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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화 (5/139)
  • 5화

    “자, 다들 준비한 소스를 내어놓거라.”

    “예, 주방장님.”

    가늘게 눈을 뜬 카라나가 주방 시종들이 만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작은 그릇들을 살펴보았다.

    황제의 식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의 최종 결정권은 황궁의 수석 요리사에게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요리 실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수석 요리사의 눈 밖에 나면 그대로 주방에서 내쳐질 수 있는 처지였다. 무엇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카라나의 허락이 필수였다.

    일반 주방 시종들이 만든 음식이 곧바로 황제의 테이블에 오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금육일 기간만큼은 예외였다.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 황제를 위한 다양한 종류의 소스가 필요했고, 카라나의 선택을 받은 소스가 이례적으로 황제의 식탁에 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음…….”

    신중한 표정으로 소스 하나하나를 맛보던 카라나가 안나의 소스가 담긴 접시를 집어 들었다. 소스의 맛을 본 그녀가 만든 이를 찾았고, 시종 맨 끝에 서 있던 안나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저, 제가 만들었습니다.”

    안나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카라나가 모여 있던 시종들을 모두 물리며 안나의 앞에 다가섰다.

    “이 시기에 모두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알고 있겠지?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카라나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끓어 넘칠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따위를 음식이라고 황제의 상에 내어놓은 거야?’

    어지러움에 두 눈을 꼭 감았다가, 고막을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각종 진귀한 음식들이 보였고, 곧 식기 위로 포크가 떨어지며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먹을 만한 음식 만드는 일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다, 당장 다시 음식을 조리해 올리겠습니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은 시종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처분을 기다렸다. 제 발밑에 무릎 꿇은 시종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둘러보던 황제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잘 세공된 흑요석같이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헉!”

    안나가 참고 있던 숨을 그대로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뻣뻣하게 굳어 거칠어진 호흡을 달래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카라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은 거냐. 다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몸이 좋지 않다면.”

    “괘, 괜찮습니다! 어제 꾼 악몽이 갑자기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만. 저 보세요, 멀쩡합니다.”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안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카라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안나에게 작은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맛은 괜찮지만, 해산물과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구나. 쉬는 시간에 해산물 요리와 어울릴 만한 소스를 만들어보도록 해라. 언니를 닮아 소스를 곧잘 만드는구나.”

    언니? 언니가 있었나? 주방장님이 아는 것으로 보아 주방에서 함께 일한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질 않는 거지? 지금은 다른 곳에 있는 건가?

    “뭐 하고 있어. 어서 받지 않고.”

    “예? 아, 예. 감사합니다. 꼭 맛있는 소스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앓고 나더니 더 씩씩해졌네. 카라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 안나가 주방 구석으로 몸을 숨겨 앞치마 속에 감춰둔 수첩을 꺼내 들었다.

    뭐야. 다시 또 빈 종이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적혀있을까 수첩을 펼쳐 보았지만, 어젯밤에 읽은 내용마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 요행을 바라지 말자. 마요네즈 정도야 집에서도 쉽게 만들곤 했으니까.

    호기롭게 두 팔을 걷어붙인 안나가 주방 안쪽으로 향해 다양한 소스와 향신료가 있는 선반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생소한 주방인데 마치 오랫동안 일했던 곳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들이 낯익었다.

    뭐야. 또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손이 제 마음을 훤히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향신료가 들어 있는 병을 척척 집어 들었다.

    레몬과 달걀은 준비해 놓았으니 소금과 설탕은 소량만, 그리고 약간의 견과류만 있으면 준비 완료. 질 좋은 올리브 기름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황궁 주방에 있는 아마씨 기름으로도 맛을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믹서의 힘 없이 재료를 섞는 것.

    시작은 힘찼으나, 점점 어깨가 저리기 시작했다. 오백 번은 넘게 저은 것 같은데, 여전히 거품 아래 액체는 그대로였다. 기름을 추가하고 손을 바꿔 다시 오백 번을 넘게 저었다. 아주 조금씩 액체가 사라지며 점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희망이 보인다.

    30분이 넘게 내용물을 섞고 또 섞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소중함을 느껴 본 적 없는 믹서와 핸드 블렌더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소스고 뭐고 들고 있는 주걱을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기엔 이제껏 쏟은 노력이 너무도 아까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손을 움직였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도구를 사용했을 때와 비교하면 점성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인가. 마요네즈가 완성되었으니 타르타르 소스 만드는 것은 손 안 대고 코 풀기였다. 혹사한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손을 쉬지 않고 양파와 피클을 잘게 다졌다.

    “안나, 밥 안 먹어? 오늘 시간 없다고 일찍 먹으라고 하셨잖아.”

    마샤가 말을 거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토록 무언가에 집중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처음 식당에 취업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귀를 쫑긋거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안나?”

    “어? 어…….”

