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74)
  • 74.

    시현은 무진의 웃음소리에 덩달아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앞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남에게 뭔가 지시하는 것만 익숙하던 무진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나무 그네를 뚝딱 만들어 낸 솜씨가 뛰어나서 놀라웠다.

    시현은 가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과 나무와 풀 냄새에 자연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바다를 가져올 수 없지만, 그와 함께하는 동안 바닷가에서 따스한 모래를 밟을 것이다.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기며 진짜 자연을 만끽하는 날도 있겠지.

    집에서 시간을 보내도 무진과 오붓하게 즐기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회사는 당분간 다닐게요. 홍선우 실장도 다른 비서가 들어올 때까지 부하 직원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

    “1년만 경력 쌓고 공부해도 돼요?”

    “다 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우와. 든든한 남편이 있으니까 천하무적이 된 거 같아요. 고마워요.”

    여러 일이 겹치면서 긴장한 시현은 인사이동에 잡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남편의 비서로 일하는 게 결코,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으며 투자 회사의 정보 관리에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늘 시현의 편이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왕 할머니하고는 여전히 사과를 받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그의 어머니만 고부 갈등을 해결하고 잘 지내고 있었다.

    시현은 무진의 곁에 남은 만큼 걸맞은 사람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 아내 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싶었다.

    행복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 

    신년 행사 이후 사직서를 제출한 채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에 출근하는 시현.

    구내식당에도 자유롭게 가고 홍선우 실장을 보좌하며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업무 중에도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사이 백야 그룹의 일로 출장 일정이 잡힌 무진은 시현에게 보물찾기를 권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에서 시현을 불러 업무 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현은 무진의 출장 가방을 챙기는 재미보다 약간 들떠서 말하는 그가 귀여웠다. 사장 집무실인데도 누가 볼 새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출장 가서 집을 비우는 동안 재미로 찾아보는 게임 같은 거지만, 장황한 설명에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보물찾기요? 소풍 가서 여기저기 선생님이 숨겨 놓은 쪽지를 찾는 것 말하는 거예요?”

    “비슷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소풍 가서 한 적 있어요. 미국에서는 아버지가 추수감사절에 세현이하고 나를 경쟁시키면서 보물찾기해 봤고요.”

    “재미있을 거야. 우리 같이 살면서 열흘 넘는 출장이 처음이라서 준비해 봤어.”

    시현은 장난꾸러기 같은 무진의 표정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나 혼자 찾는 거예요? 그 넓은 집에서?”

    “응. 집안에 다 숨겨 뒀어. 하지만 위험한 곳에 올라가지 말고 청소하는 분은 내일 오후에 올 거니까 구석구석 잘 찾아봐.”

    장난을 치는 듯 들뜬 무진의 목소리가 은근히 시현의 심기를 건드렸다.

    시현은 몇백 평이 되는 넓은 집에서 보물찾기하라는데 괜히 심술이 날 것 같았다.

    “그게 뭐예요. 줄 게 있으면 그냥 줘도 돼요.”

    “안 돼.”

    “뭐가 안 돼요? 보물찾기를 혼자 어떻게 해요.”

    “긴장 풀라는 거야. 어릴 적에 했던 걸 기억하며 찾아도 되고, 진짜 큰 상금을 노리듯 마구 헤쳐도 돼.”

    “으음…… 뭐, 무진 씨가 어마어마한 것을 준비했다고 생각하고 보물찾기해 볼게요.”

    시현은 무진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곰곰이 지난날을 되짚어 보았다.

    아버지가 뒷마당에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울퉁불퉁한 것을 만들어 꽝과 선물을 넣었던 게 생각났다.

    “높은 데는 없는 거예요?”

    “응. 당신 눈높이에 맞춰져 있어. 그러니까 잘 찾아봐.”

    “보물찾기에서 우승하면 상금이 있는 거고요?”

    “글쎄. 뭐 원하면 주고.”

    그의 집무실에서 오래 이야기할 수 없어서 시현은 입을 삐죽였다. 기필코 숨겨 둔 것을 찾아서 우승하겠다고.

    *** 

    그가 출장을 가고 시현은 퇴근해서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고 해서 정원을 배제하고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무진이 숨긴 보물이 어디에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겨우 몇 달 떨어져 살았는데 크고 널찍한 집에 혼자 있으니까 괜히 쓸쓸해졌다.

    “에이. 뭔 생각이야. 찾아서 우승해야지.”

    혼자 하는 보물찾기인데 많이 찾아서 이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시현은 1층 서재부터 응접실 등 집안을 둘러보면서 달라진 곳을 찾아보았다.

    응? 네모난 노란색 색종이가 붙은 곳이 있었다. 1층을 쭉 둘러보면서 다른 곳이라고는 색종이가 붙은 거였다.

    주방에 커다란 냉장고가 세 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만 붙은 색종이.

