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시현은 이틀 병가를 내고 출근해서 일하다가 퇴근해서 멍해진 채로 소파에 앉았다.
검사받고 겨우 이틀 병원 신세를 졌을 뿐인데, 무진이 병원에 올 때마다 숨어서 마주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느새 속은 편해지고 머리를 맑아진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도 바쁜지 무진의 얼굴을 볼 새가 없었고 시현은 박 실장하고만 업무를 진행했다.
잘 쉬고 주말까지 쉬어도 되는 게 평온한 일상을 찾는 느낌이었다.
퇴근할 때 시장에서 밑반찬을 잔뜩 사 왔다. 병원에 있을 때 온라인 마트에서 보양 음식과 간식거리도 많이 사서 배달되었다.
먹고 쉬니까 사람다워진 것 같았다.
토요일 오전에는 무진이 일하는 사람을 보내서 오피스텔이 번쩍번쩍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졌다.
취업 때문에 급하게 얻어서 침구류도 겨울 이불로 바꿔서 추운 날씨에도 포근한 분위기였다.
시현은 뽀송뽀송한 이불 위에서 뒹굴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상사로 봐야 하는데 지금의 기분으로는 가능했다. 물론 무언가 시원해진 느낌이 아니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병원에 이틀 있는 동안 누가 쫓아오는 느낌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푹 잠들었고 출퇴근하면서도 기분은 들떠있었다.
병가니까 연락하지 말라는 한마디에 그는 외부 일정으로 밖으로만 도는 듯했다.
그리고 메시지만 남겨서 핸드폰이 깜빡거렸다.
-바쁜 일 정리되면 얼굴 보고 얘기해
누구 마음대로?
시현은 메시지를 읽고 짜증이 나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퇴사 전까지는 사장과 비서지만 그 외의 관계는 전부 지울 생각이었다.
시현은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오피스텔을 둘러보다면 픽, 웃었다.
퇴사나 이직은 준비한 게 없지만, 이번 계기로 새로운 시작을 겁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짐한 대로 조금씩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갈 생각뿐이었다.
***
월요일.
주말까지 야무지게 쉰 시현은 새로이 다짐한 마음에 출근하는 길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뜻하게 출근하는 것이 조금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연말 행사 초대장 발송부터 무진의 일정을 점검해야 하지만 일하는 게 즐겁기만 했다.
시현은 박 실장하고 마실 음료를 사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박 실장이 출근했다.
“실장님. 지난주도 못 뵈었는데 매우 바쁘셨죠? 자리 비워서 미안해요.”
“몸은 괜찮습니까?”
“멀쩡해요. 실장님 덕분에 푹 쉬어서 살 거 같아요. 실장님이 제가 할 일까지 하느라 고생하셨죠.”
“아프지 맙시다. 추가 수당 받은 거로 보약을 먹어야 버텨요.”
시현은 음료를 박 실장 책상에 놓으면서 멋쩍게 웃어 보였다. 퇴원하고 업무 복귀했지만, 무진을 못 본 것처럼 박 실장도 외부에만 있었다.
그래서 일감을 떠넘긴 것 같아서 정말 미안했다.
시현은 박 실장과 그간의 회포를 풀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고마움과 미안함에 말이 길어졌다.
주변에 고마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곧 해가 넘어가면 스물일곱이 될 것이고 계약과 결혼이 정리될 테니까.
과거에 매여서 바보처럼, 누군가에 끌려가는 인생은 그만하고 싶었다.
인생은 짧으니까.
지난주부터 같은 층에 있는 진보라 본부장 사무실의 분위기도 알고 싶었다. 어째서인지 장소연은 계속 출근을 안 하고, 진보라 본부장을 못 봤다.
본부장의 비서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직접 가서 확인할 처지는 아니었다.
업무 효율을 생각해서 시현은 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주말에 안 본 건데도 사무실에서 무진을 보려니까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무진하고 나눌 대화는 일뿐인데, 그가 사진에 관해서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무실 밖에 소리가 들렸다.
외부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온 것인데 겨우 주말 동안 안 봐서 그런지, 그가 어떤 얼굴일지 보고 싶었다.
다툼도 지겹고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것도 이젠 그만할 건데 심장과 머리는 반대인 듯했다.
궁금증인지, 불안감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현은 이틀 동안 그를 피해서 살짝 걱정되었지만 아무 일 없이 사진과 소문이 사라졌기를 바랐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무진을 보는 순간 무진이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시현아.”
“오셨습…….”
“몸은 괜찮아?”
이 남자가 정말!
박 실장이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큼. 두 분. 여기는 신성한 사무실입니다.”
박 실장은 다 알고 있지만 포옹하며 격하게 시현을 반기는 무진의 모습에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박 실장의 표정을 본 시현은 놀라서 무진을 확 밀어 버렸다.
“실장님 말대로 여기는 신성한 사무실입니다. 사장님 자중하세요.”
