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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화 (6/139)
  • 6화

    안나가 빼꼼히 시선을 올렸지만, 황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는 없어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긴장감에 바짝 말라붙은 입술이 따끔거렸다.

    “설마 이 간단한 질문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황제가 입을 열지 못하는 안나를 무표정으로 훑어 내리며 비꼬았다. 가만히 숨을 가다듬은 안나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제가 만든 소스가 맞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길게 늘인 그가 공중에 손을 들어 올렸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소스를 만들기 전 머릿속을 스쳤던 광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 입에 맞지 않는 거야. 곧 포크를 내던지고 어찌 이따위 음식을 황제의 상에 올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칠 것이 분명해. 얼굴만 잘생겼다뿐이지 성격은 몹시 괴팍한 남자 같던데, 혹시 벌을 내리면 어쩌지? 설마 소스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니겠지?

    아냐, 예전 황제들이 얼마나 괴팍하고 성질머리가 더러웠는지 역사책에도 수없이 서술되어 있잖아. 분명 날 잡아 가둘 거야. 잡아 가둘 게 뻔해! 어쩌지? 뭐라 변명거리를 생각해, 서안나!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안나가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황제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공중에 들린 그의 손이 빙그르르 돌아 위치를 바꾸고, 검지가 두어 번 까딱거려졌다. 가까이 오라는 말인가 싶어 굳어 있던 발에 힘을 푼 안나가 슬금슬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까딱까딱.

    안나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섰음에도 그의 손가락질이 멈추질 않았다. 더 가까이 오라는 말인가? 설마 접시를 얼굴에 던지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한테 그런 무자비한 폭력을 쓰기야 하겠어?

    안나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뎌 다시 그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히 그제야 공중을 향해 있던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휑하게 빈 소스 접시를 가리켰다.

    “이것을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던데.”

    “예?”

    앗, 또 미간이 구겨진다. 성질이 급한 사람인 것 같으니 그냥 빨리 대답하자.

    “아, 예, 폐하. 그 점성을 만들어내려면 오랫동안 내용물을 섞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액체 상태가 변하지 않아서 최대한 빠르게.”

    “내가 지금 너한테 요리법을 읊으라 했던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풀 죽은 안나가 푹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 폐하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그리 많이 만들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그가 다시 입을 다물며 안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진득한 시선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그대로 끊어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아, 제발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진짜 정말로 너무 잘 생겼잖아.

    “내일부터는 넉넉히 준비하도록 해. 식사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은 질색이니까.”

    “…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든 안나가 멍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안나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황제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뭐야. 마음에 든다는 말이었어? 분명 마음에 들었으니까 넉넉히 준비하라고 말한 것이겠지? 아니,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뭘 이렇게 분위기를 무섭게 가져가십니까. 안나가 굳은 얼굴을 활짝 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전하는데,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증류주를 더 내오도록.”

    “예, 폐하.”

    안나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전실을 나섰다. 멀뚱히 선 안나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전실을 나선 시종이 유리병을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만 나가 보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황제의 앞에 생각보다 바짝 다가가 있음을 느낀 안나가 천천히 상체를 뒤로 빼려 발가락 끝에 힘을 실었다.

    “디저트는 어떤 것이 준비되어 있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포크를 집어 든 황제가 불시에 물었다. 고개를 드는 움직임에 맞춰 결 좋은 그의 백 금발이 춤을 추듯 유려하게 찰랑거렸다. 꿀꺽 침을 삼킨 안나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오늘은 와인 젤리와 산딸기 케이크를 준비하였습니다. 특히 산딸기 케이크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바삭한 겉껍질을 깨물면 달콤한 잼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도록.”

    “말이 많군.”

    “…죄송합니다.”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나불거리던 입을 처량하게 다무는데,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이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보였다. 뭐야. 비웃는 건가?

    “오늘은 더 음식을 내지 않아도 괜찮으니, 남은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해.”

    “예? 그게 무슨.”

    시종들은 황제의 식탁에 올랐던 음식에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식사 후 남는 음식은 주로 황궁에 머무르는 귀족들에게 전해지거나, 그대로 폐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저, 폐기하라는 말씀이신지…….”

    우아한 동작으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느릿하게 술을 한 모금 머금은 그가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비스듬한 시선을 주었다.

    “폐기하던가, 아니면 먹어서 없애거나.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나?”

    “예? 아, 아닙니다. 알아들었습니다, 폐하.”

