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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화 (3/139)
  • 3화

    “저, 혹시 지금 훈연해도 될까요?”

    “훈연?”

    뭔가 너무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예. 저번에 고기 훈연했을 때 주방장님께서 맛이 좋다고 하셨던 게 떠올라서요. 제가 오늘 좀 일찍 나왔으니 시간도 넉넉할 듯한데…….”

    안나가 분리해 놓은 부위를 꼼꼼히 살핀 카라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신이 나서 분리한 살과 뼈를 커다란 바구니에 옮겨 담은 안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화덕 세 개가 놓인 곳은 발견했지만, 나무로 훈연을 할 만한 장소는 당최 보이지 않았다.

    불을 피워야 하니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그런데 황궁 안팎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확실히 해두려면 마샤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니, 괜히 그랬다가 의심이라도 받으면.

    한참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데, 날카로운 카라나의 시선이 직전으로 얼굴에 꽂혔다. 황급히 바구니를 들고 등을 돌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발이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읍!”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비명을 간신히 집어삼키며 들고 있는 바구니를 힘주어 잡았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다리가 기다란 복도를 순식간에 지나쳐 황궁 가장 안쪽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널찍한 테라스였는데, 커다란 화덕 옆으로 질 좋은 참나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니,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네.”

    다시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발을 두어 번 쿵쿵 땅에 굴려본 안나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오호, 이곳이었군.”

    어쨌거나 제대로 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절로 콧노래가 흘렀다. 구성진 트로트 자락을 흥얼거리며 화덕에 불을 지핀 안나가 가느다란 참나무 대 몇 개를 골라 살코기를 끼웠다.

    “음. 좋아. 잘 되고 있어.”

    피어오르는 연기를 쐐 노린내를 제거한 다음, 살을 골고루 구워줘야지. 숯을 사용해 석쇠에 구울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고기 맛이 느껴질 것이었다.

    “앗. 로즈메리를 들고 온다는 것을 깜빡했네.”

    연기를 입힌 고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얼굴에 느릿하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뭐지? 이 기분은? 온몸을 휘감는 불안감에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가 내뱉었던 무시무시한 말이 먼저 떠올랐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때는 오늘만큼 운이 좋지는 못할 거야.’

    아냐,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안나가 그대로 주저앉아 땅을 짚으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비굴하지만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 안쪽으로 다급하게 치밀어 올랐다. 한참을 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죽여도 일어서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 이게 아닌가? 이건 사극인가? 그럼 서양인들은 어떻게 용서를 구하지? 그냥 고개만 숙일 것을, 너무 지나쳤나?

    안나가 빼꼼히 고개를 들고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고개를 들라고 했던가?”

    “헉! 죄송합니다!”

    슬쩍 들었던 고개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그가 발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라는 분부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고개를 들어.”

    그래도 어제 마주쳤을 때보다 목소리가 차갑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고개를 든 안나가 조심스레 눈동자를 위로 굴려 올리는데, 서 있을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흡!”

    바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은 내지르지 않았지만,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황제의 입가에서 실소가 터졌다.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였으니 비웃음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 안나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간절한 사죄의 말은 덤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궁 전체를 고기 굽는 냄새로 채울 모양이지?”

    황제의 시선이 훤히 열려 있는 문에 닿았다. 고기를 구울 장소를 찾았다는 기쁨에, 문을 닫아 놓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빨리 고기를 구워야 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오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제 앞에 납작 엎드리는 부하 직원을 선호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은 황제에게 고용된 부하 직원이나 다름없으니 조금 비굴하더라도 이 방법이 최선일 테지.

    문을 닫으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데, 황제는 간단히 손바닥을 펴 보이며 안나를 제지 시켰다. 황제의 등 뒤에 서 있던 시종이 테라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안나가 변명의 말을 뱉어냈다.

    “황제 폐하께 조금이라도 맛있는 고기를 맛보게 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라는 분부가 떨어졌다. 황제의 얼굴을 보고 놀라 바닥에 떨어뜨린 고깃덩어리가 눈에 밟혔지만, 지금은 고기를 아까워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어떤 부류인지 알아?”

