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74)

73.

연말 행사에서 무진과 시현의 관계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그전에 홍보실을 통해 알린 것보다 파격 효과가 컸다.

시현과 무진은 관계를 재정비하듯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박 실장님. 백야 그룹으로 가는 거예요?”

“비서실을 총괄하게 돼서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일은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진하신 거죠? 축하드려요.”

“시현 씨도 조만간 백야 그룹에서 보게 될 텐데요. 회사에서는 동료로 대할 겁니다.”

“네! 실장님은 제 직속 상사잖아요.”

박 실장이 백야 그룹의 일만 맡게 되었다. 홍선우가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 비서실장으로 다음 달부터 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외부 일정이 많은 무진의 수행 비서는 체력이 기본이었다.

경호를 겸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선생님 타입의 박 실장과 다르게 홍 실장은 다부진 체형에 군인 타입이었다.

익숙한 사람하고 일하기를 바랐지만, 회사 일에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인수인계로 신입 비서로 몇 달을 일하며 지친 상태였다.

시현은 조심스럽게 박 실장한테 회사 내의 소문을 물었다.

“소문은 완전히 사라진 거죠?”

“유언비어로 업무에 지장을 주면 문책할 가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서 쏙 들어갔습니다.”

“실장님한테 묻기에 민망했지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어요.”

“사장님만 잘 휘어잡고 살아요. 궂은일이나 곤란한 건 사장님한테 미뤄요.”

“네! 실장님.”

시현은 남편이 인수한 회사에 채용된 비서였다.

남편하고 같이 일하는 게 장단점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점이 커질 거 같아서 걱정되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래도 늘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기에 박 실장의 따듯한 말이 위로되었다. 박 실장 밑에서 몇 달 일하면서 비서 경력에 도움이 되고 여러모로 좋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 

몇 달간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일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시현은 무진의 집을 공사하고 나중에 아이도 키울 수 있게 정원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이제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가 된 집에 왔다.

아주머니가 만든 자장면을 먹고 시현은 늘어지게 침대에 누웠다.

그는 야릇하고 열기를 담은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회사 일과 집 공사로 바빠서 손도 못 잡게 해서 짐이 정리된 날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불 끌까? 켜도 상관없지만.”

“피곤한데요.”

“짐도 정리했는데 이런 날 피하면 너무하지. 아, 시간을 아낄 겸 같이 씻을까?”

“머리를 감겨 줘요. 그건 허락해 줄게요.”

시현은 여러 일이 겹치면서 컨디션 난조로 힘들었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은밀한 시간을 원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씻는 것을 맡기겠다고 하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니 같이 웃었다.

그가 머리를 감겨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내가 다 귀찮다고 하는데 화 안 나요?”

“화낼 게 뭐가 있어. 네가 짜증을 부려도 다 받아 줄 거니까 눈치 보지 마.”

“정말 내 편만할 거예요?”

“강무진은 이시현 님의 편입니다.”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에 대답했다. 시현의 머리카락에 입맞춤하며 시현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그는 시현의 새하얀 몸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담은 눈빛으로 훑어 내려갔다.

뺨에 키스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솜사탕을 먹듯이 부드럽게 입술을 핥고 소중한 것을 다루듯 천천히 다가갔다.

뜨겁고 좋은 기억을 덧씌우게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강무진은 네 것. 이시현은 내 것.”

시현은 키득거렸다.

낯간지러운 말이 무진의 입에서 나오니까 어색하면서도 좋았다. 별것 아닌 말이 행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았다.

좋지 않은 기억을 털어 내고 서로를 아끼며 보상받는 기분.

타오르는 사랑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무진.

시현은 이제 어떤 역경이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욕실에서 씻고 나온 시현의 목욕 가운을 벗기며 무진이 중얼거렸다.

“예뻐. 눈이 부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시현은 자신을 탐하는 그를 바라보며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입술, 손끝에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언가 찾는 사람처럼 온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뜨거운 손길.

음미하듯 그녀의 몸을 스치며 지나가는 그의 입술에 달아올랐다.

“나한테 오빠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

“안 부를 거예요.”

“오빠가 어때서?”

“간질거리는 말 같아서 싫어요.”

그는 낮게 웃으며 거침없이 질주하려고 했다.

그의 입술이 닿으면 시현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함께하면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랑에 목마름은 서로를 끝없이 갈망하게 했다.

시현과 무진의 은밀한 몸짓은 활활 타올랐다.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그녀의 손톱이 그의 어깨에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거칠지 않은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그와 하나가 되어 갔다.

서로를 탐하고 채워 가며 녹아들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다 해 줄게.

겁내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해.

이 말보다 달콤한 유혹은 없으리라.

신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이지만 색다른 미래가 둘에게 펼쳐질 기대감도 커지고 있었다.

그는 눈부신 미소처럼 아름다운 굴곡을 가진 시현을 뜨겁게 바라보았다. 침대에 팔을 짚고 머리를 숙여 입술을 내렸다.

간질거린다며 키득거리는 시현.

달콤한 시현을 맛보겠다며 품으로 끌어안아 키스를 퍼붓는 무진.

“힘들지 않아요?”

