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74)
  • 71.

    그는 시현의 달뜬 신음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로를 탐하는 것은 열화와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열화에 휩싸인 시간을 보내고 지쳐 잠든 시현의 얼굴을 만지는 무진.

    그는 시현의 눈에 눈물이 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손님에게는 친절한 미소를 보였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표정이었던 시현이 웃던 날.

    자신만을 바라보며 눈부시게 웃던 시현이 떠올랐다.

    그는 팔을 베고 자는 시현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어긋난 관계를 돌려놓고 최고의 남편이 되리라.

    상처 주지 않을 것이고 가족으로부터 받은 아픔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하겠다고 속삭였다.

    그는 허전함을 채우려는 듯 시현을 품에 가두었다.

    *** 

    세현은 군에 면회를 온 사람 때문에 누나가 걱정돼서 휴가가 생기자마자 나왔다.

    2박 3일 휴가에 면회를 온 사람을 찾아보았다.

    누나와 결혼한 상대를 알고 돈을 목적으로 군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세현은 마트에서 잔뜩 장을 봐서 누나가 알려 준 오피스텔에 왔다.

    볶음밥이나 해 주고 데워 먹기 좋은 음식을 몇 가지 만들 생각이었다.

    “뭐야. 이 비싼 요리는.”

    냉장고에 반찬이 가득한 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실과 거실 겸 주방이 구분되어 있어서 침실 쪽은 보지도 않고 1인용 소파에 앉아 조용히 TV를 켰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집이 너무 고요해서 누나가 없는 줄 알았다. 연락해도 답장이 없어서 주말에 회사에 간 줄 알았으니까.

    갑자기 침대와 거실을 구분하는 가림막 사이로 사람 형체가 보여서 세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진은 블라인드가 제대로 내려오지 않아 강한 빛에 잠에서 깼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시현을 탐하고 안았더니 뭔가 개운한 기분이었다. 샤워하고 처남 것 같은 바지를 찾아 입고 가림막을 옆으로 밀었다.

    리모컨을 들고 있는 세현이가 보였다.

    “처남.”

    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세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뭡니까? 재벌 3세가 누나를 버린 것으로 아는데 여기에 왜 있습니까?”

    “누나가 뭐라고 했든 사실 아니야.”

    “뭐가 사실이 아닙니까? 재벌 3세? 누나를 버린 것?”

    무진은 예상치 못한 처남의 방문에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재벌 3세든 버렸다는 말을 세현이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사실 아니야. 누나하고 내 문제가 조금 복잡한 거니까 처남은…….”

    “어머니라는 사람이 군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재벌 3세를 잡아서 한 몫 챙겼으니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요. 그 여자가 어떻게 날 찾았는지 몰라도 그쪽 집에서 누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면서요.”

    “누굴 만나?”

    “누나하고 제 문제니까 그쪽은 빠져요.”

    무진은 웃통을 벗고 바지도 처남 거라서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은 게 걸렸다. 진지한 대화를 하기에 잠든 시현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누나와 내 일이니까 빠질 수 없어. 처남한테 다 말해 줄 테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는 누나한테 들을 거니까 빠지라고요.”

    “처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시현이와 나는 부부이고 어려운 일도 같이 해결할 사이야.”

    세현이 무진의 말에 입만 뻥긋거렸다.

    “시현이가 어떤 설명도 안 했을 거야. 그리고 알려 주지 않을 거고. 내가 설명할 테니까. 어머니를 어떻게 만났는지 말해 봐.”

    무진은 조용하던 백혜련이 군에 있는 세현을 찾아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군 복무 중인 세현이 시현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고, 할머니조차 세현을 건드리면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결혼의 당사자 외에 다른 가족을 건드리는 게 악질이어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제 대학 친구를 앞세워서 찾아왔어요. 누나는 면회 올 시간이 없다고 했고 나도 누나를 힘들게 한 게 있어서 휴가도 친구들하고만 보냈어요.”

    “처남한테 뭐라고 했는데?”

    “매형이 백야 그룹 후계자고. 누나하고의 결혼은 무효니까 주는 돈 받아서 떠나라고 하던데요.”

    엄마라는 인간이 몇십 년 만에 만난 자식한테 떠나라고?

    정말 끔찍하고 소름 돋는 말이었다.

    “백야 그룹하고 관련이 있지만, 결혼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누나를 가지고 논 겁니까?”

    “그렇지 않아. 집에 문제가 있지만 다 해결했고 누나하고는 좀 다툰 것뿐이니까 처남이 걱정할 거 없어.”

    “그 말 믿어도 됩니까? 그 여자 말로는 누나가 돈도 받았고 매형하고 이혼한다던데요.”

    무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혼할 부부가 이런 모습은 아니지. 안 그래, 처남?”

    “오피스텔에서 사는 겁니까? 부자라면서?”

