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4)
  • 65.

    오후 일정을 마친 무진은 시현이 입원한 병원에도 들르지 않고 한남동 본가로 와서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니?”

    시현이 쓰러진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표정도 날카로운 게 몹시 신경 쓰였다.

    하지만 퇴원하지 않고 병원에 있는 시현이 말하지 않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진은 어머니와 마주 앉은 채 따지듯이 물었다.

    “시현이를 왜 부른 겁니까? 식사 자리 한번 만들겠다는 것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애한테 물어보지, 그랬니.”

    “어머니.”

    “나한테 화낼 것 없다. 익명으로 이곳에 배달된 물건 때문에 얘기 좀 했어.”

    차분하지만 화가 잔뜩 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무진은 어릴 때부터 어떤 일로든 집에서 꾸짖거나 화가 난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는 조용한 성격에 분란을 싫어하고 자애로우며 자식을 섬세하게 신경 쓰는 분이었다.

    결혼 문제로 언성이 높아진 것을 빼면 무진은 어머니와 잘 지내 왔다.

    그래서 시현을 만나 보면 어머니는 제 편을 들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악행에도 어머니는 방관자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진은 아주머니가 내온 홍차보다 얼음물을 들이켜는 모습, 한숨을 내쉬며 표정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낯설었다.

    “익명의 뭘 받았다는 말입니까?”

    “그래. 어디서 이딴 게 왔는지 알아보려다가 그 애를 불러서 변명이라고 하라고 했어. 그런데 그 애는 잘못했다고 빌기만 하더구나.”

    “그러니까 시현이를 왜 혼자 불렀습니까. 차라리 저를 부르시지.”

    “너희 둘이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만, 이게 단순한 스캔들로 무마될 거 같아?”

    무진은 어머니가 앞으로 밀어서 보여 주는 사진을 힐끔거렸다.

    테이블에 던져진 몇 장의 사진을 보고 무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남자는 뒷모습만 찍히고 여자는 시현의 얼굴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찍힌 사진이었다. 누가 봐도 오해하기 충분할 정도로 사진마다 남자의 옷, 얼굴이 달라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무진은 인상을 구기며 사진을 꼼꼼하게 쳐다보았다.

    시현의 오피스텔을 안다는 것.

    그곳에 자신이 몇 번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시현이나 자신에게 사람이 붙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 외에 다른 인물들……. 장소연과 김기태인데 그들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할머니 쪽 사람이라면 장소연은 한남동 본가에까지 손을 뻗기에 위험이 컸다.

    그렇다면 진보라 본부장뿐인데.

    돈도 아니고 시현을 괴롭혀서 진보라가 얻을 게 전혀 없다는 게 또 무진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진보라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었으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 사람이 할머니뿐인데.

    어머니의 반응을 보면 할머니보다는 시현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하고 결혼할 수 없어.”

    “우리 같은 사람이라니요. 사람마다 급이라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지. 한시도 남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만큼 쫓는 사람이 많다는 걸 말하는 거란다. 그 애가 네 곁에서 버틸 만큼 강하니?”

    “…….”

    “다시 말하면 네가 백야 그룹을 다 포기하고 그 애만 있어도 되는지 묻는 거란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으니까.”

    어머니의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으니 무진은 할 말이 없었다.

    “정략결혼은 할머니만 원하는 거라서 그냥 지켜본 거야. 그 애가 선하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좋게만 보겠니?”

    “죄송합니다.”

    “너와 그 애를 낱낱이 아는 사람이 틀림없을 거다. 네가 해결한다면 이 엄마는 방관자로 있으마. 이 사진도 안 본 거고.”

    무진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사생활을 아는 자가 분명한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사진이 할머니하고 관련이 있을까 봐 알아보는 것도 두려워졌다.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음은 의심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무진은 사진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시현을 노리는 자가 할머니라고 의심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어영부영 세월을 보낸 것이다.

    시현이 그토록 회사에 퍼진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고 없애 달라고 한 것을 느긋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가 나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시현이가…….”

    “네가 잘했으면 내가 그 애를 불러서 그런 말을 했겠니.”

    “어머니.”

    “나도 네 할머니가 심하게 하는 거 알아.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건데 그 애가 얼굴이 사색이 돼서 어찌나 불안하던지.”

    할머니의 집착은 남편과 아들들을 일찍 세상을 떠나보내서였다.

    그래서 무진은 할머니의 애증이 손자들한테 가고 그중에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이런 짓까지 했다는 것이 도무지 참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니까.

    “어떻게 인연을 이어 가든 헤어지든 정상적으로 해결해. 그거면 돼.”

