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4)

59.

무진은 조금 전에 대면한 놈만 생각해도 역겹고 화가 치미는데 시현은 어땠을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낼게. 집에서도 당신이 예민하게 굴었던 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

“당신 말 다 믿으니까 이제는 숨기려고 하지 마.”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였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행위였다.

진정 할머니가 사람을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시현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할머니를 배제할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니까. 자신이 시현을 사랑하니까 할머니가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았다.

이렇게 옭아매는 느낌이 시현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집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킬 뻔한 시현의 아픔이 왜 이제야 느껴졌을까.

무진은 시현에게 미안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그래도 해결 방법을 이제라도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현이 또다시 도망가게 할 수 없으니까.

“시현아.”

“…….”

“네가 말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어. 할머니가 너에게……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늦지 않게 해결할게.”

“알았어요.”

무진이 깊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시현아.”

“알았으니까 회사 내에 퍼진 소문부터 어떻게 해 봐요. 최소 1년 경력이라도 쌓으려면 계속 다녀야 하잖아요.”

시현은 엄마하고 얽힌 얘기까지 해야 하나 고심했지만, 백혜련이 엄마라는 걸 알렸으니 더는 깊이 파헤치지 않길 바랐다.

사람들을 조사한다는데 그것이 계약과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시현은 그가 누구와 결혼하든 왕 할머니의 계략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너한테 이런 짓을 했는데 더는 참을 수 없어. 할머니라도 참지 않을 거고 너에게 사과하게 할 거야. 그때까지 조심했으면 해.”

“알았어요.”

시현은 대답만 했다.

그런데 시현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오피스텔을 둘러봐도 될까?”

“왜요?”

“내 집에서 이상한 걸 봤으니까. 오피스텔도 보안을 점검하는 게 어때?”

“괜찮아요. 그 좁은 집에 보안 점검이라니요. 그렇게까지 하지 말아요.”

자신의 집에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지만 대충 얼버무리며 시현은 무진하고 계약과 결혼을 정리하는 것만 생각했다.

옳은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매일 되새기고 있었다.

진보라 본부장과 장소연이 왜 회사까지 왔는지, 엄마가 자신을 쫓아내려고 애쓰는지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지 마. 혹시 모를 일을.”

“정말 괜찮아요.”

“시현아.”

“누가 되었든 왕 할머니가 뒤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난 무진 씨가 가족을 등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 회사 내의 소문만 해결하면 돼요.”

솔직히 무진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백야 그룹과 강무진하고 관련이 없는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 다닐 수 없다면 위자료를 받아서 혹은, 왕 할머니한테 받은 돈으로 창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로열패밀리인 강무진 덕분에 먹고사는 것에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게 덜 상처받는 거였다.

그러니까 왕 할머니가 배후이든 아니든 소문만 없애고 싶었다.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과 장소연, 백혜련까지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한 가지만 생각해도 답이 나왔다.

그에게는 가족이고 애정을 듬뿍 준 할머니를 지목하는 게 어려울 것이다.

시현은 왕 할머니가 말투와 얄팍한 가면을 쓴 채 무진에게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아니, 영원히 무진이 왕 할머니의 속을 알지 않기를 원했다.

“계약 조건은 잘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소문을 해결해요.”

“우리가 부부인 건 자각하고 있는 건가?”

“사적인 얘기는 이쯤 하면 되겠습니다. 계약과 결혼이 엮여 있다는 거 인지하고 있습니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 내가 참지 않는다고 하잖아. 할머니라도.”

시현은 따지면서 싸움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다. 왕 할머니하고의 만남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가족을 버리는 것은 나빠요.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할머니와 무진 씨가 화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요.”

시현은 왕 할머니와 진보라의 막말, 괴롭힘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 두려웠다.

돈을 받고 도망쳤을 때 사랑을 깊이 묻어 버렸다.

감추어야 하는 감정이 어떠한 계기로 드러날까 두려운 게 진짜 마음이었다.

누가,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것 같아도 밝히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를 사랑하는 만큼 믿지 않고 도망친 탓이었다.

지금 가족으로부터 받는 위협에 결혼을 유지한들 무진과 자신에게 좋은 게 아니었다.

