러. 오늘은 저녁을 충분히 먹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폐하.”

    당황스러움에 여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평소보다 많은 양의 저녁 식사를 한 이후였다.

    “폐하. 그럼 이제 식사를 물리겠습니다.”

    “이것은 놔 둬.”

    황제가 새빨간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 접시를 손짓했다. 평소 먹는 음식량을 철저히 관리하던 황제가 구색용으로 준비된 디저트에 손을 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바삭한 겉껍질을 깨물면 입안으로 잼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라…….”

    여자가 했던 말을 곱씹은 필리프가 포크를 잡아 커다랗게 벌린 입안으로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음…….”

    그녀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바삭한 표면을 베어 묾과 동시에 입안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달콤한 잼이 입안 전체에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단 것을 좋아했던가? 아니, 평소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머리통이 울릴 정도로 단맛이 입안 곳곳을 때려대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케이크를 씹고 남은 단맛까지 충분히 즐긴 필리프가 남은 케이크 조각을 한꺼번에 입안에 넣었다.

    완전히 케이크 접시를 비워낸 필리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등 뒤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술도 안주도 됐으니 이만 침실로 돌아가지.”

    “예? 아, 알겠습니다, 폐하.”

    당장은 무언가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내 회색빛으로 가득했던 시야에 온갖 화려한 색상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 이 여운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 * *

    절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아침이 찾아왔다. 수백 번 소스를 젓고 또 저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새벽까지 안나를 괴롭혔다. 제발 눈을 뜨면 원래 있던 원룸 단칸방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안나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높은 천장에 매달린 조악한 샹들리에를 확인한 안나가 다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언제나 그랬듯, 신은 제 소원을 이리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을, 왜 하필이면 타르타르 소스를 만들겠다 설쳐서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하거늘!

    아침부터 대량의 마요네즈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한참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자학하던 안나의 머릿속에 다시금 필리프가 미소 짓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만.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소스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었나? 신기하네. 생각보다 입이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어. 가만, 산딸기 케이크는 맛있게 먹었으려나? 단 걸 먹으면 한결 기분이 좋아질 텐데.”

    황제가 산딸기 케이크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하던 안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지? 이 배 속의 후들거림은? 대체 무슨 감각인 거야?

    오므라든 발가락을 쫙 잡아 핀 안나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악! 정신 차려, 서안나! 정말 미쳤나 봐!”

    머리카락을 아프게 쥐어뜯으며 머릿속에서 황제의 생각을 몰아내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 일어났어?”

    어느새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샤의 목소리였다.

    “응. 들어와.”

    깔끔한 준비 복장을 갖춘 마샤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방안에 들어섰다, 어라, 아직 아침 준비 시간이 한참 남은 것 아닌가?

    “벌써 준비한 거야? 설마 오늘 빨리 준비하라고 하셨어?”

    “어, 아니야. 네 침대 시트를 빨아 놓은 게 갑자기 생각나서 조금 일찍 움직였어. 아무래도 오늘 비가 오려나 봐. 하늘이 어둡더라고.”

    아, 맞다. 오늘 방을 옮기기로 했었지. 침대를 완전히 박차고 일어난 안나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낡은 아마포 드레스 한 벌과 일할 때 입는 옷과 앞치마, 머리끈과 두건이 전부였다.

    “지금 바로 옮기지 뭐.”

    “그럴래?”

    짐 가방을 들고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안나가 황급히 등을 돌려 베개 밑 수첩을 꺼내 들었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그게 뭐야?”

    “응? 아, 일기장.”

    “안나, 너 글을 쓸 줄 알았어?”

    어, 이 시절 시종들은 대부분 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었나?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을 의심할까 봐 안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냥 쉬운 글자만 몇 자 적는 거지, 뭐. 여기에 그림도 그리고 그러려고.”

    “응.”

    다행히 의심하지는 않은 것인지 마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며 서둘러 수첩을 열었지만, 어제와 같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뭐지.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잖아. 그날은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힘없이 수첩을 덮은 안나가 입고 있던 드레스 안쪽으로 수첩을 밀어 넣었다. 그래 며칠 더 들여다보다가 여전히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으면 그냥 버리던가 해야 하겠어. 괜히 옆에 둬봤자 찜찜하기만 하니까.

    마샤는 커다란 방에 총 열 명의 시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마샤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는 안나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는 시종도 있었고,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아니, 도대체 안나 스완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거야. 어떻게 된 게 도대체가 중간이 없네, 중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안나가 들고 온 짐가방을 여는 순간이었다.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다가 큰코다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빈정거리는 음성이 정확히 안나의 귀에 와 꽂혔다. 고개를 든 안나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안나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 명의 무리를 올려다보았다. 냉소를 가득 머금은 그들은 속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안나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무리의 가운데 서 있던 여자가 무릎을 굽혀 안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럼 여기 너밖에 더 있어?”

    “뭐?”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이 너밖에 더 있냐고.”

    위로 틀어 올린 여자의 까만 머리카락 군데군데 생화가 꽂혀 있었다. 차분하게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려는데, 마샤가 여자와 안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만둬, 카밀라. 소스를 만들려면 우리 지금 나가봐야 해.”

    “소스? 아, 황제 폐하께서 맛있게 드셨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소스?”

    빈정거리는 어투가 날카로웠다.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여자를 지나쳤다.

    “무슨 짓을 해서 소스를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네 언니 꼴 나기 싫으면.”

    “뭐?”

    방을 나서기 직전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언니 꼴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카밀라가 천천히 다가와 안나의 앞에 자리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야. 시종의 처지를 망각하고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던 자의 최후를.”

    “…….”

    “학습 능력이 없는 거야, 아니면 오래 앓아서 전부 잊어버린 거야. 기억나지 않는다면 전부 똑똑히 기억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난…….”

    “가자, 안나.”

    마샤가 안나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방을 빠져나오게 했다. 마샤에게 이끌려 복도를 지나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며 각인되어 있던 잔상이 떠올랐다.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누군가의 몸을 붙들고 오열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축 늘어진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무언가를 하염없이 속삭였다.

    ‘내가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크게, 조금만 더.

    “안나! 너 괜찮아?”

    터질 것처럼 끓어오르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지고, 정수리 위로 걱정스러운 마샤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어, 괜찮아.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좀 아파서.”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다음 달이면 카밀라가 황궁을 떠나기로 되어있잖아. 그냥 몇 주만 더 무시해.”

    “…그랬나?”

    “응. 베르나 황녀님께서 카밀라를 데려가신다고 하셨잖아.”

    카밀라를 가까이하는 순간 느껴졌던 강한 불쾌함의 감정은 무엇 때문일까. 잠깐 머릿속을 스쳤던 광경에서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자의 정체는?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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