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74)
  • 69.

    입술을 달싹이던 시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무진 씨의 가족이에요. 장소연은 돈이 필요했을 거고 진보라 본부장은 뭔가 바란 게 있었겠죠. 이쯤에서 그만 해요. 난 백야 그룹과 무진 씨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요.”

    덥석 손을 잡고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그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시현은 사장과 신입 비서, 이제 결혼까지 정리할 사이에 일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곧 제대할 동생하고 한국에서 정착해서 살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어긋난 사이에 대화로 풀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한 달의 공백이 왜 생겼는지 그는 모르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하필 그가 인수한 회사에 들어갔을까.

    그를 떠날 수 있는데 왜 허울뿐인 부부 관계를 뭉그적거리고 있을까.

    시현은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온 날부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고 했다.

    “처음부터 맞지 않은 자리였어요. 내가 무진 씨를 욕심내지 않으면 더는 이런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요.”

    “내가 널 갖기를 원해. 내가 널 욕심 내는 거라고!”

    “내가 무진 씨를 버렸어요. 돈 받고 강무진을 버렸다는데 왜 이래요!”

    시현은 울음이 터져 버렸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도 그가 버티니까 울컥하고 말았다.

    밋밋한 프러포즈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계약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다.

    무진이 돈이 많아서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의 할머니는 그녀에게 거지라며 돈을 받고 사라지라고 했다. 머물 곳과 기한도 정해 주었다.

    흥미를 잃게 되면 무진이 그녀를 버릴 것이라고 했다.

    늘 가지고 노는 인형을 할머니가 그에게 던져 주었다며 무진을 만나려고 애쓰는 여자들도 그런 부류라고 했다.

    무진의 결혼에 안달복달하는 것이 백야 그룹 때문이라며 버려지기 전에 돈을 받으라고 윽박질렀다.

    시현은 무진과 함께한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결국 절망이 되었지만.

    무시와 모멸감에도 그에게 미련이 남아서 놓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시현은 자신도 무진처럼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했다.

    뜨겁고 은밀한 시간이 싫거나 창피한 것이 아니었다.

    무진하고만 아는 감각, 짜릿함은 뜨거웠던 신혼을 떠올리게 했다.

    “울지 마.”

    “…….”

    “미안해. 할머니가 널 괴롭히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해서.”

    왕 할머니의 짓이라는 걸 알면서 그의 어머니를 마주했던 것은 끔찍한 현실을 보는 듯했다.

    악의적인 소문이 그녀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좌절하고 말았다.

    사소한 장난이라고 넘기기에는 삶이 꼬여서 절벽에서 밀쳐질 뻔했다.

    풀리지 않은 상황이 여전히 버겁기만 했다.

    시현은 병원에 있으면서 고민하고 내린 결론대로 그와 끝을 맺고 싶었다.

    어차피 그들의 세상에 부대끼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가 백야 그룹을 포기한다고 해도 말이다.

    회사에서 엉뚱한 소문이 다시 돌기 시작하면서 주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마음이 회복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 휘둘려지는 인생을 바란 게 아니었다.

    시현은 미안하다고 다시 시작하자는 무진이 미웠다.

    운명이 뭔데?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밉다고!”

    “맞아. 나 나쁜 놈이야. 미워해도 돼.”

    그는 울음이 터진 시현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할머니한테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한 게 불쾌하고 억울했다.

    자신이 그럴 정도인데 시현의 상처는 어떨지.

    시작부터 시현에게 가족을 알리고 세상에 단 한 번의 결혼식을 올렸으면 누구도 그녀를 괄시하지 못했을 텐데.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이었다.

    시현이 사라진 한 달처럼 사무실에서 쓰러져 입원하고 만나 주지 않았던 며칠 동안 무진은 시현을 더 갈망했다.

    또다시 시현을 놓치면 살아갈 수 없었다.

    시현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 경험하지 않았는가.

    무진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도 시현의 마음을 돌려놓는 방법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할 뿐이었다.

    그는 확신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시현의 눈빛이 이제야 보였다.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시현은 믿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려고 마음먹었기에 듣지 않은 것이다.

    무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한번 시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단 하루도 시현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시현아.”

    무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살며시 당기니까 스스럼없이 품에 안겨 우는 시현의 어깨가 들썩이며 떨리고 있었다.

    이 작고 약한 시현이 상처를 입고 두려움에 떠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던 걸까.

    “시현아. 사랑해.”

    “…….”

    “내가 널 사랑하는 건 진심이니까 믿어 줘.”

    나직이 울리는 무진의 목소리에 시현은 더 서글프게 울었다.

    “네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네가 날 바라보면 심장이 뛰었어.”

    “…….”

