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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화 (4/139)
  • 4화

    황제의 마음에 쏙 드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거창한 안나의 다짐은,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의 상에 올릴 고기를 느긋하게 구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양고기를 구워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산더미 같은 고기를 정신없이 화덕으로 밀어 넣어야 했고, 고기 굽기가 끝나기 무섭게 디저트를 준비해야 했다.

    시대에 상관없이 주방은 늘 바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과는 달리 너무나도 느긋한 주방 시종들의 업무 속도였다. 식당 스태프와 함께라면 벌써 준비가 끝나고도 남았을 텐데, 손이 느린 주방 시종들은 안나의 업무 속도에 따라와 주질 못했다.

    “안나, 다 했으면 이것도.”

    “예.”

    한식당에서 일하긴 했지만, 단 음식을 유독 좋아하던 안나에게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디저트는 와인 젤리와 산딸기 케이크였는데, 도구가 있으면 편히 할 수 있는 일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꽤 재미있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총 8코스 구성의 요리를 끝내고 나니 말 그대로 진이 쏙 빠졌다. 황제의 반응이고 뭐고 그냥 그대로 침대 위에 퍼질러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그릇을 씻어라.”

    “…예.”

    음식에 대한 황제의 감상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요리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몰려왔다. 세제도, 고무장갑도 없이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마무리한 후에야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안나, 여기. 오늘은 고기와 빵을 받았어.”

    마샤가 건네준 작은 접시에는 황제의 식탁에 오르지 못한 질 낮은 고기구이 몇 점과 차가운 보리빵 한 덩이가 놓여 있었다. 식욕이 그대로 사라지는 음식이었지만, 버텨 내려면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음식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은 안나가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나, 너 괜찮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응, 괜찮아. 오랜만에 잡생각 할 겨를도 없이 일한 것 같아.”

    “내일부터는 더 힘들 텐데 오늘은 어서 쉬어.”

    다음 주부터는 원래 지내던 곳에서 지내도 좋다는 놀만의 허락이 떨어졌다.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불편하겠지만, 마샤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이 느껴졌다.

    “하아… 진짜 죽겠네.”

    처음 식당에서 일했던 날보다 몇 배는 고단한 하루였다. 씻을 힘도 없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 안나가 퉁퉁 부은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눈꺼풀이 천 근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피로감이 몰아닥쳤다.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기기 바로 직전, 베고 있던 베개 밑에 뭔가 딱딱한 물체가 와 닿았다. 베개 밑에 손을 넣으니 자그마한 수첩이 잡혔다.

    “…어라? 이게 뭐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이 빠졌는데, 수첩을 보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안나가 수첩의 첫 장을 펼쳤다.

    [그가 내가 만든 고기를 먹었다. 제대로 표정을 확인할 정신은 없었지만, 분명 만족스러움이 드러나는 말투를 뱉었다. 내일부터는 염장 생선을 조리해야 하는데,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그를 위해서 특별한 생선튀김과 소스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수첩 첫 장에 적힌 내용이었다.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겼지만, 나머지 장은 전부 공백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내가 만든 고기를 먹었다? 분명 만족스러움이 드러나는 말투였다? 수첩에 적힌 그가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 글의 화자였다. 순간 명치 끝을 세게 얻어맞은 듯 기분 나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가? 수첩을 침대 한쪽으로 밀어놓은 안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급하게 차오르는 숨을 삼키고 밀어 두었던 수첩을 다시 손에 쥐었다. 종이를 쥔 손끝이 달달 떨렸다.

    [내가 자신 있는 소스를 선보일 시간이다. 생선구이, 생선튀김과는 그 궁합이 최고일 테니, 분명 그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케이퍼와 허브는 충분하니 질 좋은 기름을 얻는 것이 급선무다.]

    조금 전과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질 않았다. 베개 밑으로 수첩을 밀어 넣은 안나가 수첩의 내용을 되새겼다. 이 거짓말 같은 현실에 놀라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케이퍼와 허브는 충분하니, 질 좋은 기름을 얻는 것이 급선무라고? 마요네즈를 만들라는 것인가? 마요네즈와 생선의 궁합이라면… 아, 타르타르 소스!

    마요네즈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이니, 그 어떤 요리사도 선보인 적 없을 소스였다. 그래, 이것이다. 분명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새로운 맛일 테지!