    “할머니가 배후일지 모릅니다.”

    “그것도 네가 풀어야 할 문제야. 물론 힘들면 어떤 식으로 네게 힘을 보태마.”

    무진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1년 반 전에 시현에게 계약을 제안할 때 그녀는 한국에 간다며 조금 들뜬 모습을 보였다.

    동생과 단둘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게 무진의 눈에는 그저 신기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시현에게 빠져 있는 자신을 보며 결혼으로 묶어 두고 싶었다.

    시현이 사라졌을 때 그제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기에 시현을 찾아냈고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계약을 운운하며 옭아맸다. 동생의 안위를 위협하면서.

    익명의 제보로 본가로 그녀를 음해하는 조작된 것을 보낼 정도의 사람이 누구일지.

    너무나 빤한 사건이었다.

    애먼 사람을 잡게 생겼으니 신중할 수밖에 없지만, 시현의 말대로 할머니가 모든 일의 원흉이며 배후였다.

    장소연과 진보라가 합세해서 벌인 일이라고 보기에는 의심되는 게 많았다.

    할머니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사한 뒤에 증거를 손에 쥐고 자신의 결혼에 더 이상 간섭 못 하게 할 계획이었다.

    무진은 시현의 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시현이를 만나 보니까 어떠셨습니까?”

    “뭐가 어때. 네 할머니가 말한 것보다 순진해서 놀랐어. 그래서 이런 곳에서 버틸지 걱정이 앞서는 거고.”

    “의외로 강단이 있어요.”

    “그럼 뭐 해? 너하고 정리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어머니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무진의 심장에 꽂혔다.

    시현은 어머니가 불렀을 때 마음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 거지만 불안했다.

    “이 사진이 밖으로 돌면 거짓인 걸 밝혀도 그 애한테 치명상이야. 또 너는 어떻겠니? 우선 더러운 일부터 해결해. 알겠니?”

    “네.”

    “네 할머니가 죽네 사네 해도 이 엄마는 아들을 더 사랑해. 그 애랑 같이 식사하는 자리 만들어 봐.”

    “어머니. 감사합니다.”

    무진은 어머니가 꾸짖는 말에도 애정을 느꼈다.

    결혼 문제로 틀어진 사이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무진은 할머니의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시현의 처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숨어 버렸다고 시현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찾아냈을 때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대화했으면 시현이 이런 일까지 당하지 않았으리라.

    무진은 자신의 실수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아들. 제대로 해. 알겠니?”

    “네. 할머니가 버겁게 하면 어머니가 도와주셔야 합니다.”

    무진은 본가를 나와서도 한참을 차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일이든 빠른 판단으로 늘 리스크를 줄였다.

    그런데 일과 다르게 사랑은 머리로 하는 판단이 아니라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하는 거였다.

    “하- 미치겠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며 사업도 이익만큼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할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 마음으로 보는지 알기에 지금껏 기다렸는데.

    그 대가가 시현에게 상처가 되었다.

    무진은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각도이고 의도적으로 시현의 얼굴만 확연히 드러냈다.

    몇 번 바뀐 옷차림에 각각 다른 남자라고 봐도 믿을 만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유출되고 조작된 것으로 밝혀도 시현에게는 치명상이었다. 결혼한 사이라고 해명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게 뻔했다.

    무진은 어머니하고의 대화에서 그제야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할머니를 의심하면서 가족이기에 머뭇거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랑해서 시현을 놓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생각하고 선을 그었다.

    시현이 의심했을 때조차 조사하면서 할머니가 배후가 아니길 바랐으니까.

    계약이 문제가 아니라 진작에 할머니를 포기시키거나 안 되면 백야 그룹으로 맞서야 했다.

    시현이 느낀 모멸감, 괴롭힘으로 생긴 상처는 누가 치유한단 말인가.

    연락 두절에 시현이 사라진 것을 알고 버림받음에 괴로웠으면서 실수한 것이다.

    같이 살지 않겠다고 고집 피운 시현을 억지로 곁에 둬야 했다. 행복하고 단란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역경을 헤쳐 나갔으면 좋았을 것을.

    시현을 음해하려는 사진에 자신이 찍힌 것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조작으로 시현을 괴롭힌 사람부터 찾아야 했다. 다시 떠나지 않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 줘야 할 때이다.

    사랑하니까 붙들었으면서 정작 시현의 상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렇게까지 시현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막연하게 합리화했으니까.

    무진은 자동차 핸들에 이마를 대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현아. 내가 늦지 않은 거지.”

    사무실에서 쓰러지고 병실에서 내쫓긴 이유를 알았다.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한 채 본가에 와서 해명하려던 시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