    “진심이었는데 장난처럼 말해서 믿지 못한 것도 내 탓이야. 사랑해. 널 잃고 살아갈 수 없어.”

    무진이 시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 갔다.

    “느껴지지? 너하고 있으면 이렇게 미친 듯이 뛰어. 내 사랑을 버리지 말아 줘.”

    장난보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무진의 고백이었다.

    그가 시현을 다시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벗어나려는 시현을 껴안은 채 무진은 조심스럽게 마음에 담은 말을 읊조렸다.

    “할머니가 그 정도로 일을 벌일 줄 몰랐어. 그래서 네가 의구심을 가지는 걸 옆에서 보면서도 확실한 것만 찾았어.”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널 한 달 만에 찾았던 이유가 뭐겠어? 사랑하니까 너 없이 살 수 없으니까 찾아 헤맨 거야.”

    무진이 시현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격앙된 그의 목소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시현아. 난 네게 버림받기 싫어.”

    귀에 나직이 들리는 무진의 목소리에 시현은 집중했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무진의 사랑 타령이 진심이었다고?

    왕 할머니가 여러 사람을 이용해서 괴롭히고 모욕을 준 게 단순한 일인 건 알고 있었다.

    무진을 사랑하는 왕 할머니한테 가난하고 부모가 없는 자신은 보잘것없으니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분이니까.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한테 괴롭힘을 당한 것은 쉽게 떨칠 수 없었다.

    무진을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당한 모멸감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진의 가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해도 말이다.

    그가 여자 때문에 가족을 버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무진의 친구인 진보라 본부장까지 왕 할머니한테 회유된 것이 놀라웠다. 그에게 감정이 있는 게 아닌데 단순히 자신이 싫어서?

    시현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무진의 진심을 아는 것과 자신의 마음이 똑같아도 말이다.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에 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자산가인 강무진의 곁에 남을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알면 남들은 신데렐라라고 떠들 것이다.

    그를 사랑해도 동반자로 잘해 낼 자신이 없어서 결혼을 끝내고 싶었다. 미련 따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무진이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현아. 좋은 것만 생각하자. 널 잃을 수 없어.”

    “싫어요. 무진 씨는 가족한테 돌아가요. 어울리는 사람을 곁에 둬요.”

    “너도 날 사랑하잖아.”

    “사랑한다고 먹고사는 게 해결되지 않아요.”

    “사랑하면 밥이 맛있겠지. 내가 돈이 많아서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어.”

    심각한 대화에 갑자기 그가 사랑을 밥으로 비유하자 시현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죽을 만큼 힘든 일을 당해도 숨을 쉬면 살아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왜 떠올랐을까.

    시현은 왕 할머니가 모질고 함부로 대할 때도 무진의 편에 섰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조작된 사진을 들이밀었을 땐 더는 그와 미래를 꿈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은 아파도 되니까.

    아파도 세월이 해결하듯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으니까.

    “시현아. 제발 날 버리지 마.”

    “무진 씨. 집에 가요.”

    “안 가.”

    한 명이 앉는 소파에 엉겨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현은 끌어안은 채 안색이 좋지 않은 무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친 무진의 모습을 보면서 인연의 끝이 보였다. 또다시 다투고 할퀴며 서로에게 상처 입히면 어떻게 될까.

    시현은 울었더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포옹한 채로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 

    시현은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회사에서 어떤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지 정신이 없었다.

    다시 주말이 되자 그는 당연한 듯 시현의 오피스텔 앞에 와 있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벽에 서서 안 가니까 그를 집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처남은 제대가 얼마 남았지?”

    “알 것 없잖아요.”

    “군에 있는 동생한테 안 갔다면서?”

    “사는 게 바쁘니까요. 세현이는 꿋꿋하게 군 생활하고 있고 몇 달만 있으면 제대하는데 뭘요.”

    “처남이 서운할 만하네.”

    무진이 세상에 하나 남은 자신의 가족을 챙기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다.

    시현은 순간 짜증이 났다.

    지난주에 가볍지 않게 대화하던 그에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다고 모질게 다짐했건만.

    챙김을 받으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다.

    “새벽에 아주머니가 다녀갔지? 너 좋아하는 거 잔뜩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왜요?”

    “같이 먹자고.”

    이제 아주 뻔뻔해지기로 한 걸까.

    궁전 같은 넓고 좋은 집을 놔두고 좁아서 갑갑하다는 오피스텔에 왜 오는 것일까.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아서?

    “제발 집에 가요. 한남동이든 평창동이든 무진 씨를 반기는 곳에 가라고요!”

    “너하고 같이 갈 거야.”

    “무진 씨!”

    정말 흥미를 잃기 전까지는 갖고 싶은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건가.

    계약 종료처럼 결혼도 끝이라고 말했는데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를 보며 시현이 입을 삐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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