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74)
  • 63.

    끝까지 읽다가 불쾌해진 이남희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서 보고 당황했다.

    어이없는 모함하는 편지라는 걸 알지만, 집으로 보낼 정도면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무진을 아끼는 마음에 시어머니가 이시현을 떼어 놓는 것에 사활을 걸어도 묵인하고 있었다.

    이시현을 만나서 무진을 놓아 달라고 애걸복걸한 적이 있었다.

    무진이 가족도 없이 결혼한 것에 화가 나서 미국에 가서 호되게 야단도 치고, 시현을 붙들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1년 반이나 지난 일이었다.

    상자 안에는 무진이 얼마 전에 인수한 투자 회사에서 정보까지 빼돌린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은 편지 내용이 있었다.

    이남희는 떨리는 손으로 한 번 본 시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게 무슨…….”

    아직 어린 나이에다 결혼하면서 무진의 성격이 무뎌진 모습을 볼 수 있어 내심 싫진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을 뿐이었다.

    이남희는 시어머니가 분명히 시현을 무진에게서 떼어 놓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같은 회사에 사장과 비서로 일하고 있어서 의아했다.

    이남희는 시어머니의 불호령에 방관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아들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아서 시누이 강복희 화란 백화점 사장한테 간간이 소식만 전해 들었다.

    시어머니한테 반기를 들 수 없고 아들하고 관계를 망치기도 싫었다.

    그래서 미국까지 가서 아들하고 헤어져 달라고 애걸복걸한 이후 일제 나서지 않았다.

    아들이 시현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들의 분노가 자신에게 꽂히지 않기를 바랐다.

    문제는 이런 사진을 찍히고 입방아에 오른다면 시현뿐만 아니라 무진까지 망신살이 뻗칠 것이다.

    아들과 시현이 어떻게 일하고 있던 망신을 당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 욕심으로 아들이 잘못되는 걸 두고 볼 부모가 있을까.

    저녁도 거르고 수십 번 사진 속의 시현과 아들의 상황을 되짚었다. 누구를 위해 어떤 식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다.

    시어머니한테 알려야 할지, 아들을 불러서 상황을 살펴야 할지.

    도대체 조잡스러운 물건을 자신에게 보낼 사람이 있던가.

    결국, 나흘간 열두 번 상자를 받은 이남희는 고민 끝에 시현을 한남동으로 불렀다.

    이남희는 아들의 일이기에 시어머니보다 자신이 우선 해결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 

    백야 그룹 일가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시현을 부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이남희는 시현을 며느리로 여기지 않았으며, 아들과 결혼한 여자, 시어머니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조사할 여유도 없이 나흘간 계속 집으로 배달되는 익명의 상자를 끊어 내는 방법으로 이시현을 부른 것이다.

    아들한테 확인하기도 전에.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시현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사모님. 이시현 씨가 왔는데 어디로 안내할까요?”

    “테라스로 안내해요. 다과는 간단하게 준비해 줘요. 그리고 아무도 얼씬 못 하게 신경 쓰고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이남희는 나흘간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진과 편지를 챙겨서 테라스에 갔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시현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고 아들한테 먼저 확인할 문제였나 싶었다.

    복잡한데 이미 엎질러진 물.

    “안녕하세요? 이시현입니다.”

    “그래, 오는데 힘들진 않았니?”

    “보내 주신 차로 와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무진의 본가는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고 대중교통이 없어서 외부인 출입이 어려운 곳이었다.

    본가까지 오는 데만 해도 경비 초소가 있어서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집에 작은 갤러리로 불리는 널찍한 예술 공간이 있어서 보안이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그래서 이남희는 사생활 보호와 보안 시스템이 남다른 곳에 익명으로 물건이 보내진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다과를 가져올 때까지 시현과 이남희는 마주 앉은 채 말문을 열지 않았다.

    시현은 단 한 번 만났던 무진의 어머니가 차까지 보내서 온갖 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어젯밤 연락을 받고 잠도 설쳐서 눈도 퀭했다.

    왕 할머니의 돈을 받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결혼 문제 때문에 불렀다고 생각했다.

    진보라 본부장한테 얼핏 들은 대로 무진의 결혼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혼을 서두르라고 말할 것 같았다.

    시현의 머릿속은 온통 무진과의 결혼 문제만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다과만 빤히 바라보며 마주 앉은 채 침묵이 흘렀다.

    시현이 이남희를 따라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대 이남희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상한 걸 받았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너에게 물어야 할 거 같아서 불렀단다.”

    “네.”

