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74)

62.

자신과 시현하고 장소연은 접점이 없는데 주변에 알짱거린 적도 없었다. 할머니가 시현을 가난뱅이라고 그렇게 험담하더니 질 낮은 인간들을 이용했다고?

진보라 본부장의 비서로 인사했던 장소연조차 할머니의 사람이었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남자들은 장소연과 김기태가 저지른 거다? 정황상 김기태가 이시현한테 뭔 짓을 한 건가?”

“김기태도 이시현 씨를 길에서 망신을 줬습니다.”

보고 자료에 CCTV에 찍힌 김기태가 보였다.

시현의 오피스텔과 자신의 집 주변에서도 김기태의 자동차가 간간이 보일 정도이니 의심이 아니라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장님 댁에 도청 장치는 진보라 본부장의 짓이었습니다. 내부에, 그러니까 어르신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안 시스템에 걸리지 않은 거군.”

“그렇습니다.”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았어도 집에 침입하고 위협한 것과 그걸 사주했다는 것은 범죄인 것이다.

할머니는 시현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당분간은 지켜봐야 하나.

경고하고 진보라를 내쫓으면 나아질까.

장소연과 김기태라는 인간은 또 뭐야.

할머니가 감시자만 붙인 게 아니라고? 진보라까지 튀어나와서 미치게 하는 건지.

시현이 의심하는 말투였지만, 진보라는 그의 대학 친구였기에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1년 단기로 스카우트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무진은 진보라가 돈 때문에 그랬다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집에 도청 장치를 심어 둘 이유가 뭘까. 무엇을 알고 싶어서?

설마, 투자 회사에서 정보 빼기였나?

무진은 의구심을 가지고 홍선우 실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진보라 본부장은 사업하고 연관이 없어 보입니까?”

“어르신이 돈으로 매수한 장소연을 쫓다가 진보라 본부장도 걸린 겁니다. 자금 흐름을 쫓은 것을 토대로 장소연은 거액을 받았고 진보라 본부장은 다른 걸 약속받은 듯합니다.”

“돈이 흘러가지 않았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무실에서 이시현 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장소연이었습니다. 비서라서 남들 눈에 띄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모든 게 할머니가 사주한 거고?”

세상이 얼마나 흉흉하고 믿을 인간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친구가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의심이라도 했을까.

장소연은 원래 사기꾼이라고 해도 진보라까지 엮여 있다니 황당할 뿐이었다.

할머니가 연루된 이상 법적인 처벌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막대한 자금을 풀어서 증거까지 조작하려고 할 테니까.

할머니는 진보라까지 어떻게 회유해서 시현을 괴롭혔던 걸까.

무진은 추진하는 투자가 이익을 얻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증여받은 재산 중 일부로 TS 투자 자산 운용사를 인수하는 데 사용했다. 시현하고 결혼하기 전부터 투자 회사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친구인 진보라는 그런 무진의 계획을 조금 알고 있는 정도였다.

똑똑하고 냉철한 진보라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친분이 있고 사업으로 엮어도 오히려 잘 아는 사이니까 귀띔을 해 주는 게 나았을 텐데.

무진은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시현이 끝내 입을 다물어서 여기까지 커진 거 같았다.

왜 할머니의 돈을 받아서 이 사달을 만들었는지, 괜히 시현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니지. 일을 미친 듯이 하면서도 함께해 주는 걸 감사해야 하나.

“김기태를 잡아들이면 효과가 있겠습니까?”

“소용없을 겁니다. 장소연하고 한 팀이라서 둘을 한꺼번에 잡아도 증거가 될 만한 게 없습니다. 진보라 본부장이 도청 장치를 이용한 것도 처벌이 미미할 겁니다.”

막장 같은 드라마 한 편이 떠오르고 소름이 돋아서 짜증이 밀려왔다.

“강복희 사장님과 의논하고 어르신을 설득하는 게 빠를 겁니다. 회사 내의 소문은 이시현 씨와의 관계를 발표하면 말끔히 해결될 문제 같습니다.”

“홍 실장 말이 맞는 거 같군요. 어설픈 경고로는 해결돼도 찜찜하니까. 사주한 사람을 막아야겠습니다.”

“24시간 대기하는 방식으로 이시현 씨와 사장님 주변에 경호원을 배치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에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홍 실장 덕분에 든든합니다. 같이 일하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다음 보고 때 뵙겠습니다.”

홍 실장이 사무실을 나가고 무진은 좀처럼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무진은 장소연과 처음 듣는 김기태, 친구라 여겼던 진보라까지 나대는데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한마디라도 쏘아붙이면 좋을 텐데.

그는 시현의 안전이 중요했다.

헛짓거리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사랑하는 아내를 밀어낸 멍청이가 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 욕을 해 봤자 시현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것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돈을 받고 사라진 시현을 찾았을 때 할머니부터 막아야 했다.

시현을 이토록 괴롭힐 줄 예상하지 못했다고 변명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자신이 시현을 사랑하면 할머니가 포기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은 뭘까.