“박 실장, 나 시현이하고 얘기 좀 할 테니까 보고는 나중에 받을게.”
박 실장은 쳐다보지 않고 말하며 무진이 시현의 손을 잡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현은 무진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입만 벙끗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다른 한 손을 주먹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현아.”
“회사예요. 이름 부르지 마세요.”
“주치의한테 듣기는 했는데 몸은 괜찮아? 검사 결과도 깨끗하대.”
“누가 뭐라고…… 이러지 말라니까요.”
포옹을 풀지 않고 시현을 으스러지게 끌어안는 무진.
하지 말라고 말해도 그의 강인한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직이 무진이 하는 말이 들렸다.
“미안해. 잘못했어.”
사과하는 말을 듣자 오히려 시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서 시현은 얼굴 보고 대화하자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손은 꽉 잡힌 상태였다.
“소문을 그냥 내버려 둔 거 아니야. 알아보고 있었고 네 말대로 할머니가…… 미안해.”
“일을 크게 만들지 마요. 아직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면 좀 더 다니고 싶은 회사니까요.”
“네가 당한 망신과 모욕을 어쩌라고?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럼 어떻게 하자고요? 이걸 빌미로 왕 할머니나 포기하게 하고 우리 계약과 결혼을 마무리 지어요.”
시현은 그의 사과를 안 받아들이겠다는 게 아니었다. 다만 끝내겠다고 다짐한 것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일과 사생활을 구분하면서 매몰차게 말하려고 심호흡했다.
“후유……. 그만해요.”
“시현아.”
“무진 씨 할머니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게 되잖아요. 내가 계약대로 못 했어도 이긴 거잖아요.”
지금 상태는 별거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관계를 정리할 때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간신히 한 말에 정신을 차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무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그래, 계약은 종료. 하지만 이혼은 안 해. 못 해.”
“……뭐라고요?”
그가 시현의 생각을 전부 아는 듯 선수를 쳐 버렸다.
“무진 씨. 우리는 돌이킬 수 없다고요.”
“왜 못 해? 네가 도망치면 끝까지 잡으러 다닐 거야. 일이 뭐고 아무것도 안 하고 너만 찾으러 다닐 거라고.”
“그거 협박이에요?”
시현은 무진을 바라보았다.
절실히 도움이 필요할 때 구세주처럼 거액을 주며 계약을 제안하던 남자.
평생 감사할 거라며 그를 멋진 남자처럼 생각했다.
어느새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사랑하기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억 원을 이별의 조건으로 주는 왕 할머니가 그와 다르지 않았다.
재벌 남편과 알콩달콩하며 일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시현은 형체 없는 소문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작된 사진만 떠올리면 숨이 막혀 왔다.
그는 시현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무진은 시현을 무시한 게 아니었다. 조금 더 확실한 것을 알아보느라 늦은 거였다.
시현을 힘들게 한 일을 바로잡으며 그녀를 곁에 둬야 했다.
한 달 동안 사라졌을 때 미쳤던 걸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진심이고 사랑이었다.
이대로 자신의 사랑이, 시현이 제 곁에서 떠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그저 네가 돈이 없다고 하니까 시간을 끌면 포기할 줄 알았어. 난 네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만 생각했어.”
“우리는 이러면 안 돼요. 가족하고 등지지 말아요.”
그는 그만하자며 결혼까지 정리하자는 시현에게 매달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시현아.”
시현은 머리를 내저으며 소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용서할 것도 없고 끝을 내야 하는 인연일 뿐이었다.
“지쳤어요. 우리가 맞지 않은 사람인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맞지 않다는 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제대로 사랑해 보지 않았다고.”
“일이 많아요. 이만 나가 볼게요.”
무진과 시현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
그는 시현이 그만하자고, 결혼도 끝내자는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무진은 시현 자신보다 그녀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외부 일정이 많아지자 출근할 때마다 시현의 책상 앞에서 한참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집무실로 불러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의 집으로 불러도 오지 않고 이혼을 안 한다고 버티는 것도 시현에게 통하지 않았다.
정시에 퇴근한 시현의 오피스텔 앞을 서성거려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는 시현의 반응이 없는데도 며칠째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사무실에서 대놓고 끈적한 눈빛을 보내는 무진한테 끝내 폭발해 버렸다.
박 실장만 없으면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시현을 쏘아보는 듯했다.
“몰라서 그래?”
“몰라요. 모르니까 오피스텔 앞으로 오지도 말고 사무실에서 그, 그 눈빛 하지 마요.”
“무슨 눈빛? 신입 비서가 일 잘하고 내 여자 내 눈으로 보는 건데.”
“지금 반성하는 태도예요? 멋대로 고집만 피우면서.”
무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거하지 말자. 짧았던 결혼을 만끽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이럴 땐 같이 극복하는 게 맞아.”
“누구 마음대로요?”
“우리 마음.”
시현은 헛웃음이 났다. 기가 막혀서 대꾸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