    “오해야. 누나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버텨서 이렇게 된 거지. 처남이 제대할 때 전부 원상 복구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누나 눈에 눈물 나면 매형이나 매형 집에서는 피눈물 나게 할 겁니다.”

    “휴가 나온 거면 용돈 필요하지? 친구들하고…….”

    “됐습니다. 누나가 제 용돈은 늘 넉넉하게 챙겨 줘요. 그리고 군인이 뭔 돈을 씁니까.”

    무진은 머쓱하게 세현을 쳐다보다가 가림막을 힐끔거렸다.

    바지만 겨우 걸친 모습에 처남하고 시현의 사이에 서 있는 게 몹시 부끄러웠다.

    알 것 다 아는 성인이고 부부이지만 처남하고 마주하기에는 볼썽사나워 보일 게 뻔했다.

    “저는 가 볼 테니까 누나나 신경 써요. 자세한 건 나중에 들을게요.”

    “어, 그러겠어? 곧 제대하지?”

    “몇 달 안 남았습니다. 누나한테는 저 왔다가 갔다는 말도, 그 여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세요. 걱정할 거예요.”

    “알았어.”

    “누나한테 주방 맡기지 말고 사 온 재료는 매형이 알아서 해요. 갈게요.”

    오피스텔 문이 닫히고, 처남이었지만 엉뚱하게 마주쳐 식은땀을 흘린 무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주방 냉장고 앞으로 갔다.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가서.”

    엄마를 군 면회에서 봤을 세현이 걱정되었다.

    시현조차 백혜련을 마주했을 때 크게 동요하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무진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단숨에 마셨다.

    “하- 소문은 잠잠해졌는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진은 잠든 시현 쪽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시현이 떠날 테니까.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

    소문은 화력이 없으면 떠들던 사람들이 흥미를 잃게 되었다.

    시현에 관해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사장이 신입 비서한테 관심이 있다니까 화력이 사그라들었다.

    시현은 끝내려고 마음먹어도 무진의 앞에서는 사랑을 선택했다.

    그를 보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으니까.

    정 비서가 찾아오지 않는 게 무진의 집안일을 해결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복잡한 머릿속은 해결 방법을 찾느라 모든 게 뒤섞이는 듯했다.

    혼인 중이니까 강무진이 남편인 것은 사실이나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도 꼬리가 붙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시현은 장소연처럼 돈 때문에 해코지하는 사람이 나았다.

    이유가 분명해서 대처할 기회가 생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보라 본부장처럼 무진을 이용하려는 게 불분명한 사람은 대처할 수 없었다.

    “사과는 받고 싶었는데.”

    회사에서의 소문이 장소연과 진보라 본부장의 합작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단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보다 그래도 진보라 본부장은 무진의 친구이고, 자신하고도 아는 사이였다.

    친구라는 껍데기를 쓴 진보라 본부장이 한 짓 때문에 허탈하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묻고 싶어. 이유가 뭔지.”

    시현은 타인에 의해 헤어지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사랑할 땐 행복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느껴졌다. 결혼해서 투덕거리는 것도 여느 부부나 연인이나 똑같았다.

    장난스러운 프러포즈에 무진이 주말에 한 말이 겹치면서 시현은 생각이 많아졌다.

    바라던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움직여서 잡아야 했다.

    사과받고 싶은 장소연과 진보라 본부장의 거취는 모르지만, 무진이 있어서 견딜 만했다.

    왕 할머니를 평생 안 보고 살 것인가. 그의 가족이기에 사과받기 전에 용서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고민하던 시현은 박 실장이 무진의 집무실에서 나오자 눈치를 살폈다.

    “실장님. 사장님께 드릴 말이 있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바쁘지 않으니까 들어가 봐요.”

    “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시현은 마음이 결정되었을 때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박 실장한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시현은 그의 집무실에 노크하고 들어갔다.

    어느덧 시현은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띠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슨 일이야?”

    시현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을 고민한 게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사적인 얘기를 해서 안 되지만 할 말이 있어서요.”

    “회사라고 일 얘기만 하면 따분하지. 앉아서 얘기해.”

    그가 북미산 원목에 특별한 구조인 책상에서 일어섰다.

    모던하게 꾸며진 사장실은 업무에 최적화되어서 테이블과 소파가 감각적이었다.

    시현은 그가 손짓한 자리에 앉았다.

    인연이 닿는 만남.

    시현은 무진과의 첫 만남이 별로였지만 결혼할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린 적이 없었다.

    미국을 떠나 한국에 숨어들면서도 그에게 어떠한 설명 없이 이혼 합의서만 던져 놓고 집을 나왔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조차 어디로 가서 숨을지, 어떻게 끝낼지 그것만 고민했었다.

    사랑의 끝이 결혼이 아니지만 만남과 결혼이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을 흔들었다.

    시현은 좋지 않은 일, 불편해지는 상황을 피하는 방법으로 험악한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왔다.

    즉흥적인 결혼도 무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랑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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