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74)
  • 68.

    해결된 것 없이 사무실에서 얼굴 보며 일하는 게 이렇게 곤혹스러워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계약 관계로 거짓 데이트를 하는 게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지 않았다.

    다 아는 건데도 박 실장의 눈치를 봐야 하고 무진의 엉뚱한 행동에 신경이 곤두섰다.

    밀어내는 시현이나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무진이나 만만치 않은 힘겨루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 화를 내도 돼. 그래도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고 밥도 먹자.”

    “싫어요.”

    “난 좋아.”

    “지금 장난해요?”

    무진의 짓궂은 말에 시현은 어이없었다.

    황당한 표정에 버럭 화를 냈지만, 그는 시현의 뺨에 입맞춤하고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회사에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게 뻔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이 한 층을 사용하고 있어도 오고 가는 직원들한테 무진과 시현의 행위가 눈에 띌 수 있었다.

    진보라 본부장이 출근을 안 하고 있지만 소문은 희한하게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시현은 구내식당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며칠째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어제도 똑같이 샌드위치를 사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TS 투자 자산 운용사 직원이 몇 명 타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장이 열렬히 신입 비서를 쫓아다닌다고 수군거렸다.

    시현이 사장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반대였다면서 키득거렸다.

    박 실장이 어디 가서 떠벌릴 말이 아니었다. 시현은 갑자기 소문의 방향이 달라진 게 의아할 뿐이었다.

    ‘소문을 없애 달라고 한 건데. 이건 뭐야.’

    시현이 돈 많은 남자를 유혹한다는 헛소문을 덮으려는 의도라고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기반이 없던 시현에 관해 알려진 사생활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장이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오히려 직원들이 떠벌리기에 좋았던 것 같았다.

    계약은 그의 말대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결혼을 정리하자고 말하자 무진의 행동이 달라져서 시현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회사에서 소문은 지우지 못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는데, 여기서 결혼한 사이라고 알려지면.

    “미쳤어.”

    시현은 무진의 집무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아도 그와 사실적 결혼한 사이니까 미칠 지경이었다.

    단순한 고용 관계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시현을 괴롭게 했던 헛소문이 돌았던 것만큼 사장이 그녀를 쫓아다닌다는 해괴한 소문에 머리가 아팠다.

    경력만 쌓고 이직을 고민하던 시현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늘 아르바이트며 일만 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았던 시현은 한국에 와서 유명 인사가 된 것 같았다.

    정말 원치 않은 일이 자꾸 주변에서 터지니까 예민해지고 피곤했다.

    ‘너무 조용해.’

    무진이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왕 할머니 쪽이 조용했다. 정 비서는 나타나서 돈 봉투 같은 걸 주지 않았다.

    협박은커녕 모습을 감춘 모양새였다.

    물러 터진 것처럼 일 외에 무진하고 엮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마음먹은 대로 이대로 그와 결혼까지 정리해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시현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

    무진을 생각하면 그의 여자라는 느낌을 알게 해 준 유일한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더 지옥으로 걸어가는 것을 멈춰야 했다.

    그를 지워야 안온한 삶을 살 테니까.

    “소문이 왜 커진 건데.”

    소문을 잠재울 생각보다 이상한 방향으로 활활 타오르니까 정신이 없었다.

    출근해서 잘 모르는 직원들의 눈치까지 보게 되고, 퇴근해서 오피스텔에 있으면 마음을 다잡느라 시현은 날카로워졌다.

    정말 무진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후유…….”

    방금 무진이 입맞춤한 뺨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혼이 답이야.

    그의 가족을 받아들일 수 없어.

    시현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도통 모를 지경이었다.

    *** 

    금요일 밤.

    무진이 박 실장과 외부에서 곧장 퇴근한다고 알려왔다.

    덕분에 시현은 느긋하게 일을 정리하고 회사 밖에서 저녁으로 국수를 먹고 집에 갔다.

    막말하던 진보라 본부장도 안 보이고 왕 할머니의 감시자도 뒤쫓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한결 편하게 오피스텔과 회사를 오고 갈 수 있었다.

    시현은 눈이 뻐근해서 손으로 비비면서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에 집 앞에서 기다리는 그를 봤다면 도로 엘리베이터를 탔을 텐데. 시현은 눈을 비비다가 미처 보지 못한 무진을 마주하고 있었다.

    “저녁은?”

    “…….”

    “얘기 좀 해.”

    “늦었어요. 나중에 해요.”

    그가 시현을 막아섰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면 오른쪽으로 따라했다.

    “문을 열든가 우리 집으로 가든가.”

    뭐? 우리 집?

    기가 막혀서 한숨을 내쉬던 시현은 앞을 가로막서 있는 무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국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뭐가 있을까.

    감시자도 없으니까 집 앞에서 실랑이해도 상관없을 테지만, 참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약은 종료되었다고 한 것 같은데요. 내가 할 일이 있는 건가요?”

    “시현아.”