    “널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아들하고 사는 여자라서 이건 확인차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구나.”

    이혼 문제를 확인차?

    무진하고의 결혼 문제가 아닌 건가.

    묘한 뉘앙스에 시현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남희를 바라보았다.

    “민망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난 시어머니하고 다르게 너와 아들 일에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었단다.”

    그의 어머니 말투가 아주 매섭게 들렸다.

    시현은 자신에게 울며불며 무진하고 헤어져 달라고 말하던 이남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고운 말을 쓰는 분이지만, 어째서인지 분노가 서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왜 불렀는지 궁금한 건 시현이었다.

    조만간 결혼 문제를 정리하겠다고 말하던 차에, 다시 이남희의 서늘한 말이 들렸다.

    “아는 대로, 진실만 말해 주면 좋겠구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대로 말할게요.”

    다시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이남희는 시현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물었다.

    “무진이 말고 만나는 남자가 있는 거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내 아들하고 헤어질 거니까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만, 같이 일하면서 정리도 안 한 상태로 오피스텔을 드나들면…… 망신이지 않니?”

    황당한 말이어서 시현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오히려 내 아들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좋겠구나. 하지만 정리될 때까지는 이런 사진 같은 게 찍히지 않았으면 한단다.”

    말을 마친 이남희가 내민 사진에 시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널 탓하는 게 아니니까 조심하면서 남들 눈에 입방아 오를 일은 없애자는 거란다.”

    시현은 숨을 들이쉬며 양손을 꽉 잡았다.

    테이블에 있는 사진을 보며 눈이 크게 떠지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가 있냐는 말에 순간 몸이 얼어 붙였다.

    결혼을 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며 찾아온 적이 있지만, 왕 할머니하고 그의 어머니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방관하는 게 나았으니까.

    눈앞의 사진은 무진의 어머니가 자신을 오해하기 딱 좋은 사진이었다.

    결혼 문제가 아닌 이상 사진에 관해서 해명해야 한다는 게 속상했다.

    그의 어머니 앞에서 침묵할 수 없었다.

    오해가 커지게 내버려 두면 자신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오피스텔에 드나드는 사람은 무진 씨예요. 헤어질 거니까 조심하겠습니다.”

    “뭐? 이 남자가 무진이라고? 내 아들을 못 알아볼까 봐 그러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시현은 이남희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아직 혼인 중이에요. 무진 씨하고 결혼 문제로 얘기 중이고 무진 씨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혼인 중이면 같이 살면 되잖니. 아, 결혼 문제로 얘기 중이라면 이젠 이혼할 생각이니?”

    “어머님과 할머님께서 바라는 대로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현은 머리를 숙였다.

    제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횡설수설하는 기분이었다.

    무진하고 자신을 찍은 사진일 텐데 남자가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감시자가 사진까지 찍어서 조작한 걸까.

    왕 할머니가 한 짓일 텐데, 그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이혼이겠지.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자 부연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남희의 반응이 기묘했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하겠다고? 그게 이 사진에 관한 해명이니?”

    “…….”

    “다시 물어보마. 이 사진 속의 사림이 너하고 내 아들이라는 거니?”

    “오피스텔에 무진 씨 외에 온 사람이 없습니다.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으니까 더 잘 아실 거예요.”

    시현의 당당한 태도를 본 이남희는 손자며느리를 유독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시어머니기에 곁에 있는 누군가가 일을 벌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아들 옆에 누가 있든 시어머니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카들의 결혼에도 시어머니가 모든 걸 관여했기에 이남희는 나서지 않았다. 백야 그룹을 이어야 하는 사람이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음모로 사진을 받고 나니까 시현이 다르게 보였다.

    아들을 돈 때문에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잘못이 없다고 반발하지도 않았다.

    이남희는 부모도 없이 이만큼 살아온 시현이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상처를 입혔으니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알아보지 않고 애먼 사람을 불렀나 봐. 무진이는 이제껏 무결점 같은 아들이었단다.”

    “…….”

    “결혼 문제로 집안 어른들을 속상하게 할 줄 몰랐어. 네가 아니어도 눈에 차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이런 사진을 받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남희는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그것보다 당연히 가난해서 돈을 밝히는 시현이 아들에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집으로 불러서 압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이다.

    한남동에 와서 시현이 무진과의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 행동이었다.

    격이 맞지 않으니까. 이런 사진이 찍혀서 백야 그룹에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시현하고 마주 앉아 있으니 이런 짓을 저지를 만큼 악해 보이지 않았다.

    두 번 만나서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없지만, 아들이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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