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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화 (2/139)
  • 2화

    다시 눈을 뜨면 익숙한 집 천장이 보이겠지. 딱딱한 침대에 누워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기 직전, 안나는 그야말로 태평하게 속 편한 생각을 했다.

    “아니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높은 천장을 확인하는 순간 몸이 그대로 침대에서 튕겨 나왔다. 아무리 머리를 잡아 뜯고 뺨을 아프게 때려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이곳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거울 앞에 선 안나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앳된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기구하다면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남들보다 많이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건강해라.

    술과 도박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고, 결국은 여자 문제까지 일으킨 아빠는 엄마가 집을 나간 다음 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안나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빛바랜 종이에 남겨진 마지막 인사를 읽으면서도 안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뻔하다면 뻔한 내용일 수 있는 인생사가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었고, 그 눈칫밥을 주는 것마저 아까워진 고모는 고등학교 졸업식 바로 다음 날 안나에게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을 크기의 단칸방을 구해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라.

    서글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남들보다 조금 이른 독립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안나는 꽤 그럴싸한 요리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냉장고에 남아 있던 허름한 재료로 어떻게든 맛을 내려 노력해야만 했기에 절로 습득한 능력이었다.

    나라에서 주는 돈을 아끼고 아끼며 삶을 연명했다. 라면 반 개로 하루 끼니를 때우고,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시작으로 죽자 살자 돈을 모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단칸방 전세금을 모으자마자 한식당에 취업했다. 텃세 심한 식당 주방장에게 조금씩 손맛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드디어 조금 숨통이 트이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말이 되지 않아! 대체 왜. 아니, 이게 가당키나 한 얘기냐고!”

    분통이 터졌다. 신이 있다면 절대 내게 이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 고생을 해서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고지를 눈앞에 둔 이 순간 어린 서양 여자 몸으로의 빙의라니. 차라리 돈이나 많은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로 빙의했다면 또 몰라. 이건 빙의를 해도 왜 이리 초라한 신세인 거냐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 근처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회초리를 침대 밑으로 감추며 방문을 열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구나.”

    무서운 중년 여자의 이름은 놀만 버틀랜드, 황궁 차석 주방장으로 황제의 식탁에 오르는 재료와 주방 시종들의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예. 빠,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아, 오늘은 서두를 것 없다. 황제 폐하께서 점심은 간단히 방에서 드시겠다고 전하셨으니.”

    “아, 예.”

    황제 폐하.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가 떠올랐다. 마치 몹시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태도였지만, 크게 모멸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대는 제국의 황제이고, 자신은 황궁의 시녀 신분이니 그 정도에 억울해하는 것이 더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럼 저녁 준비만 하면 될까요?”

    “그래. 다음 주에 시작되는 금육일 전에 비축해둔 고기를 전부 사용하라는 명이 있으셨다. 조금 이르게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 그때까지 조금 쉬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놀만이 방을 나서고 숨겨 두었던 회초리를 꺼내 제 자리에 놓은 안나가 침대에 늘어져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또 금육일이라니. 정말 끔찍해.’

    ‘왜? 생선을 먹으면 되잖아.’

    ‘안나, 너 왜 그래. 황제 폐하께서 생선을 질색하시잖아. 폐하께서 특히 더 예민한 모습을 보이시는 시기라, 식당 사람 모두가 금육일이 무사히 지나가길 두 손 모아 빌고 있는걸.’

    ‘아, 아아아. 맞다. 깜빡했어. 하하하하.’

    안나와 함께 채소를 다듬은 소녀의 이름은 마샤 카밀. 황궁 시종이었던 어머니에 이은 세습 시종이었다. 그녀를 통해 듣게 된 황제의 이름은 필리프 마티어스. 오랫동안 이어졌던 전쟁과 내전으로 입지가 약해진 선황이 목숨을 잃고 작년 성대한 즉위식을 거쳐 카마르 제국의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너 아까 황제 폐하 앞을 가로막았었다며?’

    ‘아, 그게… 들었어?’

    ‘조심해, 안나. 폐하께서 식당 시종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니까 당분간은 책잡힐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잖아.’

    ‘으응.’

    무엇 때문에 식당 시종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질문을 퍼부어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던 안나가 우연히 마주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 밑으로 그림자를 만들던 기다란 속눈썹, 우뚝 솟은 콧날,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끄러워 보이는 붉은 입술. 핏줄이 도드라졌던 남자다운 목울대까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뛰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아. 그리고 뭐랄까, 사람을 압도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어. 좀 차가운 느낌이 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카리스마로 포장할 수 있을 정도였어.