    “…예? 아, 저… 그것이.”

    “바로 입만 앞서는 사람들이지.”

    무덤덤한 말투에 그대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황제의 기다란 손가락이 잘 발라 놓은 살코기가 담긴 바구니를 가리켰다. 꿀꺽 침을 삼킨 안나가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워 봐. 그렇게 정신을 놓을 정도로 집중해서 구운 고기 맛이 궁금하니까.”

    “…예?”

    황제의 등 뒤에 있던 시종 두 명이 테라스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왔다. 화덕 바로 앞에 자리하고 앉은 황제가 어벙한 표정을 짓는 안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무언의 압박에 몸이 굳었지만, 계속 넋 놓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아, 저 그, 그럼… 굽겠습니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주방장 앞에서 새로운 메뉴를 선보일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손이 덜덜 떨려서 꼬챙이를 놓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긴장감에 숨이 막힐 지경인데, 속을 모르고 피어오르는 참나무 연기 덕분에 눈물과 콧물이 줄줄 샜다.

    안나가 꼬챙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줄줄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고, 고기에 자연스럽게 연기의 향이 배게 했다. 고기 굽는 것에는 특히 자신이 있었다. 고깃집에서도 절대 다른 이에게 집게를 넘겨주지 않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평소만큼만.

    “아직도 안 된 건가?”

    열심히 고기 굽는 사람 생각하지 않고 꼭 저렇게 젓가락 들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지. 연기에 얼굴이 가린 것이 다행이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은 들키지 않았으니. 안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황제를 살짝 돌아보며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충분히 연기를 입힌 살코기를 활활 타오르는 장작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빼내며 골고루 익혀냈다.

    “다 구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식기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안나를 저지한 황제가 우아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뭐야, 설마 이대로 먹겠다는 이야기인가? 화려한 생김새와는 달리, 나름 소탈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 그럼 여기 있습니다.”

    안나에게서 꼬챙이를 받아든 황제가 펄펄 김이 올라오는 고기 조각을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그걸 식히지도 않고! 엄청 뜨거울 텐데.

    “…….”

    분명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뜨거웠을 텐데, 황제는 눈썹 한 번을 찡그리지 않았다. 역시 저 정도의 참을성과 인내심을 겸비해야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맛이 괜찮은 건가?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심장이 그대로 가슴을 벗어날 것처럼 뛰었다.

    천천히 음미하며 고기를 씹어 넘긴 그가 절반 이상 남은 고기 꼬챙이를 등 뒤 시종에게 넘겼다. 몸을 바짝 긴장시킨 안나가 제자리에 서서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데 곧 황제의 담담한 평이 떨어졌다.

    “나쁘지 않군.”

    꼭 저런 사람들이 있다. 그냥 맛있다고 하면 될 것을 나쁘지 않다, 먹을 만하다는 등의 말로 대신하며 묘하게 만든 사람 속을 긁어 놓는 부류들. 기분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답변은 한 가지였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도 눈물 콧물 빼며 열심히 구운 보람은 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얼음장 같던 황제의 표정에 한 숟가락 정도의 부드러움이 섞여 든 것 같다고 느껴졌다. 살짝 솟아오른 입꼬리를 보니 빳빳하게 굳어 있던 몸에 긴장이 풀렸다.

    “오늘 저녁에 올릴 메뉴인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폐하.”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것인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파드득 고개를 숙였다. 자그마한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필리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맛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발을 들여놓은 곳에서 어제 제 제 앞을 가로막았던 시종과 마주했다. 고기 굽는 솜씨가 제법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제 반응을 겁내는 게 눈에 보여 그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안나의 수그린 등을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 소리에 등을 움찔거린 그녀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문을 닫고 조리하도록 해.”

    “예?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안나가 황제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곧 깔끔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안나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가 나갔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자 긴장이 한 번에 빠지고 안도감에 몸이 그대로 늘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얇은 꼬챙이에 살코기를 끼웠다.

    “좋았어. 저녁상에 올라갈 고기는 훌륭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멋지게 구워야지. 그 잘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잔뜩 머금게 해 주겠어.”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서 실없는 미소가 새어 나오고,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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