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74)
  • 72.

    시현은 행복도 스스로 원해야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무진을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에게 버림받은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왕 할머니를 그와 싸잡아서 오해를 키운 것이었다.

    그가 붙잡아서가 아니라 자신 또한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무진 씨.”

    “어.”

    “사랑해요.”

    “어. 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현에게 다가가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타인에 의해 깨질 결혼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했다. 시현은 서로 놓지 못한 부부의 연을 생각하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무진 씨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 몰라요. 하지만 사랑하고 있어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시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말을 덧붙었다.

    “흥미를 잃은 장난감은 망가뜨린다는 왕 할머니의 말을 왜 믿었는지 모르겠어요. 무진 씨의 장난감이 되기 싫어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는 왕 할머니가 시현을 떼어 놓으려고 한 말을 이제껏 몰랐던 것 같았다.

    “그걸 믿었어?”

    “우리 첫 만남을 생각해 봐요. 수시로 바뀐 여자와 식사하러 마틴의 레스토랑에 왔잖아요. 그걸 겹쳐서 생각하니까 할머니 말이 맞는 거 같았어요.”

    “미안해.”

    “잘 살아 봐요.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웃는 무진이 갑자기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고전의 방식대로 프러포즈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시현의 손가락에 입맞춤했다.

    “사랑해.”

    “사랑해요.”

    시현이 똑같이 무진의 손가락에 입맞춤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 

    진보라는 아버지한테 크게 야단맞았다.

    백야 그룹과 척지게 생긴 아버지한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중소업체 사장인 아버지는 백야 그룹에서 눈 밖에 날까 봐 딸의 실수를 덮기에 급급했다.

    월가에서 능력을 발휘하다가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일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진과의 인맥도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며 다투기까지 했다.

    무진의 회사에서 쫓겼다는 말이 친구들한테 알려지자 진보라는 시현을 탓했다.

    딸이라서 아버지한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진보라는 백야 그룹에서 임원 자리까지 놓치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10년 넘게 친구로서 무진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다.

    백야 그룹에서 자리 하나 얻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행동이 삐뚤어졌다.

    진보라는 무진이 자신을 내쫓을 때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라면 줄을 잘 서야 했다고.

    그의 곁에 있는 시현을 해코지하며 우정을 더럽혔다고.

    허망한 말을 무진에게 들었다. 하지만 백야 그룹의 입성은 그의 할머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진보라는 정 비서를 만나서 지금이라도 시현을 치워 버리면 백야 그룹의 지분과 임원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며칠 전에 무성한 소문을 잠재우듯 TS 투자 자산 운용사 홍보실에서 무진의 결혼을 공표했다.

    생각지도 않게 강무진과 이시현의 결혼 이야기가 알려졌다. 그리고 이시현의 채용 공고는 투명하게 진행된 것을 성적, 면접 등 공개되었다.

    진보라는 스카우트된 상태였기에 농락당했다고 분노했다.

    “왕 할머니가 원하는 것만 하면 돼. 치우면 되는 거잖아.”

    소문을 터뜨리고 무진의 어머니한테 익명으로 남자가 꼬였다는 사진을 보냈다. 천박한 장소연을 비서로 들여서 시현을 치우는 일에 일조했는데 진보라는 손해만 보고 있었다.

    “반반한 얼굴로 남자나 후리는 주제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진보라는 미국으로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왕 할머니가 제공한 호텔 펜트하우스에 계속 입수되는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다.

    지금껏 능력대로 살아온 진보라는 하찮은 이시현 때문에 중요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진보라는 왕 할머니가 지시한 것을 곱씹으며 무진이 앞뒤 분간을 못 하는 것을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하찮은 애를 왜 못 버려서 이 사달을 만드는지.”

    잘못된 성공에 관한 가치관은 시현을 치워 버려야 하고, 수모를 당한 것에 분풀이까지 해야 속이 풀릴 듯했다.

    며칠 후, 진보라는 은행에서 현금 3억 원을 찾았다.

    골프 가방 크기의 여행 가방을 구매해서 현금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시현의 연락처를 찾아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할 말 있어요. 시현 씨 집 앞 공원에서 봐요

    강무진의 결혼을 발표했어도 시현이 오피스텔에서 출근하는 것을 알아내고 두 사람이 왕 할머니를 속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 할머니가 여전히 시현을 치워 버리려고 자신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믿었다.

    오피스텔 근처에 큰 공원이 있었다.

    밤늦게 공원으로 불러내서 따끔하게 한마디하고 먹히지 않으면 분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진보라는 은행에서 찾은 3억 원이 든 여행 가방을 끌고 공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돈은 맷값이나 위로금이 될 수 있었다.

    그 몫은 이시현의 선택에 따른 거였다.

    *** 

    공원에서 시현을 기다리는 진보라는 아버지와 무진이 경고한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공원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어서 의자에 앉은 진보라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표정 관리를 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나요?”

    대뜸 시현이 용건을 물어보자 진보라는 콧방귀를 꼈다.

