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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화 (1/139)

1화

흥에 겨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린 것이 실수였다.

‘오, 몰랐는데 안나 씨 술 잘 마시네?’

벌겋게 취기가 오른 민 사장이 다시 빈 잔 가득 술을 따랐고, 차가운 소주는 식도를 타고 배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술기운이 올라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고, 시끄러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까지는 기억해 냈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블랙아웃. 어떻게 집에 돌아와 침대 위까지 기어 올라갔는지, 도무지 조금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 무울…….”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코딱지만 한 반지하 원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도저히 냉장고까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지만, 지금 당장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으으…….”

일단은 눈을 떠야 했다. 다음 주부터 식당에서 자신만의 메뉴를 선보이기로 결정이 난 만큼, 한 치의 실수가 없도록 단단히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래, 서안나. 버티고 버텨 여기까지 왔잖아. 이제 고지가 멀지 않았어. 힘내자!

응?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는데, 지나치게 높은, 낯선 천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야? 왜 천장에 저런 게 달려 있지? 높은 천장 한가운데 전등이 아닌 놋쇠 조각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 자그마한 촛불 서너 개가 들어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퍼질러 자는 거야! 당장 일어나!”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생경한 천장을 바라보는데, 귓가를 때리는 새된 음성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저 아줌마는 또 누구야. 아니 그런데 서양인이잖아. 그리고 분명 외국어로 말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전부 한국어로 들리지? 뭐지? 아직 술이 안 깬 건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뭘 꾸무럭거리는 거야? 오늘부터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거늘.”

폐하의 식사라니.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안나에게 다가온 중년의 외국 여성이 안나가 덮고 있던 이불을 낚아챘다.

“왜, 왜 이러세요.”

몸을 동그랗게 말아 침대 끝으로 이동하며 뺨을 아프게 꼬집었다. 아팠다. 너무나도 아팠다. 원래 꿈에서 아픔이 이리 생생하게 느껴졌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오래 앓았으니, 오늘은 아무 말 없이 넘어가겠어. 다음부터 식사 준비에 늦으면!”

헉.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여자가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기다란 회초리를 집어 들었다. 휘잉. 침대 발치에 선 여자가 허공에 회초리를 그어 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일어났습니다!”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나가 여자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회초리로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다. 오십 년이 넘게 운영된 유서 깊은 한식당에서, 자그마치 오 년이란 시간을 버텨 낸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일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여자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여전히 미간에 힘을 풀지 않은 여자의 손에는 아직 칼날 같은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슬금슬금 몸을 물린 안나가 회초리를 들지 않은 여자의 왼쪽으로 이동했다.

“옷 갈아입고 주방으로 내려와. 최대한 빨리.”

회초리 끝으로 방 한쪽 구석 의자를 가리킨 여자가 방을 나섰다.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쉰 안나가 의자에 걸려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발목 길이 정도의 낡은 회색빛 드레스와 그것과 비슷한 기장의 흰색 앞치마였다.

그래. 일단은 갈아입자. 거, 되게 생생한 꿈이네.

입고 있는 얇은 잠옷을 벗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안나가 방을 나서려다 걸음을 멈춰 섰다. 방문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거울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리따운 서양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으헉! 뭐야?”

이유를 알 수 없는 원형 탈모에 시달리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는 윤기 있게 찰랑거리는 긴 금발로, 푸석거리는 노란 피부는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로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거울 속 여자의 나이였다. 기껏해야 열아홉, 스물? 앳된 얼굴을 이리저리 조몰락거리며 신기해하고 있는데,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외국 여자와 회초리를 동시에 떠올린 안나가 서둘러 방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 * *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기다란 복도 벽은 벽화와 장식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복도의 끝에 보이는 계단 난간 곳곳에는 정교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호화로운 주변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은데, 발은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안나, 이쪽이야!”

자신과 같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이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주방으로 들어서는데, 앳된 얼굴을 한 붉은 머리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안나? 내 이름을 알고 있네?

“뭘 그렇게 서 있어. 어서 이쪽으로 와.”

“어? 어, 어.”

“이제 몸은 괜찮아진 거야?”

“응? 어, 그럼.”

소녀가 제 손목을 잡아 주방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양파, 마늘, 순무, 아스파라거스 등 다양한 채소가 들어 있는 커다란 들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서 손질 시작하자. 지금도 시간이 좀 늦었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식당 짬빱이 얼만데, 다시 채소 손질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오 년 전 식당 막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떻게 손질하면 돼?”