    한참이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던 안나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한가하게 잘생긴 남자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룻밤 사이에 황궁 시종의 몸이 되었지만, 참고 버텨낸다면 원래 지내던 삶으로의 복귀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래. 일단은 의심스러운 행동을 최대한 피하면서 주변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자.

    “그러니까, 지금이.”

    공부와는 담을 쌓다시피 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안나가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공부했던 과목이 바로 세계사였다. 특히 중세 시대의 시대상과 생활상은 안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시대와 연관된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던 때가 있었다.

    엄격한 신분 제도가 밑바탕이 된 사회였기에 마땅히 앞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시종의 몸으로 빙의한 만큼 노력한다고 해서 귀족이 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지금은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조금 편한 시종 생활을 하는 데에 목표를 두자.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일 테니까.

    의자 머리에 걸쳐두었던 드레스를 입고 앞치마를 맨 안나가 거울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 * *

    방을 나선 안나가 시종들이 지내고 있는 방을 기웃거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마샤의 얼굴이 보였다.

    “어, 안나!”

    원래 주방 시종들은 커다란 방에 함께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한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린 안나는 시종들이 쓰는 방의 바로 옆 쪽방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응. 혼자 있으려니까 좀 심심해서.”

    “그럼 내가 네 방으로 갈게. 잠깐만.”

    방 한쪽 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이야기한 마샤가 밝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방장쯤 되는 위치이겠군.

    “아, 오늘은 너한테 고기 손질을 맡기신다던데?”

    “고기 손질?”

    “어제 네 칼 솜씨를 보고 주방장님이 감명을 받으셨나 봐. 근데 오늘 고생하겠다. 꿩, 공작새, 토끼, 염소, 닭 그리고 메추라기까지 손질해야 할 거야.”

    그래. 당시 사람들의 육류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지. 하루에 평균 1킬로 정도의 고기를 먹어 치웠다고 하니 원.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샤는? 마샤도 나와 같이 일하는 거지?”

    “아니, 나는 오늘도 채소를 다듬어야 해. 오늘은 타국에서 새로운 채소가 들어왔다고 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새로운 채소라. 궁금증이 발동한 안나가 마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럼 우리 오늘 좀 일찍 내려가 볼까? 어떤 재료들인지 미리 확인도 할 겸.”

    “그럴까?”

    고개를 끄덕인 마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얼마 동안 이곳에 있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이 친구를 챙겨주리라. 잠시 어버이와 같은 눈빛으로 마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나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일찍 내려왔구나.”

    “예. 오늘 일이 많으실 듯하여 서둘러 준비하였습니다.”

    황궁의 수석 주방장 카라나 발퇴르가 들고 있던 향신료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주방 뒤편을 가리켰다.

    “그래. 이쪽으로 오거라.”

    주방 뒤편 선반에 다양한 육류와 채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안나가 빠르게 육류를 훑어보았다. 공작새를 제외하면 한 번쯤은 다루어 본 적이 있는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안나의 눈이 채소 더미로 향했다.

    “안나, 이쪽이야!”

    마샤의 앞에는 콜리플라워와 껍질 콩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 당시 사람들 눈에는 꽤 이국적으로 보일 재료들이지.

    “저, 주방장님. 이건 어떻게 다듬을까요?”

    “음. 먹기 좋게 썰도록 해라.”

    콜리플라워와 껍질 콩은 모양 그대로 볶아 고기에 곁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뱉었지만, 당장 주제넘게 나서 요리법을 제안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냥 시키는 일을 하자. 어제도 아무 생각 없이 칼질하다 괜히 의심을 살 뻔했잖아.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최대한 삼가야지.

    “아, 안나. 너는 이쪽에서 육류 손질을 하도록.”

    “아, 예.”

    산처럼 쌓인 고기 옆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향신료 병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향신료가 퍼진 시대에 살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후추와 계피, 설탕 그리고 샤프란까지. 고기 본연의 맛을 충분히 살리면서 감칠맛을 더해주는 것이 가능했다.

    “손질이 마무리되면 바로 화덕으로 옮기거라.”

    “예.”

    평소 안나가 좋아하던 양고기 손질이 맡겨졌다. 도축 직후 고기의 피를 완전히 빼지 않은 것인지 상당한 노린내가 풍겼다. 다양한 향신료에 하루 정도 재워서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 좋았지만,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끓는 물에 데치면 어느 정도 노린내를 없앨 수 있었지만, 육즙을 포기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분명 황제의 상에 올릴 음식이라고 했어. 황제의 얼굴에 새겨질 만족스러운 미소를 상상해본 안나가 고민 끝에 카라나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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