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74)
  • 66.

    무진의 한숨이 깊어졌다.

    시현이 얼마나 괴롭고 수치스러웠을지. 여린 마음에 남편의 흠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어머니 앞에서 홀로 감내했을 시간.

    무진은 심장이 찢기는 기분이었다.

    첫사랑이었다. 시현의 해맑은 미소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갖고 싶은 욕망에 품에 가둘 생각만 했었다.

    계약과 결혼,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은 시현의 잘못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힘들어하는 시현을 달래주지 않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했다.

    정작 계약을 이행하라면서 그는 남편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시현에게 악의를 가진 자.

    조작된 사진.

    시현의 오피스텔까지 아는 것을 보면 반년 동안 주변에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장소연, 김기태, 진보라, 그리고 시현의 어머니 백혜련.

    장소연과 김기태는 몸을 낮추고 숨었다.

    자신이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을 풀어 찾고 있으니까 사진을 조작해서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 진보라?

    이런 걸 보내고 보라가 무엇을 얻는 걸까.

    할머니는 자신의 결혼에 의견을 낼 수 있으나 방해하면서 시현을 괴롭혀도 되는 자격이 없었다.

    무진은 병가를 낸 시현을 끌어들이지 않고 해결해야 했다.

    누구의 힘이든 뭐든 이용해서라도 해결하고 시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맞았다.

    반년이라도 혼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자신도 시현에게 동생의 안위를 가지고 위협하며 계약대로 하라고 윽박지른 인간이었다.

    혼자서 불안에 떨며 끙끙 앓았을 시현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핸들에서 이마를 뗀 무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어, 박 실장. 외부 일을 며칠 동안 책임지고 해야겠어.”

    -주요 미팅은 다시 일정을 잡고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하겠습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백야와 TS에서 월급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 몫을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 실장만 믿고 며칠 개인 일을 볼게. 아, 시현이도 이틀 정도 출근 못 해.”

    -알겠습니다.

    무진은 박 실장하고 통화를 끝내고 홍선우 실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홍 실장, 증거는 어느 정도 수집되었습니까?”

    -장소연은 깊숙이 숨었습니다. 그리고 진보라 본부장의 금전 거래 명세와 움직임을 파악 중입니다.

    “법으로 엮을 만한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할머니 쪽 사람 같은데 시현의 사진을 찍은 사람을 찾아서 내 앞으로 데리고 왔으면 합니다.”

    -며칠 시간을 주십시오.

    “같이 일하기도 전에 개인적인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미안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게는 경호가 우선이니까 주변을 정리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홍선우 실장까지 전화 통화를 끝낸 무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몇 없는 진솔한 친구라고 여겼던 진보라가 어디까지 개입되었는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진은 시현의 일에, 회사 정보에 진보라가 엮여 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할머니가 설득되어 시현의 좋은 점을 봐 주기를 원했다.

    *** 

    사흘 후.

    무진의 한 손에 조작된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이름과 다른 손에는 할머니가 여러 명과 연관된 자료가 들어왔다.

    시현이 아무렇지 않은 듯 회사에 나와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로 보였다.

    무진은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할머니가 연루되어 있으니 힘으로 찍어 누르면 일이 폭탄처럼 터질 위험이 있었다.

    할머니한테 돈으로 회유가 되었든 다른 것을 약속받았든 그들은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 행한 것이다.

    처분은 약하겠지만 다시는 시현의 곁에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도 다행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에 할머니가 배후인 것이 속상했다. 하지만 시현이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괴로워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질적인 행위였다.

    무진은 어머니가 시현을 조금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이번 일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손에 든 것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곧장 평창동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의 저택은 겨울을 알리는 추운 날씨에도 푸른 숲을 조성한 것처럼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 정원과 잘 자란 나무로 보는 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추운 날씨에 오히려 운치가 있고 거실을 지날 땐 채광이 좋아서 다시 정원 쪽에 시선이 갔다.

    거실 큰 유리창으로 정원을 보면 한겨울에 눈 내린 것을 만끽했던 것이 생각났다.

    무진은 정 비서를 따라 할머니가 계신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일부러 절도 있는 모습으로 인사하자 반갑게 맞아 주는 할머니는 웃는 얼굴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 그렇게 식사 자리를 만들면 파투 내기 바쁜 녀석이.”

    정 비서가 빠르게 따듯한 차를 내오고 할머니의 집무실에 널찍한 소파에 마주 앉았다.

    손자가 많아도 할머니의 집무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무진은 약속이 없어도 유일하게 할머니 저택에, 집무실에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었다.

    직책이 없고 그저 돈을 굴리는 할머니의 집무실은 단조로웠다.

    오랜 세월 남편 잃은 며느리와 손자들한테 영향력을 끼쳤고 무진이 최초로 맞선 손자였다.

