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시현은 도저히 시어머니하고 마주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정말 살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너무 쉽게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잔인하게 사진으로 조작질하는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는 게 구역질 났다. 왕 할머니가 한 일 같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까맣게 모르는 것 같았다.
시현은 몇 번이고 사죄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사진 속 남자가 무진이라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정말 죄송합니다. 염려하지 않게 무진 씨하고 정리할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시현의 말에 이남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무진의 본가를 나온 시현은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할까.
무진이 백야 그룹을 가질 사람이어도 선을 넘은 거였다.
이건 정도를 넘은 미친 짓이었다.
점심에 회사에서 나온 시현은 간신히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다니는 것도 인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반년 동안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계약은 진행 중이고 결혼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두면 계약 불이행으로 생긴 위약금은?
그가 알아서 해결할까.
채용되었어도 무진의 회사라는 걸 알았을 때 비서의 일도 하지 말아야 했는데, 욕심을 부린 것이다.
계약은 핑계고 그의 곁에 조금 남고 싶었던 욕망에 욕심까지 더해졌다.
1년 남짓한 결혼 생활보다 한 달 동안의 이별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이혼하고 남남으로 갈라서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시현은 얼음물을 챙겨 책상으로 가다가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책상 모서리를 잡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려는데 숨이 막혔다. 시현은 가슴을 붙잡은 채 책상 모서리를 잡은 손을 놓고 그대로 쓰러졌다.
쾅- 우당탕-
쓰러지면서 손에 든 얼음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어렴풋이 문이 열리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현은 누군가에게 안겨 사무실 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
지치는 날이었다.
지쳐서 눈도 뜨기 싫은 그런 날.
병원 특실 병상에서 눈을 뜬 시현은 눈앞에 무진이 있어서 몸을 돌렸다.
“어디가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무진이 그녀를 탓하듯 말하자 시현은 화가 치밀었다.
“점심에 어디를 갔기에 안색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그는 초조한 듯 대꾸도 안 하는 시현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몸이 아프면 검사라도 하든가.”
“괜찮으니까 가요. 스케줄 계속 꼬이게 하면 비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박 실장이 다 하고 있어.”
“가라니까요! 정신 사납고, 생각할 게 있으니까 무진 씨 당분간 안 보고 싶어요.”
“비서가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지. 무슨 일인데 잔뜩 화가 난 거야?”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초조하고 불안한지 시현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바빠서 한 손에는 핸드폰을 놓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시현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시현은 자리를 비워서 박 실장한테 일감이 몰리는 게 신경 쓰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도 바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이 보였다.
“오늘 오후 미팅을 취소한 거 아니죠? 제발 가요. 나중에 얘기하고요.”
“병실에 있을 건가? 집에 갈 거면 바래다주고 일 보면 돼.”
“병가로 처리하고 싶으니까 하루만 입원할게요. 제발 나가서 일해요. 일!”
그는 시현이 쓰러져 있는 걸 보고 미쳐서 정신없이 병원에 왔다. 때마침 일을 보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박 실장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쓰러졌으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현이 머리를 부딪힌 것 같아서 혼비백산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혼자 사무실 바닥에 쓰러졌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간단하게 검사하는 의사 옆에서 시현이 깨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시현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경호를 맡은 사람으로부터 시현이 한남동 본가에 다녀온 것을 알았다.
할머니도 버거운데 어머니까지 나섰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했다.
어제까지도 시답지 않은 말에 웃던 시현이 반나절 만에 쌩쌩 찬바람이 불어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실에 있어. 다시 올게.”
시현은 무진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일이 자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일의 배후는 왕 할머니일 텐데, 그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진보라 본부장은 회사에 잘 다니고 있고 장소연은 한 달째 안 보였다.
무진의 잘못이 아닌 줄 아는데도, 이 모든 사달이 그로부터 빗어진 일이기에 아무것도 안 하는 그에게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시현은 무진의 어머니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고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와 자신에 관해서 해명해야 하는 꼴이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갑갑하고 숨이 막힌 데다가 머리가 아파서 휘청이다 쓰러지기나 하고 바보 같았다.