욕망을 드러내며 불꽃을 끄지 않으려는 그에게 물었지만, 만류할 수 없었다.

강렬한 그의 눈빛에 시현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입술이 곳곳을 탐방하듯 스쳐도 시현이 달뜬 신음을 참자 귓불을 깨물어 버린 무진.

“앗. 정말.”

“느끼는 것을 감추지 마. 네 소리는 그 어떤 것도 날 미치게 하니까.”

서로가 어떤 감각을 줄지 알기에 기대감으로 눈빛이 열기로 물들었다.

거침없이 무진의 손은 탐험가처럼 시현의 몸을 누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섬세하게 시현을 탐하다가 점차 거칠어졌다.

시현의 입에서 들뜬 신음이 흘러나오고 짜릿한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는 그녀를 탐하는 걸 멈추지 않는 것도 사랑의 일부라고 속삭였다. 발전되지 않는 건전지도 아니고 시현은 밤새 무진에게 붙들려 있었다.

기운이 없고 졸려서 눈이 감기는데도 팔팔한 그를 보니 시현은 어이없기도 하고 놀랍다며 무진을 놀렸다.

마주 보는 시현과 무진의 몸과 마음은 진정한 하나였다. 상처 입히지 않고 서로가 통하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정신없이 밤새 사랑을 외치며 시현의 눈에 희열이, 온몸에 열화가 새겨졌다.

부부의 연은 전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그의 말처럼 그곳에서의 만남이 운명이었나 보다.

시현은 사랑을 찾아 꿈이 아닌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의심하고 그를 떠나 오해 속에서 몸부림치던 날을 후회했다. 몇 달 동안 시현에게도 좌절을 느끼게 했으니까.

이제는 서로를 치유하고 안락함을 함께 가져간다.

몇 달간 많은 일이 벌어지고 다투고 사랑을 깨달은 것처럼 서로에게 미친 시간이었다.

늦은 오후에 눈을 든 시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매일 일하다가 맞이한 일요일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내부 공사가 다 끝난 보금자리의 침실에서 커튼을 젖히자 정원에 나무 그네를 만드는 무진이 보였다.

시현은 그를 보니 함께 사는 게 실감이 났다.

신혼처럼 함께하는 게 이렇게 행복함을 주는 거였나.

오피스텔에서 가져온 짐은 별것 없었다. 옷 가방 두 개와 자질구레한 물건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즐겁고 재미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이틀 휴가를 내서 그에게 잡힌 시간이 많아져 휴식보다는 사육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고 즐거웠다.

미국에서 결혼하고 신혼을 즐길 때는 각자 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시현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백야 그룹의 일을 하고, 시현은 졸업을 앞두고 논문에 한국에서 정착할 동생 뒷바라지에 바쁜 일상이었다.

어떤 날은 즐겁다가 어떤 날은 마음의 여유가 없고 불안감에 예민해져서 날카롭게 그를 대하기도 했다.

그도 오랜 출장을 다녀와서는 시현에게 까칠하게 굴었다.

“속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랬나 봐.”

정원 나무에 그네를 만드는 그를 바라보며 시현은 여유를 느끼는 게 달라진 것 같았다.

“저런 건 또 언제 배웠대.”

아이도 없는데 벌써 나무 그네를 만드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그가 무언가 기대하는 듯했다.

시현은 침실 발코니에 서서 무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어났어?”

“늦잠 자니까 좋아요.”

그가 시현을 향해 양팔을 흔들며 야외 테라스로 오라고 손짓했다.

“내려갈게요.”

테라스에 준비된 점심에 시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는 동안 아주머니가 프랑스식 브런치를 만든 모양이었다. 향긋하고 달짝지근한 커피 향에 눈이 번쩍 떠졌다.

오렌지를 직접 즙을 낸 신선한 주스에 크루아상도 주방에서 구웠는지 따듯하고 버터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연어 오믈렛에 먹기 좋은 과일도 흰색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언제 이런걸. 아주머니가 힘드시겠어요.”

“주방에 사람을 더 채용하라고 했어. 우리 아이들까지 챙겨 주시겠다고 하셨어.”

“아직 있지도 않은 아이까지 챙겨 주신대요?”

“어. 당신 좋아하는 것만 하겠다고 말씀하시더라. 아, 요구르트에 과일을 섞어 먹어도 된대.”

“너무 푸짐한 브런치 아니에요? 저녁은 또 어떻게 먹죠.”

주스를 마시고 크루아상에 사과잼을 발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갓 구운 빵이 잼에 섞여 입 안 가득 고소함과 달콤함이 번졌다. 오믈렛의 달걀이 부드러워서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매일 이러고 살면 안 되겠지?”

커피를 마시며 불쑥 묻는 그의 말에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고먹을 만큼 돈도 있는데 매일 이러고 사는 거 어때?”

그가 똑같은 말을 다시 물었다.

“일해야죠. 일하는 무진 씨가 멋져 보였어요. 돈도 벌고.”

“마누라가 돈 벌어 오라고 하면 벌어야지. 얼마나 벌면 쉬게 할 건데?”

짓궂게 말하는 그에게 팔짱을 끼고 시현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하늘만큼 땅만큼?”

하하. 테라스에서 시작된 웃음이 집안에 스며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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