“뭐, 그냥 씻고 굽기 좋을 정도의 크기로 썰라고 하셨어. 우리 맨날 하던 거잖아.”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칼을 잡고 기계적으로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요리를 시작하기 전, 이 년 동안 줄곧 채소를 다듬었었다. 훗, 이 정도 양이라면 식은 죽 먹기지.

탁탁탁탁. 탁탁탁탁.

현란한 칼솜씨를 자랑하며 정확하게 같은 크기로 채소를 썰고, 먹기 좋게 아스파라거스를 손질했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깨끗하게 빈 통을 들어 올리는데,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와, 안나! 너 언제 이렇게 칼 솜씨가 늘었어?”

“…어?”

“대단해! 난 아직 반도 못 했는데.”

아니, 이깟 칼질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경외하는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은 안나가 남아 있는 채소 통으로 손을 뻗었다. 고마워, 안나. 옆에 앉은 소녀가 낮게 속삭였다.

귀엽네.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내가 참 잘해 줬을 텐데.

씩 웃으며 채소 손질을 마무리하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관자놀이를 강타하던 두통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역시 골치가 아플 때는 단순 반복 노동이 최고인가.

“안나. 다 했으면 이리로 오거라.”

자신을 깨우러 방에 들어온 여자가 멀뚱멀뚱 앉아있는 자신을 이끌고 주방 뒤쪽으로 이동했다. 회초리를 든 그녀가 깊이 인상에 남은 것인지, 그녀의 앞에서는 비굴하게 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전실에 가져다 놓을 식기들이다. 들고 따라오도록.”

“예.”

고분고분하게 답하며 테이블에 놓인 접시 열 개 정도를 겹쳐 한 번에 집어 들었다. 도자기인가? 생각보다 무겁네.

“아니, 그걸 전부 옮기려고?”

“예? 아, 예. 별로 무겁지 않아서요.”

작은 접시 서너 개를 든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별것 아닌 거에 다들 많이 놀라시네. 식당 밥 삼 년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스킬인데.

“자, 이곳에 놓거라.”

“예.”

그대로 등을 돌리려다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테이블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리석으로 보이는 단단한 테이블은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한 번에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우와.”

테이블 가운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은 장식품이, 그리고 그 옆으로 화려한 꽃병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한쪽에는 장미가 다른 쪽에는 백합이 꽂혀 있었다. 자잘한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진 도톰한 벨벳 테이블 보도 너무나 근사했다.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엄청 비싸겠지? 그런데 음식을 흘리면 세탁이 곤란하겠어. 우리 식당에서는 무리야.

“뭐 해! 어서 나오지 않고.”

“앗, 죄송합니다.”

식탁 바로 옆 커다란 조가비 모양의 분수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회초리로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폐하 혼자 식사하신다고 했으니 식기는 이쯤이면 됐고, 너는 고기 훈제를 돕도록 해라.”

“예? 아, 예.”

훈제 고기. 떠올리기만 해도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연기로 오랜 시간 훈제한 고기는 별다른 소스나 감미료를 더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맛을 냈다. 잘 익은 고기를 떠올리는 순간 허기가 무섭게 치밀었다.

꼬르륵.

이 커다란 소리가 정녕 제 배에서 난 것인가. 부끄러움에 배를 가리고 주방 쪽으로 향하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가로막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멈칫 정지하며 바닥을 향해 있던 고개가 들렸다.

뭐지? 이 미남자는. 이제껏 그 어떤 영화나 미드에서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외모의 남자에게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체구가 아주 큰 편이었지만, 날렵한 턱선과 살짝 아래로 휘어 있는 눈꼬리 때문인지 거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백 금발과 대조를 이루는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제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아…….”

외마디 감탄사를 뱉은 안나가 그의 얼굴에서 조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딱 벌어진 어깨 밑으로 줄줄 매달려 있을 돌덩이 같은 근육들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무엄하다! 당장 비켜서라!”

미남자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바로 겁을 집어먹은 안나가 쭈뼛쭈뼛 몸을 물렸지만, 시선만은 미남자의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폐하. 전실로 모시겠습니다.”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발을 떼어 내려던 미남자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 조각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느껴지는구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남자의 손이 제 벨트 버클로 향했다. 정신이 팔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는데, 그가 별안간 날카로운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때는 오늘만큼 운이 좋지는 못할 거야.”

음산하게 깔린 낮은 목소리였다.

“가지.”

“예, 폐하.”

칼집에 칼을 꽂으며 뒤돌아선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는데, 귓가에 따가운 잔소리가 꽂혔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는 거야! 황제 폐하 앞을 가로막다니, 제정신이야?”

제 얼굴에 길게 머물던, 번뜩이는 칼날 같은 남자의 눈길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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