그간 쌓으라고 노력한 경력은 아무 데도 쓸데가 없을 듯했다. 모든 것이 전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군에 있는 동생한테 면회 한 번 안 가고 지금껏 일과 계약을 이행하고 있었다.
가족이라고는 동생뿐인데,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맑은 공기라도 들이마시고 싶다.”
그와 결혼해서 행복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집안의 남자였으면 계약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땐 동생을 살려야 했어.
무엇을 잘못했을까.
시현은 한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무진하고 같이 일한 것을 후회했다.
그의 어머니를 마주하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다.
일만 하면, 계약대로만 하면 모든 것이 착착 해결될 줄 알았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왜 그렇게 움츠리고 살아서, 자신을 조금 더 아끼지 않아서. 잘난 남자를 만나서 이렇게 되었을까.
오피스텔까지 따라와서 사진을 찍고 조작할 사람이 왕 할머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시현은 이제 집이 무서워졌다.
망설이고 두려워하며 열정을 가두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삶으로 남에게 휘둘리기나 하는 게 화가 났다.
시현은 속상한데 어디서 풀어내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병가 내고 한동안 병원에 있으면 다 정리될까.”
무언가 결심하고 다짐하려고 해도 여전히 마음 한쪽이 고통으로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목적을 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삶의 의지 또한 꺾인다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그래서 언제나 행복을 바랐고 마음이, 바람이 부는 대로 행동하기보다는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머릿속을 비우려니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거친 폭풍이 그녀 앞에서만 휘몰아치며 중심을 잡지 못하게 흔드는 듯하다.
무진의 어머니 말대로 행실이 똑발랐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무진과의 관계를 밝히고 회사에 다녔다면 헛소문의 중심에 서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조용히 산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 누가 알았을까.
무진하고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답을 알까.
사장과 비서의 부적절한 행위가 드러나면 부부임을 밝혀야 했다. 헛소문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가 추진하는 투자에 잡음이 생길 것이다.
무시하는 것이 답이라 여겼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계약과 결혼, 고용주와 고용인, 그리고 부부.
돌이켜 생각해 봐도 비정상적인 관계다.
“난 그와 정말 끝내기 싫어서 계약을 핑계로 삼았을까.”
다시 스스로 되물어본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목적을 가지고 관계를 회복해서 살아야 하는데 혼란스럽기만 했다.
계약은 머리가, 결혼은 마음을 뒤흔들었다.
시현은 회사 내의 소문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그의 어머니한테 끔찍한 사진이 전달된 것이 억울해서 울먹거렸다.
사랑을 감추었지만 결혼할 정도로 무진에게 풍덩 빠졌던 마음.
불편하면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싫은 걸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살아온 것이 바보였다.
무진의 어머니 앞에서 사진을 보고 쓴소리를 들었다고 쓰러지기나 하고.
극복한 줄 알았던 그의 가족을 만나는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모양이다.
강무진을 놓아 버리면 다 해결될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일한 경력은 어디에서도 써먹지 못할 텐데, 정말 위자료 받아서 위약금을 해결하고 자영업이라도 해야 하나 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을 꿈꾸고 능력대로 평생직장이 생겼다고 좋아했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
이남희는 시현을 만나서 익명의 제보가 헐뜯기 위한 조작인 것이 걱정스러웠다.
부모가 없어도 구김이 없어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의 결혼을 알지도 못했기에 시현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뜬금없는 결혼 소식에 원래 정한 집안하고 약혼조차 파투가 나면서 평창동이 난리였다.
동서들과 조카들은 무진이 가진 것을 탐하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흉흉한 말이 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들의 일탈쯤으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 크면서 손이 가지 않은 아들이었다.
누굴까.
시어머니가 아니면 시현과 무진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던가.
이렇게 악질적인 일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악의를 담은 사람.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현이 헛소문의 중심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남희는 이런 식으로 음흉하게 음해하려는 인간을 더 싫어했다.
상황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게 아들과 시현이 헤어지는 것뿐일 텐데.
그것은 시어머니가 바라는 것일 뿐이고, 무진을 음해해서 동서들이나 조카들이 얻을 것이 없었다.
그때 무진으로부터 몇 달 만에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