    처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시현은 날카롭게 말하고는 멈칫했다.

    “이름 부르지…… 왜 왔어요.”

    “밥 좀 먹자.”

    “밥 먹으러 왔어요?”

    “응.”

    “무진 씨!”

    소리를 질러봤자 뻔뻔하게 구는 무진을 오피스텔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시현은 슈트 상의를 벗고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여닫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밑반찬을 꺼내는 것을 보면서도 무시하려다가 그가 이것저것 만지는 게  싫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주방에 갔다.

    “반찬이 상했을지 몰라요. 라면 끓여 줄게요.”

    “라면?”

    “아주머니처럼 생면에 고기 국물을 우려서 만들지 못해요. 나 같은 서민이 먹는 라면이에요.”

    “나도 라면 알아. 먹어 봤어.”

    시현은 무진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고 냄비에 물을 넣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피부는 거칠어지고 살이 빠진 무진이 전보다 날카롭게 보였다. 시현은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잘난 맛에 사는 남자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사이인 아내의 집에서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 같아서 못 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시현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 면부터 넣어야지.”

    시현의 상념이 무진의 말에 깨졌다.

    “수프부터 넣는 거예요.”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면 면부터.”

    “주는 대로 먹어요!”

    “어, 알았어.”

    시현은 김치를 접시에 담고 보글보글 끓인 라면을 냄비 채 무진의 앞에 놓았다.

    “먹어요.”

    “고마워.”

    시현은 의자에 걸어 둔 코트를 들고 침실로 갔다. 침대가 있는 공간과 주방 겸 거실이 구분되었지만, 그가 라면을 먹는 소리가 다 들렸다.

    무진은 시현에게 미안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잘못이 없다며 버티고 증거라는 것도 처벌하기에 미흡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시현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그간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새로 시작한 투자 회사 일도 많은데 매일 술을 마시며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고민했다.

    장소연과 김기태는 잡히자마자 술술 불면서 무진에게 돈을 요구했다.

    법을 어긴 게 없다며 할머니를 끌어들였다. 한 명이 엮이면 할머니까지 전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진보라는 출근하지 말라고 통보하자 악에 바쳐 난리를 피웠다.

    직접 스카우트하고 편리를 제공했는데 진보라가 한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편에서 우정을 지켜야 했다.

    백야 그룹 입성은 할머니보다 자신이 기회를 줄 수 있었으니까.

    시현에게 경호원을 붙여 둬서 보고받는데도 아직 위험이 도사리는 기분이었다.

    조용한 할머니가 몹시 신경 쓰였다.

    “라면 물도 제대로 못 맞추면서.”

    무진은 라면과 물의 비율을 보며 키득거렸다.

    처남이 시현에게는 절대로 주방을 맡겨서 안 된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밥물도 못 맞추고 라면 물은 한강이 되거나 졸아서 먹을 수 있다고.

    ‘남은 반찬으로 비빔밥을 만들었으면 나았을 텐데. 일부러 라면을 끓인 건가.’

    면을 건져 먹으며 무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무진은 라면을 다 먹고 시현이 애착하는 좁은 소파에 앉았다.

    넓은 집을 두고 시현의 오피스텔에 있으니 갑갑했지만, 전체적으로 따듯한 분위기였다.

    시현이 파스텔 계통을 좋아해서 벽지를 바꾼 듯했다. 자는 공간만큼은 포근한 느낌을 원했을 테니까.

    무진은 그새 씻고 나온 시현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약을 제안했던 그때도 로션만 발랐는지 얼굴에 색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립글로스만 발라서 입술만 촉촉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무진은 시현의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화가 필요한데 거슬리는 행동으로 미움받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뭐예요? 안 가요?”

    “안 가.”

    “여기 좁아서 싫어하잖아요. 빨리 집에 가요.”

    “얘기 좀 하자니까.”

    그는 팔짱을 끼고 방어 태세를 풀지 않은 시현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만난 거 알아. 할머니하고도 담판을 지었지만, 너한테 사과할지 모르겠어.”

    “그래서요?”

    “회사에서의 소문을 알아보지 않은 게 아니야. 최초 유포자와 그걸 부풀린 사람의 연결점을 찾고 나서 좀 황당했어.”

    “누군데요?”

    무진은 시현이 대화에 관심을 보이자 장소연과 김기태, 진보라가 할머니하고 연관된 것을 말했다.

    각각 할머니의 지시로 시현을 그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 짓을 빼먹지 않고 알렸다.

    모든 일의 배후가 할머니였다는 것에 처벌을 약속하고 싶었다.

    “처벌해서 뭘 어쩌려고요? 백야 그룹이 스캔들로 남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면 뭐가 달라져요?”

    “달라져. 난 내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한 걸 참을 수 없어.”

    “내가 돈 받고 사라진 거예요. 왕 할머니를 끌어들여서 날 곤란하게 하지 말아요.”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너한테 한 짓을 봐!”

    시현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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