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74)
  • 70.

    시현은 혼자 밥 먹는 게 익숙하고 요리를 못 했다. 시장에서 반찬을 사 오면 하루는 반찬과 국에 밥을 먹고 주말이 되면 반찬을 한 곳에 전부 넣고 비빔밥을 주로 해 먹었다.

    계란 후라이도 모양이 잡히지 않아 늘 만들어진 계란말이를 사 와서 곁들였다.

    “아주머니가 맛있는 거 많이 했다면서 같이 좀 먹자.”

    “진짜 왜 이래요?”

    “배고파서.”

    시현은 버티다가 한숨을 내쉬고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냉장고 앞에 섰다.

    “내가 차릴게. 식탁에 앉아 있어.”

    “여기는 내 집이에요. 무진 씨가 휘젓고 다니면…….”

    “주방에서는 손이 느리잖아. 내가 빨리해서 먹는 게 나아.”

    밥상도 못 차린다고 구박하냐고 말하려다가 시현은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고슬고슬한 흰쌀밥과 잘 익은 배추김치에 전복과 새우장, 한우 불고기를 꺼내 굽는 걸 보고 있었다.

    시현은 군침을 삼키며 상이 차려지길 기다렸다.

    “주말마다 이러고 있어도 돼요?”

    “괜찮아.”

    “박 실장한테 일을 다 맡겨 놓고 무진 씨만 쉬는 거 아니죠?”

    “일보다 네가 중요해. 널 보는 게 급한 거라고.”

    “박 실장이 일당백이라서 이러는 거잖아요. 나 때문이 아니라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죠.”

    시현은 콧방귀를 뀌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듯 고슬고슬한 흰쌀밥만 쳐다보았다.

    ‘집에 이런 그릇이 있던가.’

    가전제품은 오피스텔에 딸린 것이고 그릇은 혼자 쓰기에 적당한 것만 몇 개 샀다.

    ‘아주머니가 음식도 해 주고 그릇도 놓고 가셨나 보네.’

    음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거지만, 재벌 3세의 식사를 신경 쓴 듯했다.

    시현은 구수한 된장찌개를 뚝배기에 끓여서 식탁에 놓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자꾸 찾아와서 사람을 흔들어 댈까.

    회사에서도 눈치를 보게 하고 박 실장은 은연중에 무진을 봐주라고 하는 듯했다.

    끝이 보이는데 굳이 주말마다 얼굴을 마주하며 밥을 먹는다고 달라질까.

    시현은 1년만 다니고 전공을 살려서 다른 일을 할 계획을 세웠다. 동생의 군 제대와 복학 등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녔다.

    “계약 종료처럼 우리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해요.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지 말고요.”

    “정리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이게 무슨 정리예요?”

    “널 놓지 않아. 네가 내 곁을 떠나는 일은 없겠지.”

    하- 밥 먹는 동안 입을 다무는 게 나겠다.

    시현은 반복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1인용 식탁을 다 차지한 요리를 맛보며 무진을 힐끔거렸다.

    고요한 게 오히려 불안감을 조장한다는데, 그는 소문과 왕 할머니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현은 사과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 이렇게 조용한 게 긴장되었다.

    돈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주무르는 왕 할머니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은 장소연과 진보라 본부장이 그녀가 집을 나설 때마다 따라올 것 같은 느낌도 지우지 못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빌미로 자신을 옭아맬지도 모른다.

    시현은 밥도 그가 차리고 좁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그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새벽에 아주머니가 사다 놓은 건가.

    한라봉을 먹기 좋게 접시에 담는 무진.

    그가 돈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았지만 재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주 가끔 그의 소탈한 행동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내며 가진 것을 티 내지 않았다.

    계약을 제안할 때 빼고.

    계약금 5천만 원과 데이트할 때마다 1천만 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금하는 걸 보았다.

    애인 대행 같은 것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하지만 과하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고 그가 돈이 많아도 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줄 몰랐다.

    백야 그룹이라니.

    시현은 삶을 흔들어 대는 일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뜻대로 좋은 집안에 돈도 많은 여자하고 결혼하는 게 좋지 않아요?”

    쓸데없는 말로 그를 공격해 보았다.

    “서른 넘은 성인이야. 여자를 만나든 결혼하든 누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리고 착각하는데 나 유부남이야.”

    “곧 이혼남이 되겠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난 너만 있으면 회사 경영도 더 잘할 수 있어. 백야 그룹을 버리라고 하면 지분을 전부 처분할 거야.”

    “날 협박하는 거예요? 백야 그룹 망한다고?”

    “나만 보라는 거야. 나 강무진을!”

    시현은 더는 말을 섞기 싫어서 일어서려다가 무진이 잡아당겨 품에 안겼다.

    이렇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두는 거였다.

    시현은 몸을 버둥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놔요. 이러지 마!”

    “자꾸 벗어날 궁리만 하고 날 괴롭히면 먹어 치울 거야.”

    “뭐라고요? 이런다고 내가…….”