    보물찾기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너무 쉽게 보이는 색종이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 이게 보물찾기라고 한 거네.”

    노란색 색종이를 때고 문을 열었더니 시현이 좋아하는  케이크가 있었다.

    [오늘 먹어. 달콤한 남편이]

    케이크를 담은 투명한 뚜껑에 그가 쓴 메모도 붙어 있었다.

    “귀엽잖아.”

    시현은 보물찾기 중에 포크를 가져와서 냉장고 문을 열어 둔 채 케이크를 크게 잘라 한 입 먹었다.

    맛있다며 다시 크게 잘라 한 입 더 먹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주방을 나와 아까 보지 않은 1층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비싼 목걸이가 보였다.

    상자가 열린 채 문을 열면 바로 볼 수 있는 목걸이는 딱 봐도 값을 따질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불을 켜서 번쩍번쩍한 게 아니라 자체로 빛을 발산하는 보석이었다.

    “설마…….”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한 번 다이아몬드로 목이 무거워 봤으면 좋겠다고 장난으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저건 금고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가운데 자리를 잡은 투명하고 굴절에 따라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 크기는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게 얼마야. 미쳤나 봐.”

    목걸이 줄조차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

    목에 걸었다가는…… 목이 남아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온통 끌게 생겼다.

    가격을 물어보고 싶지 않을 정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보기만 해도 떨렸다.

    시현은 상자 뚜껑을 닫고 작은 방을 나왔다.

    서재를 다시 둘러보니 빨간색 색종이가 보였다.

    시현이 읽어 보고 싶다고 말했던 고서였다.

    원본에다가 고서라고?

    이건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버금가는 가격이었다. 아니, 돈이 있어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이기에 놀라웠다.

    어떻게 구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세계에서도 몇 권 없는 희귀하고 귀중한 책이었다.

    그냥 파는 곳에 가서 사 오는 물건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세계적으로 중요한 고서를 받을 줄이야.

    “정말 보물찾기잖아.”

    시현은 차마 고서를 만지지도 못하고 멍하니 책상에 올려진 책을 바라만 보았다.

    “그냥 지나가던 말로 한 건데. 바보.”

    진짜 보물찾기에 넘치는 그의 사랑에 시현은 정신이 없었다.

    보물이, 가치가 큰 물건이 사랑의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감동했다.

    방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가 있었다.

    시현은 떼어 낸 색종이를 차곡차곡 손에 올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멋들어지게 시현에게 선물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씩 나오는 것 같았다.

    과일이 듬뿍 들어가고 생크림이 살짝 묻은 케이크부터 귀여운 동물 모양의 커플 잠옷.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손에 넣을 수 없던 오래된 책까지.

    방문을 열 때마다 발코니, 테라스에도 시현이 갖고 싶었던 소소한 물건부터 값을 따지기 어려운 보물까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커플인 것을 티 내고 싶었던 시현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커플 잠옷과 티셔츠, 트레이닝복.

    분홍색 커플 양말까지 보자 시현은 감동해서 울컥했다.

    짧았던 결혼 생활을 아쉬워하는 것이 드러났던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남남이 되면 영원히 묻어 둬야 했던 사랑을 지킨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현은 더욱더 그를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노력하고 애쓰는 그에게 가끔 심술을 부리는 게 미안했다.

    무엇이든 맞춰 주며 늘 자신의 말을 들어 주고 편이 되겠다는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좋은 생각만 하기에도 부족했다.

    1층 주방부터 2층까지 집안을 둘러본 시현은 부부 침실 문에도 초록색 색종이가 있어서 문을 열었다.

    “바가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결혼했어도 그를 잘 몰라서 어색해서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바가지 긁는 마누라도 해 보고 싶다고.

    소크라테스의 악처는 아니어도 드라마 속의 남편을 들들 볶는 역할로 바가지 긁는 마누라가 되어 보고 싶다고 한 말조차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보물이 더 있었다.

    [품질 보증서]

    덩그러니 침대에 적힌 빳빳한 종이 옆에 색종이가 또 있었다.

    [품질 보증서. 이시현의 남편이자 연인인 강무진을 보증합니다. 하자 없는 물건으로 밤낮으로 이시현을 위해 일하며 평생 고장 나지 않을 사랑을 하겠습니다]

    [참고-반품 금지]

    시현은 메모를 읽고 나서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재미있으라고 준비한 보물찾기에서 진짜 보물은 강무진이었다.

    늘 시현의 편이고 귀를 기울이며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같았다.

    시현은 이제 무엇을 하든 겁이 나지 않았다.

    강무진과의 행복은 늘 자신에게 있었다.

    누구의 아내도, 이시현도 모두 강무진하고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였다.

    이제 두 사람의 시간은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질 것이다.

    시현에게 진정한 보물은 강무진을 사랑하는 거였다.

    “고마워요. 보물찾기.”

    <돌이킬 수 없는 사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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