    무진이 아는 할머니는 온화하며 좋은 분이지만, 그건 몇몇 손자한테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냐.”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녀석은 어찌 할미한테 사무적으로 말해. 네 녀석이 바라는 것은 다 해 준다니까.”

    무진은 조작된 사진을 가방에서 꺼냈다.

    할머니 앞으로 슬쩍 밀었다. 앞에 놓인 물건에는 눈길조차 안 주는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짓을 왜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가 제 아내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뭐라?”

    “감시자가 붙어도 단순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줄 알았지, 이런 짓으로 해코지하는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누가 뭘 해? 이딴 것을 가져와서 이 할미한테 반항해 봤자 그 애는 안 돼.”

    무진은 장소연과 김기태, 진보라, 정 비서, 백혜련의 이름을 나열하며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상세히 말했다.

    백혜련은 시현에게 손찌검과 협박을 일삼고, 장소연과 김기태는 시현에게 망신을 주고 더 알아보니 불륜을 조장했다.

    진보라는 사람을 매수해서 자신의 집에 불법 장치를 달아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조작된 사진이 진보라한테 나왔지만, 사진 자체는 할머니의 사람이 찍은 거라고.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긴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했다.

    도청 장치를 심어서 사생활과 공적인 일까지 훼방 놓은 것은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게끔 무진의 말투는 거칠었다.

    쉴 새 없이 말하며 할머니가 배후라는 것을 증명할 자금 흐름의 증거를 내밀었다.

    “이러는 이유가 단지 시현이가 돈이 없어서입니까?”

    “…….”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세요. 저는 진보라 본부장을 스카우트하면서 이런 짓을 할 줄 몰랐습니다. 도대체 장소연은 뭐고 제 친구까지 회유해서 무엇을 약속한 겁니까.”

    “조작된 사진은 모르는 일이다.”

    “사진을 건네고 시현을 궁지로 몰아넣으라고 한 건 아니고요? 할머니가 저를 사랑하긴 합니까?”

    바들바들 떠는 왕순자는 미간을 좁히며 무진이 내민 자료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주를 받았다며 길에서 시현에게 망신을 준 최문규의 목소리가 담긴 파일도 재생해서 듣고 있었다.

    무진은 다시 듣고 있으니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할머니지만 온화한 성품이 바탕이었다. 손자를 갉아먹는 짓을 멈추게 해 달라고 빌려고 했다.

    “너를 누구보다 많이 아끼니까 그 애가 안 된다는 거다. 그 가난뱅이를 어디에 붙여!”

    “할머니. 제가 가진 게 많지 않습니까. 왜 시현을 못살게 굴어서 저를 아프게 합니까.”

    “누가 아파! 그 애는 쓸데가 없어! 이 할미 말을 들어.”

    “할머니. 증거가 더 있지만 여기서 멈추면 저도 다른 방도를 생각할 겁니다.”

    “뭐가 어째! 여우한테 홀려서 뭐가 중한지도 몰라! 넌 이 나라의 재계를 이끌 인물이야. 네 옆에는 그런 애가 있어서는 안 돼.”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기회를 주고 시현이 할머니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결혼할 만큼 사랑하니까 할머니가 조금 져 주면 집안이 평화로워지니까.

    일로만 평가받기를 원해서 투자 회사도 인수한 것인데 할머니는 그를 종마처럼 부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 여자들이 저지른 일로 이 할미를 엮이려고 하지 마라. 갖고 싶은 게 있어서 이 할미한테 잘 보이려는 사람이 그것들뿐인 줄 알아?”

    역시나 할머니가 배후이고 부추긴 것이 맞았다.

    다시는 이런 짓거리를 못 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황망해서 할머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진은 할머니 뒤에 멀찍이 서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정 비서한테 시선이 박혔다.

    “정 비서는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게 할 겁니까.”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겁니까. 시현이를 주차장으로 불러서 겁박하던 거 다 압니다. 정 비서 학벌이 겨우 이런 일에 쓰여야 합니까.”

    듣고 있던 왕순자가 버럭 화를 냈다.

    “이 녀석이 뭐 하는 짓이야. 정 비서가 뭐가 어때서. 충심으로 일만 잘하니까 말도 섞지 마라.”

    “할머니께 경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라? 못돼먹은 그 애가 내 손자를 미치게 하는구나. 어디 여자에 미쳐서 할미한테 대들어?”

    백야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면 그것도 못 참을 게 뻔했다.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할머니가 이토록 시현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저하고 연을 끊을 생각입니까. 할머니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져서 미치는 것을 봐야 하는 겁니까.”

    “여자는 많아. 그 애는 너하고 어울리지 않아. 이 할미 말이 뭔 뜻인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백야 그룹의 지분을 처분하면 됩니까? 할머니의 애정에 보답하지 않을 거라고 행동으로 보이면 되는 거냐고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