    “뻔뻔한 건 익히 알았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거 몰라?”

    “진보라 씨 왜 불렀냐고요.”

    시현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무진이 할머니가 널 치워 달래. 이 세상에서 안 되는 걸 붙들고 있는 시현 씨가 불쌍해.”

    “도대체 왕 할머니가 뭘 해 준다고 우정까지 저버리는 건데요?”

    시현의 말이 진보라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실실 웃던 진보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얼굴이라도 내리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행 가방을 시현에게 밀었다.

    “가져. 더 달라고 하면 마련해서 줄게. 제발 내 앞길 막지 말고 무진이를 백야 그룹과 할머니한테 돌려줘.”

    “진보라 씨.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현은 진보라의 연락을 받고 그래도 무진의 친구이고 자신하고 아는 사이라서 사과라도 하는 줄 알았다.

    역시 왕 할머니의 사주를 받고 돈까지 준비한 것이 기가 찼다.

    시현과 진보라 사이에 여행 가방만 덩그러니 놓였다.

    진보라가 한 발짝 다가와 시현을 노려보았다.

    “네가 다 자초한 거야. 왜 내 앞길을 막아!”

    핸드폰을 쥔 손을 들어 때리려는 진보라를 밀친 시현이 뒤로 물러났다.

    진보라는 밀쳐져 휘청이다가 핸드폰을 놓치고 중심을 잡고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크게 휘저으며 시현의 뺨을 갈겼다.

    짜악- 인적이 드문 공원에 소리가 울렸다.

    시현은 가만히 맞지 않고 반격하며 똑같이 진보라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악!

    “너 뭐야! 감히 날 때려?”

    “네가 먼저 때렸잖아!”

    “넌 맞아도 싸! 돈 많은 남자 유혹해서 한 몫 챙겼으면 떨어질 때도 알아야지!”

    “왜 없는 말을 만들어!”

    야! 왜! 유치한 말이 나오고 때리려고 덤비는 진보라를 이리저리 피하는 시현.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며 손톱을 세운 진보라에게 당하지 않으려는 시현은 순식간에 몸이 뒤로 붕 떠서 놀랐다.

    지나가던 사람인지 정장을 쫙 빼입은 여자가 시현을 진보라한테 떼어 놓았다. 그리고 바로 발버둥 치는 진보라를 한 손에 제압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너무 놀란 시현에게 여자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사장님이 곧 오실 겁니다.”

    사장님?

    공원에 몇몇 있는 사람들이 세 여자를 힐끔거렸다. 시현은 놀라서 눈만 깜박이고 날렵한 여자한테 제압당한 진보라는 소리를 질러 댔다.

    “쌍방 폭행이라도 먼저 손을 올린 진보라 씨가 불리합니다. 조용히 있으세요.”

    여자의 말에도 진보라는 소리를 빽빽 질러 댔다.

    “네가 뭔데 명령이야! 이거 안 놔!”

    진보라가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며 시현은 속에 담아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게 돈 때문이었어요? 아니 백야 그룹 때문인가?”

    “네가 내 앞길을 막잖아. 난 무진이랑 백야 그룹에서 재계에서 획을 그을 사람이라고! 너 같은 게 뭘 알아!”

    “그런 심보로 뭘 해? 제정신이야? 앞길을 막는 건 미친 너야. 내가 아니라고!”

    시현은 폭발해 버렸다.

    진보라가 위협되지 않았다. 무진의 친구라서 진보라의 기분 나쁜 행동을 무시해 왔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만날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쯤에서 끝낼 방법이 사과라고 생각했다.

    진보라가 앞길을 막는다고 하는 이유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무기로 폭력을 쓰려고 한 것은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뭐 내가 미쳐?”

    “그럼 이게 미친 짓이지 정상이야?”

    “무진이는 백야 그룹에 있어야 해. 너만 아니면 나랑 같이 백야 그룹에…….”

    진보라는 공원 입구에서 강무진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온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거 놔! 놓으라고!”

    최후의 발악인지 공원에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다가 팔이 풀리자 냅다 도망을 쳤다.

    강무진이 경찰보다 무서운 존재였는지 뒤로 돌아보지 않았다.

    공원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 빠져나가려다 미쳐 난간을 보지 못하고 충돌했다.

    쾅- 쾅- 공원 난간이 휘어질 정도로 세게 차가 박혔다.

    액셀러레이터를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짧은 거리에 속도가 줄지 않았다. 급하게 빠져나가려고 안전벨트를 안 해서 충돌로 에어백이 터졌다.

    진보라는 잘못된 순간의 선택으로 얼굴과 팔, 목을 심하게 다쳤다.

    경찰을 부를 새도 없이 진보라는 이후 병원에 오래 입원하게 되었다. 끝내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고 다친 것도 시현을 탓하며 원망을 쏟아 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진보라는 자신의 우월감에 빠져 우정과 욕망의 한 끗을 잘못 판단한 거였다.

    능력이 있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책하며 망쳐 온 거였다.

    이후 아버지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다시 자리를 잡느라 고군분투한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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