    완성이다. 만든 소스를 카라나에게 받은 접시에 옮겨 담고 나서야 몸의 긴장이 풀려 마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뭐야, 너 괜찮아?”

    “어? 마샤. 나 소스를 완성했어!”

    “이게… 뭐야?”

    “새로운 소스를 만들어 봤는데, 생선이랑 아주 궁합이 좋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 주방장님께 먼저 검사를 받고 올게.”

    주어진 휴식 시간 전부를 쏟아부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주방 안쪽으로 음식 시종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것을 보니 곧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주방장님!”

    저도 모르게 목청껏 소리를 높여 주방 시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뻘쭘한 기분에 어색하게 웃은 안나가 빠르게 카라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 완성했습니다.”

    신중한 표정으로 안나에게서 접시를 받아든 카라나가 티스푼을 들어 소스를 맛보았다.

    그냥 먹는 것보다는 튀김이나 구이과 함께 곁들이는 것이 훨씬 맛있을 텐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흥분해서 맛도 보지 않았잖아. 괜찮을까? 역시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 이상한가? 왜 아무 말이 없지? 설마 나 한 시간이 넘게 헛고생한 거야?

    “신기한 맛이구나.”

    차분하게 평한 카라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안나가 더듬더듬 말을 붙였다.

    “새, 새콤하게 만들어보았습니다. 저… 기름기가 있는 생선과 함께 곁들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카라나가 놀만에게 소스 접시를 건넸다. 소스를 맛본 놀만이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이것을 안나 네가 만들었다고?”

    “예? 아, 예.”

    “아니, 소스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었지?”

    빠르게 답해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잠시 머리를 굴린 안나가 카라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예전에 언니가 가르쳐 준 것이 기억나서요.”

    안나의 답을 들은 놀만이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나의 어깨를 쓸었다.

    “그랬구나.”

    고민하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서 있던 카라나가 잠시 놀만과 이야기를 나눈 후 소스 접시를 테이블 상단으로 옮겼다.

    “오늘 저녁상에 이 소스를 함께 내도록 해라.”

    “예, 주방장님.”

    “자, 안나 너는 바로 생선 손질을 돕도록 하고.”

    “예!”

    좋았어! 쾌재를 부른 안나가 절로 흐르려는 콧노래를 삼키며 도마 위 칼을 잡았다.

    * * *

    “폐하. 음식을 들이겠습니다.”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은쟁반을 든 시종 열 명이 한꺼번에 전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평소 8코스의 요리를 느긋하게 맛보며 즐기곤 했던 저녁 식사와는 확연히 다른 금육일의 식사 풍경이었다.

    “술은 증류주로 내오도록.”

    “예, 폐하.”

    한꺼번에 모든 메인 음식을 내오라 지시한 필리프가 찬찬히 음식을 살폈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지난 금육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그저 겉만 그럴싸해 보이는 음식들.

    시종이 내온 증류주를 반 이상 들이킨 필리프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절인 해산물과 생선의 짠 기를 숨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향신료를 쳐 부었을지. 조금도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건 뭐야.

    공중을 배회하던 필리프의 포크가 누르스름한 소스 접시 위에 멈췄다. 평소 필리프가 즐기던 소스와는 전혀 다른 색과 질감의 소스였다. 포크로 소스를 조금 덜어내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그다지 풍미 있는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또 무언가 눈속임을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낸 모양이군. 커다란 대구살을 앞접시에 덜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스를 그 위에 얹었다. 소스를 묻힌 대구살을 잠시 바라보던 필리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기름에 구워 느끼한 생선 살과 상큼한 소스의 궁합이 꽤 그럴듯했다. 소스 안 내용물의 향이 신선하게 입안에 맴돌아, 늘 자신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던 생선 특유의 비린내가 거의 느껴지지 않으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소스를 한가득 앞접시에 덜어내며 허공에 손가락을 들었다.

    “예, 폐하.”

    “이것을 더 준비하라고 해.”

    황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접시를 확인한 시종 장 파이르가 고개를 숙이며 전실을 빠져나갔다.

    소스를 가득 얹은 대구 살을 입안 가득 머금은 필리프가 눈을 감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상큼하고 달콤한 소스가 계속해서 입맛을 돋우는 느낌이었다.

    “저, 폐하.”

    빠르게 전실로 돌아온 파이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야.”

    “송구하오나, 소스는 그것이 전부라고…….”

    “더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파이르가 긴장감에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로 만들겠다고 하였지만, 소스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탁. 포크를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이 소스를 만든 이를 불러오도록. 지금 당장.”

    “예, 폐하.”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전실을 빠져나간 파이르가 오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 고개를 잔뜩 조아린 여자의 정수리가 보였다.

    “네가 이 소스를 만들었나?”

    자그마한 정수리가 들리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제 눈치를 보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필리프의 입꼬리가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하, 또 이 여자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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