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74)

60.

왕 할머니보다 회사에서 퍼진 소문이 다시 부풀려서 여기저기 직원들 사이로 옮겨지고 있었다.

새로운 사장과 신입 비서가 사적으로 자주 목격이 되면 사내에 도는 추문은 더욱더 활활 탈 게 뻔했다.

그러면 이직하더라도 시현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가 평생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심히 거리를 두면서 서서히 관계를 정리하기를 바란 것인데 무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럽지 않은 데로 가려는데.”

“이것도 야근의 연장으로 봐도 무관한 건가요?”

“우리 사이에 데이트하는 걸 수당으로 다루는 건 별로지 않나. 공기 좋은 데서 밥 좀 먹자는 건데.”

“바쁜 시기가 지났다고 너무하네요.”

시현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그에게 한소리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시원하게 달리던 자동차는 순식간에 회사 건물이 즐비한 곳을 벗어나 나무가 울창한 수목원 근처에 도착했다.

“밤인데 여기서 뭘 하려고요?”

“저녁 먹는다고 했잖아. 시장에서 매번 반찬을 사는 거 같던데. 집밥 좋아하잖아.”

“…….”

“밤이라 쌀쌀해.”

차에서 내리자 코트를 어깨에 걸쳐 주며 자연스레 손을 올려 품으로 당기는데 거부하지 않았다.

허리에 팔을 감으니 과거로 돌아간 기분에 시현은 얼굴을 붉혔다.

밤이라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요리도 못 하니까 무진이 집밥을 먹여 준다고 가끔 아주머니를 불렀다.

한국에서도 그의 행동 중 하나는 집밥을 먹게 해 주는 것.

계약 중이어서 아직 이용 가치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성실한 남편인 척하는지.

시현은 모든 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왕 할머니나 어머니 집으로 가서 집밥 먹으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현은 가게 앞에서 눈이 반짝거렸다.

포장마차도 자신 때문에 알게 된 무진이 화려한 장식도 없고 약간 허름한 곳에서 식사하자고 할 줄 몰랐다.

아버지가 미국에 살면서도 해 준 밥이 좋았다.

다시는 먹을 수 없는 슬픔에 시장에서 밑반찬을 살 때도 아버지가 자주 해 준 반찬은 사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정겨운 시골 할머니 집 같은 구수한 밥 냄새에 시현은 예민해진 신경이 느슨해지는 듯했다.

식당 근처에 수목원이 있어서 풀 냄새도 꽃향기도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크지 않은 식당에 막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이 있어서 단둘이 멋쩍게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는 어떻게 안 거예요?”

“어머니가 알려 줬어. 한국에 올 때마다 매번 들렸던 곳이야.”

어머니? 시현은 단 한 번 만났던 무진의 어머니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만나기 전에는 그가 백야 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제일 먼저 인터넷으로 가족을 검색해 보았다.

왕 할머니와 어머니, 사촌들 사진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자신에게 무진을 놓아 달라고 했으니까 이 식당은 그를 위한 추천이었다.

“맛있나 봐요. 그런데 나하고 온 거 알면 난리가 나지 않겠어요?”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된장찌개 단일 메뉴에 추가로 고추장 불고기, 갈치구이를 주문하고 있었다.

손님이 한차례 빠져나가 한 상 가득 반찬과 밥, 국 등 주문한 음식은 빠르게 나왔다.

그는 고추장 불고기를 깻잎에 싸서 시현의 접시에 올렸다.

시현은 지금 그의 행동에서 데자뷔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에 살면서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고, 한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쌈을 싸서 서로 먹여 주던 게 떠올랐다.

순간 울컥한 나머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같이 살면서 요리를 못 하는 시현을 배려해서 그는 불고기뿐만 아니라 생선도 어떻게 공수하는지 자주 구워 먹게 했다.

어느 날부터 김치찌개는 주식처럼 자주 밥상에 올라올 정도였다.

생선 가시를 잘 바르지 못하는 시현에게 아버지가 해 주듯 그가 가시를 발라서 밥에 올렸다.

말없이 그가 접시에 올린 깻잎에 싼 고추장 불고기를 먹었다.

포장 음식과 햄버거, 피자를 먹을 때도 좋았고 아버지처럼 그에게 챙김을 받을 땐 행복했었다.

“나는 안 줘?”

주는 것만 받아먹다가 머쓱해진 시현은 상추에 고기, 마늘, 고추를 서너 개 넣어서 크게 쌈을 만들었다.

입에 넣어달라는 무진의 제스처에 시현은 눈을 흘겨보았다.

고집스러운 무진을 꺾지 못하고 상추쌈을 먹여 주었다.

“손맛 때문인가. 약간 짜고 매운데.”

“쌈 싸는 사람 마음이죠. 짜고 매우면 알아서 먹어요.”

“하나 더 만들어 줘.”

일부러 말을 피하려는 시현한테 짓궂게 말하면서 서로의 접시에 깻잎쌈, 상추쌈을 건네주고 있었다.

김치 한 조각, 반찬 한 개라도 남기지 못할 정도였다.