    “시현아. 사랑해.”

    장난 같은 고백을 들을 때마다 시현은 움찔거렸다.

    “팔이나 풀어요.”

    일단 떨어져 앉자고 말하며 버둥거렸다.

    꿈쩍하지 않아서 그의 어깨를 치고 몸을 비틀었는데 어째서 그의 다리 위에 앉은 모습이 되었다.

    무진이 손을 뻗어 시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돈 많고 재수 없는 남자지만 좋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넌 나를 보면 늘 웃었어.”

    “…….”

    “버림받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는 나 좀 봐 줘. 전처럼 날 보고 웃어 주라.”

    그가 뺨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하자 시현은 흡-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삼켰다.

    “널 놓을 수 없어.”

    그는 시현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끝으로 목선을 더듬다가 몸을 숙여 티셔츠에서 드러난 쇄골에 입맞춤했다.

    그의 손길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려는 시현.

    힘들었던 것은 무진을 피해 한국으로 숨어들 때였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입사 지원서를 넣은 회사에서 합격했다고 연락을 받고 새로운 삶이 평탄해지길 바랐다.

    그의 어머니 앞에서 창피를 당한 걸 떠올리면 그가 찾지 못하는 곳에 가서 숨고 싶었다.

    왕 할머니가 돈 봉투를 줄 때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하고 행동했으면 달라졌을까.

    사생활이 난잡하게 헤쳐지고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지경까지 끌고 오지 않았을까.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면 끝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사랑해.”

    다시 무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시현의 턱을 집고 살짝 들어 올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시현의 눈가에 입맞춤했다.

    “시현아. 난 너 없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아.”

    “무진 씨.”

    “버리지 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로는 절대로 안 되는 사이라는 것.

    가족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과연 그와 결혼을 정리하고 안 보고 살면, 그리움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증거만 확실하면 할머니도 처벌받게 할 거야. 날 믿어 주고 떠나지 마.”

    시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여기까지예요.

    이별이 아픈 것은 잠깐만 참으면 돼요.

    상처를 보듬어 주고 무진 씨를 사랑할 여자는 얼마든지 있어요.

    나와는 이별이고, 가족을 버리지 말아요.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가 사랑 타령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가 진심인 것 같았다.

    시현의 마음이 그의 말에 쿡쿡 쑤셔 댔다.

    엉망진창인 관계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회복되어 행복한 부부가 되긴 하는 걸까.

    시현은 무진의 곁에 남을 수 없었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무진 씨 우리가 착각하는 거라면 어떻게 하죠? 왕 할머니의 반대에 단순히 타오르는 거면 어쩔 거예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착각할 수 없어. 할머니의 반대에 타오른 감정이 아니야.”

    “가족을 등지면서 사랑을 택한다고요? 그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네가 내 심장이니까. 가치를 어떻게 따져.”

    깊은숨이 흘러나왔다.

    시현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무시와 경멸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자신을 낳아 준 엄마까지 왕 할머니한테 포섭되어 내쫓으려고 발악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결혼을 망친 잘못은 그가 아닌 자신에게 있었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시현은 하고픈 일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 시간을 좀 더 가져 봐요. 우리 사이가 돌이킬 수 있는지. 끝내지 않아도 되는지 말이에요.”

    “그래. 뭐든지 급하게 결정할 필요가 없지.”

    “그런가요.”

    “마음껏 사랑하리라. 어때?”

    한발 뒤로 물러나자 기뻐하는 무진과 다르게 시현은 흔들리는 마음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다시 끌려가고 있었다.

    혼인을 유지한 채 부부로 사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껏 사랑하는 게 아니라 차츰 서로에 대한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로 시간을 끄는 거였다.

    어쩌면 그의 비서를 그만둘 때쯤 정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매달리는 상황이어서 얼떨결에 받아 주지만, 해결된 게 없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시현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시현아. 사랑해. 이제는 다 표현할게.”

    그는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뜨겁고 은밀한 손으로 그녀를 어루만졌다.

    사랑을 원하는 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오히려 시현을 애타게 하고 있었다.

    서로를 길들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듯이 각인되어 어느새 동화되어 갔다.

    의자에 앉아 거침없이 탐험하다가 유리그릇을 만지는 것처럼 그는 떨고 있었다.

    “이러는 건 좀…….”

    “우리 결혼해서는 이것보다 더했어. 눈만 마주치면 식탁이든 소파든, 발코니든 상관이 없었잖아.”

    “언제 그랬다고. 흡.”

    시현의 숨결이 탁해졌다.

    점점 무진의 손길에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야하게 속삭였다.

    “넌 정말 맛있다니까”

    시현의 숨결이 탁해졌다.

    붕 뜨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점점 집요하게 변하는 무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런 말은 좀 하지 마요.”

    “맛있는 걸 어떡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시현에게 입맞춤하며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금세 후끈 달아오르는 두 사람의 열기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

    어두운 밤이 오기 전까지 탐하고 소로의 숨결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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