    사용할 재료와 조리법을 머릿속으로 꼼꼼히 복기한 안나가 침대 옆 촛불을 불어 끄며 자리에 누웠다. 내일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틀이 잡히는 기분에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잠이 쏟아졌고, 꿈을 꾼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상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포크와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곧 음식을 먹은 상대가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그 옆에 선 제 얼굴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 * *

    마차가 황궁 진입로에 도착하자 필리프가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폐하. 바로 침실로 드시겠습니까.”

    “먼저 목욕물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이른 아침 라이만 남작이 주최하는 사냥제에 참석해,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어린아이 장난과 다르지 않은 사냥 실력을 지켜봐야 했다.

    남작 가에서 먹이를 주고 기른 온순한 동물 사냥에 성공하고 자랑스러운 미소를 내뱉던 귀족들의 얼굴을 떠올린 필리프가 불시에 걸음을 멈춰 섰다.

    “잠시 걷고 들어가지.”

    필리프가 불시에 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향한 곳은 황궁 우측에 있는 커다란 장미 정원이었다. 이제 여름이 머지않은 것인지, 제법 늦은 시간임에도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서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원에 발을 들인 필리프가 여유롭게 나무 사이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의 출입이 통제된 공간에 도착했다. 자신을 뒤따르는 시종을 전부 물린 필리프가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했다.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 끝에는 자그마한 우물 하나와 나무로 만든 정원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찾아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의자에 앉은 필리프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궐련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폐하. 저녁 식사를 들고 가십시오. 좋은 증류주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눈을 밝힌 라이만 남작의 등 뒤에는 유리병을 든 그의 딸이 자리했다. 황위에 오른 지 1년, 자신의 자식을 황후 자리에 앉히기 위한 귀족들의 물밑 작업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에 하지. 오늘 사냥제에 참석하느라 미뤄 놓은 업무가 있어서.’

    ‘폐하가 남작 저를 방문하신다고 하여 어렵게 구한 증류주입니다. 식사가 부담스러우시면, 술 한잔은 괜찮으시지요.’

    품평회와 다름없는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상하리만큼 무거운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필리프가 황위에 오르는 데 큰 힘을 실어준 남작의 청을 거듭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산해진미를 모아 준비한 성대한 요리를 먹고 있으면서도 전혀 식욕이 돋질 않았다. 잘 구운 양고기 커틀릿을 먹으면서 필리프는 문득, 테라스에서 마주쳤던 주방 시종을 떠올렸다. 검은 숯,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던 작고 동그란 얼굴을.

    궐련에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신 필리프가 천천히 연기를 토해 냈다. 희뿌연 연기가 시야에서 모두 사라질 때쯤 그가 다시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잔상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배 속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하, 우습군.”

    끝까지 타들어 간 궐련 개비를 깊게 빨아들인 필리프가 꽁초를 비벼껐다. 바닥에 떨어진 꽁초가 잘 닦인 부츠 아래 짓이겨졌다.

    “폐하.”

    “침실로 돌아가지.”

    머릿속의 상념이 사라지지 않았다. 걸음의 보폭을 늘인 필리프가 빠르게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궁 입구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일제히 필리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침실로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의 침실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동쪽 계단을 통하는 길이었는데, 황제는 계단을 지나쳐 황궁 갤러리로 접어들었다.

    “이쪽으로 가지.”

    “예, 폐하.”

    황궁 갤러리를 통해 침실로 가려면 황궁 중앙 계단을 지나야 했는데, 계단 끝에 있는 황궁 주방을 지나쳐야 했다. 황제를 바짝 따르던 수행원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는 평소 시종들이 모여 소란을 떠는 것은 질색이라 말하며 중앙 계단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다.

    성큼성큼 내딛던 필리프의 발걸음이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시야 끄트머리에 황궁 주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기둥 뒤쪽에서 완전히 걸음을 멈춘 필리프가 손을 들어 뒤따르는 시종들을 멈춰 세웠다.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주방 시종들 사이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샤. 나 잠시 약초 정원에 다녀올게. 소스 만들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커다란 소쿠리를 품에 안은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약초 정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다란 드레스 밑으로 희고 가느다란 발목이 보였다.

    “저, 폐하.”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한 시종들이 흘끔흘끔 자리에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필리프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어냈다.

    “그래. 돌아가지.”

    침실에 도착한 필리프가 수행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초대에 대한 답례로 남작 가에 좋은 과실주 한 병을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조만간 남작의 딸을 황궁에 초대하겠다는 말도 전하고.”

    “예, 폐하.”

    불필요한 감정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서류를 펼쳤다. 훌륭한 혈통과 조건을 가진 신붓감 후보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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