용서를 구해야 할 타이밍은 어찌해야 하나.

그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사랑이 시현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 

도청 장치가 걸렸다는 것을 전해 들은 진보라는 불안감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백야 그룹에 입성하는 게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무진에게서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닌 듯했다.

“얻은 것도 없이 도청 장치는 위험했어. 바보 같이.”

진보라는 왕 할머니가 제공한 5성급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1년 단기 스카우트에 연봉과 자동차 등 보장받은 게 많았다. 하지만 집을 따로 구하지 않고 호텔에서 편하게 생활하는 것을 택했다.

몇 달째 펜트하우스에 머물러서 편했는데 다 빼앗길 것 같았다.

보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몇 년을 흐지부지 무진의 곁을 맴돌면서 백야 그룹에서 일하고 성공한 삶을 살려고 했건만 제자리였다.

왕 할머니의 요구 조건 대로 시현을 무진의 곁에서 사라지게 할 방법만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격에 맞지 않은 인간들이 왜 헤어지지 않는 건데.”

무진과 시현이 함께 찍힌 사진을 바라보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녀의 문제가 둘이서 해결이 안 되면…….

이것저것 생각하던 보라의 눈이 커졌다.

한집에서 살지 않아도 일주일에 서너 번 밤을 지새운다?

그걸 다른 식으로 조작해서 이용하면 완전히 무진에게서 이시현을 떼어 놓을 수 있을 듯했다.

사진을 정 비서한테 받았지만 이용하는 것은 가진 자의 마음이었다.

“왕 할머니는 왜 이런 방식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쉬운 것을.”

시현을 아주 곤란하게 하고 오해받고 손가락질받게 되면 저절로 떨어질 게 뻔했다.

조작된 사진으로 시현이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할 방법을 계획하며 보라는 비릿하게 웃었다.

망신당하면 무진이 아무리 감싼다고 자리를 보존할 수 없을 테니까.

이시현 스스로 무진의 곁에서 사라질 수 있게, 포기하게 할 방법에 웃음꽃이 피었다.

“정말 재미있어.”

보라는 시현의 오피스텔에 무진이 들어가는 사진을 조작할 사람을 빠르게 구했다.

무진의 차를 운전하는 시현의 옆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해 두고 민원을 제기하듯 불쾌한 편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왕 할머니 말대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 며칠 사이에 보라가 바라는 게 손에 바로 떨어졌다.

왕 할머니가 점잖을 떠는 동안 보라는 무진의 어머니한테 조작된 사진과 편지가 배달되도록 했다.

하루에 세 번.

나흘간 보내진 물건을 보고 무진의 어머니가 사는 한남동에서 알아서 정리해 놓을 거로 생각했다.

회사 안에서 번진 추문은 실체가 없어서 흐지부지 말만 떠도는 것이었다. 배달된 사진과 익명의 편지는 다른 결과를 만들 거라 예상했다.

보라는 왕 할머니가 손에 쥐여 준 사진과 돈으로 시현을 떼어 놓는데 자유롭게 이용했다.

무진의 집에 도청 장치가 걸렸다는 것을 알고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고 조바심을 드러내며 무진의 어머니한테 계속해서 상자를 보냈다.

보라는 무진의 어머니가 어떻게 시현을 몰아낼지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왕 할머니를 만나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쉬운 걸 몇 달을 고생했잖아.”

익명으로 우편물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은 뒤 낄낄거렸다.

회사에 출근해도 무진의 태도가 변함없어서 보라는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 

한남동 무진의 본가.

외부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온 무진의 어머니 이남희는 아주머니가 가져오는 상자를 건네받았다.

“뭔가요?”

“아무거나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요. 보내는 사람 이름에 ‘중요’라고 쓰여서 보셔야 할 거 같았어요.”

“보낸 사람에 이름이 없다는 거네요.”

“위험한 물건은 아닌 듯한데, 없애는 게 나을까요?”

이남희는 자그마한 상자를 앞에 두고 고민했다.

백야 그룹과의 연줄 때문에 간혹 대가성 뇌물이 집에 오지만, 대부분 직원들 선에서 처리되었다.

굳이 가져와서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돌려보낼 것인지, 확인 후 버릴지 고심했다.

“내가 한번 보죠. 이거 언제 왔는지 확인은 된 건가요?”

“3시에 도착했습니다.”

“위험한 것은 아닌 건가요?”

“보안 팀에서 내용물이 종이같이 가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남희는 안방에 조심스레 상자를 들고 들어와 고개를 갸우뚱했다.

뇌물이든 선물이든 집안에는 아무것도 들이지 않아서 택배로도 오는 게 없었다.

의아하면서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해 이남희는 자그마한 상자를 열고, 또 안에 든 봉투를 꺼냈다.

편지지를 펼치고 첫 줄을 읽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시현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몸가짐을 조심하지 못하고 여러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이며 강무진 사장을 곤란하게 합니다. 비서라는 명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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