    오, 횡재다! 요 며칠간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먹으며 간신히 허기를 달랬는데, 오늘은 드디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 심각한 상황임을 망각한 입가에 속절없이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만 나가 봐.”

    “아, 예.”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등을 돌렸다. 머릿속으로 주방에 남은 음식을 떠올리니 실없는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빙글거리며 문손잡이로 손을 뻗으려는데, 그가 안나를 멈춰 세웠다.

    “아, 산딸기 케이크는 맛을 보도록 하지. 바삭한 겉껍질을 깨물면 잼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궁금한데.”

    들어본 것 중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안나가 뱉은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한 그가 눈꼬리에 힘을 풀며 미소지었다. 꽝꽝 언 북극의 얼음을 그대로 녹여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따뜻한 미소였다.

    너무나도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을 뱉을 수가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바보처럼 더듬더듬 인사를 전하자 그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스로 문을 닫고 나와 몇 발짝 걷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소리 높여 뛰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이 두근거림이 걱정했던 상황을 무사히 모면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처음으로 보여 주었던 미소 때문인지 도저히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 * *

    “우와! 이것도 정말 맛있어. 자, 안나. 너도 먹어 봐.”

    마샤가 잘 익은 장어구이 한 점을 안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평소에는 없어서 먹지 못하던 귀한 장어구이였는데, 어쩐 일인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 무언가 단단히 걸려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폐하의 상에 오르는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신 게 얼마 만이지? 베르나 황녀님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실 때였으니까 한 반 년쯤 되었나?”

    “어? 어,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지난번 금육일에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며 황궁 조리사 몇을 해고하셨었잖아. 그때 주방에서 우리 얼마나 떨었었는지 기억나지?”

    그럼 자신의 머릿속을 스쳤던 광경이 지난 금육일에 있었던 일이었던가.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장어구이를 입에 넣었다. 초 생강 절임을 곁들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술 생각이 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원한 맥주 한 모금만 마시면 정말 소원이 없겠는데.

    “저, 마샤.”

    “응?”

    빠른 속도로 접시를 비워내던 마샤가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혹시 말이야. 우리 술은 마시면 안 되는 거야?”

    “…술? 과실주 말하는 거야?”

    “뭐, 아무거나.”

    “평소에는 술이라면 질색을 하더니.”

    “아, 오, 오늘 좀 피곤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한 모금 마셨으면 싶어서.”

    고개를 끄덕인 마샤가 접시의 내용물이 깨끗하게 비워냈다. 접시에 붙은 생선 살까지 싹싹 긁어먹은 그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빈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번에 과실주 담근 것이 좀 남았을 거야. 주방장님께 조금 받아올게.”

    이 시절 사람들이 술을 물처럼 마셨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포도주를 어린아이도 마셨다고 하니, 시종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지는 않았을 테지.

    “자, 여기.”

    주방 뒤쪽 시종들의 휴식 공간으로 돌아온 마샤의 손에는 커다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와, 이렇게나 많이?”

    “주방장님 기분이 좋으신가 봐. 너한테 줄 거라고 하니까 이렇게 큰 병을 주셨어.”

    물잔의 물을 단숨에 비워 낸 안나가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는데, 예상했던 대로 술맛이 아닌 달큼한 포도 주스 맛이 났다.

    “그렇게 맛있어?”

    허겁지겁 다시 잔을 채우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마샤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다시 빠르게 잔을 비워냈다.

    “아까 폐하께 불려 갔을 때 너무 긴장했나 봐. 목이 너무 마르네.”

    “그럴 만도 하지. 사실 너 불려 갔을 때 무슨 일 나는 줄 알고 나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소스를 만든 이를 불러오라는 말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거센 파도처럼 온몸을 덮쳤던 순간을.

    “나도 내일은 너 소스 만드는 걸 도우라고 하셨어.”

    “그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안나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며 황제의 지시를 떠올렸다.

    ‘‘내일부터는 넉넉히 준비하도록. 식사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은 질색이니.’

    넉넉히? 넉넉히라면 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오늘 작은 접시 한가득 소스를 만드는 것에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뒤늦게 찾아온 통증이 어깨를 짓눌렀다.

    “주방장님이 아침 식사 때도 소스를 내실 거라고 하셨어.”

    “뭐? 아침에도?”

    “응. 너는 내일 온종일 소스만 만들라고 하시던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판 자신을 탓할 수밖에.

    술잔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던 안나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차라리 도수가 높은 술이었으면 좋았겠다고.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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