생선구이는 가시만 남고, 고추장 불고기는 고기 한 점 남지 않았다.

된장찌개도 밥에 쓱쓱 비벼서 뚝배기에는 흔적도 없고 한 상 가득했던 접시는 깔끔히 비워지고 있었다.

“정말 맛있는 식당이네요. 물조차도 맛있어요.”

“잘 먹어서 다행이야. 일은 줄어들었는데 말라 보였어. 여기가 평일 늦은 시각에는 그나마 기다리지 않는데 금요일과 주말은 몇 시간을 기다려 먹는 곳이거든.”

“몇 시간 기다려도 먹을 만한데요.”

“또 오면 되니까 언제든지 말해.”

내년에 박 실장하고 같이 일할 비서가 온다고 들었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있어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또 오자는 말은 계약이 끝난 이후일까?

시현은 다음을 기약하는 짓은 더는 안 하고 싶었다.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면 왕 할머니하고의 연관성 때문에 저절로 무진하고의 계약이 끝날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붙잡을 명분이 말끔히 사라지는 거니까.

그런데 그에게 미련이 가득하지 않다고 온 마음을 다하는데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식당 밖을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서 아기자기한 소품 속에 형형색색 빛이 옅게 펴져 보였다.

바람이 차서 팔로 몸을 감싸니 그가 시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말없이 전통차, 전통 음료만 판다는 카페로 가서 식혜와 오미자차를 주문하고 야외로 나왔다.

건물 주변에 소품과 색이 있는 전구를 이용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에 눈길이 갔다.

자연 속이어서 그런지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착시 효과.

멍해진 채로 시현은 그와 자신의 관계도 착시 효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는 거 같았다.

혼인 중인 사이에 계약의 의무만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은 변태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누구도 입 밖으로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데이트하며 즐거워하는 것도 착각일 테니까.

계약 때문에 그와 가끔 저녁을 먹는 게 정상은 아닌데 무엇 때문에 놓지 못하는 건가.

계약은 핑계고 그의 집에 머무는 것도 여러 날이었다.

밀어내기만 하던 무진과 시현의 사이에는 고요와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저녁을 먹고 무진의 집에 온 시현은 욕실을 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서 뭔가 발견한 건 아니겠지.’

설렘보다는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의 집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누군가 지켜보는 느낌은 없으니 자신의 오피스텔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사무실에서 시현의 물건을 손댄 사람과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꽃다발을 보낸 사람에 관해서만 알고 물었으니까.

침실이 있는 2층만 조금 둘러보고는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자조적인 웃음을 흘러나왔다.

‘나라고 그를 침대에서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런데도 쉽게 움직이지 않으니 그가 그녀의 팔을 살며시 잡아 손가락 끝부터 입맞춤했다.

서서히 올라와 서로를 갈망하듯 입술이 맞닿고 숨결이 뒤섞였다.

그녀의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 잡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리는 무진.

“널 안고 싶어.”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스치며 그의 눈은 욕망으로 번져 갔다.

그의 손길에 몸이 달아오른 그녀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그가 원하는 말을 속삭였다.

“안아 줘요.”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며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시현은 그를 보면서 지금 보이는 게 착각이라고, 침실의 분위기 때문에 착시 효과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프러포즈할 때처럼 조금은 짓궂어 보였지만 애정이 있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열기를 담아서.

즉흥적이어서 불꽃은 없었지만 둘이 하나가 되던 날처럼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하얀 피부처럼 맑은 그녀의 눈에 자신을 비춰 보는 듯.

그의 손이 불처럼 뜨거웠다.

“무진 씨…….”

“다시 불러 봐. 내 이름.”

“무진…….”

그녀의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짙은 욕망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밀어붙인 계약으로 시작된 키스.

그렇기에 거부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닿기도 전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의 입술에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입술이, 손이 탐험을 시작하자 그녀의 얼굴은 붉게 타올랐다.

눈을 감은 채 상대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당신 피부는 솜사탕 같아. 부드럽고 달아.”

그의 말을 들으면 몸이 더 민감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짓궂게 구는 무진을 밀치고 침대 시트로 몸을 가리려고 손을 뻗었다.

“당신이 아무리 몸을 가려도 예쁘고 민감한 데를 다 알아.”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아는 걸 안다고 하는데 뭐?”

뭐라고 해도 웃으며 야릇한 말을 했다.

그는 시현을 소유하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이 집착과 광기인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돈을 받고 도망쳤던 시현으로 인해 상처받은 것은 아물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려면 모든 것을 알고 싶은데도 여전히 고집불통으로 말하지 않는 시현이 미울 때가 있었다.

계약은 핑계이고 시현과의 결혼을 유지하고 싶었다.

돈을 받았어도 할머니한테 회유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꼴사나운데도 시현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미친 집착을 보이면 이시현은 도망가겠지.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걸 경험했다. 하지만 시현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게 분명했다.

그는 평범한 삶을 바란 게 아니라 사랑하며 행복을 기대한 것뿐인데, 결혼이 조각날까 봐 걱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