그는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널 해코지했다면 참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기다려.”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 소문부터 해결하라고요.”

“할머니를 만나서 모종의 거래라도 한 거야? 그래서 나와 손을 잡았다고 할머니가 널 괴롭히는 거냐고.”

“거래요? 그냥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요. 더는.”

“이게 귀찮은 일이야? 널 이유 없이 괴롭히는 건데?”

이유가 없다고?

백야 그룹 강무진하고 결혼했다고 이 난리가 나는 건데 이유를 몰라?

시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람을 이유 없이 싫어할 수 없다고.

그 같잖은 이유가 가난하고 부모가 없어서라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가 모르니까 기운이 빠졌다.

한 번이라도 좌절한 적이 있으니 평범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왕 할머니의 말이 맞는 걸까.

쥐고 흔들며 마음껏 데리고 놀기에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손쉬운 존재였던 걸까.

아니면 할머니한테 반발하는 것은 그저 손에 든 인형을 빼앗기기 싫어서일까.

시현의 마음 한쪽은 인연을 쉽게 생각하는 그에게 미움이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계약대로 몇 달 동안 그가 원하는 것을 다 했다.

하지만 변화는커녕 왕 할머니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가족 앞에 시현을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부끄러운 존재거나 하찮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왕 할머니하고의 기 싸움이기에 그의 가족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고.

시현은 감정에 휩쓸러 무진의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를 의지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이쯤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아니, 강무진과 계약과 결혼을 정리해서 남남이 되면 어쩌면…… 괴롭힘은 완전히 끝나는 것을 확신했다.

다만 자신이 직접 헤집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해결할 수 있는데 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면.”

“무진 씨.”

사무실에서 적절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려고 이름을 부르며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우리 여기까지 해요. 계약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갈지, 멈출지 알아야겠죠. 지금은 멈출 때라고요.”

시현은 결혼과 계약, 사장과 비서의 관계도 끊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 멍청이라고 속으로 욕하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결혼해서 계약부터 정리했어야 했던 것을 뭉그적거렸다.

그사이 관계 회복을 위한 어떠한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알아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걸 정리할 생각이니 누구도 알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이곳저곳 휘저어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그 끝을 알기에 무진을 바라보며 웃으며 묻어 두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렇게라도 그의 곁에 잠시 머무는 게 옳은 것인지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약간의 보상처럼 생각되었다.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해 봤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픈 마음은 잠시 묻어 두고 참다가 흐릿해질 테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든 다시는 다치는 일이 없게 할게. 그러니까.”

“오피스텔은 그냥 둬요. 내게서 빼앗아 가는 거 아니면 내 공간에 절대로 들어오지 말아요.”

“시현아.”

“아무 때나 오지 말아요. 그러면 다 제자리로 갈 테니까요.”

“자꾸 삐딱하게 그럴 건가?”

본질을 모르는 듯한 그에게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왕 할머니가 진보라, 장소연, 백혜련하고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가족의 싸움으로 만드는 것도 꺼림칙했다.

그래서 깊이 파고들어도 누가 걸릴지 알 수 없을 때 시현은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일단은 자신을 낳아 주었다는 이유로 엄마 자리를 잡고 있는 백혜련까지 위협하는데 복잡하게 얽힐 수 없었다.

법으로 처리할 수 없는데 긁어 부스럼이 되는 걸 보고만 있는 것도 거북했다.

왕 할머니를 누구하고도 연관이 있는지 찾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더.

“힘든 일 있으면…….”

“힘들지 않아요.”

시현은 복잡하게 고민은 더는 안 하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가져오겠습니다.”

뒤돌아 나가는 자신을 잡은 않는 무진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뜻대로 안 돼서 짜증이 가득할 거 같았다.

*** 

입이 방정이었을까.

무진의 행동이 지나치게 변했다.

이전의 변화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눌러 둔 쌓인 감정은 꺼내지 못해도 남편의 비서로, 계약의 의무로 뿌리치지 않고 만났다.

계약이라는 허울 안에서 일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모순이었다.

시현은 어쩔 수 없다면서도 같은 층에 있는 진보라 본부장의 행동도 조심스레 신경 쓰고 있었다. 출근이 불규칙한 장소연까지.

해결하겠다는 무진의 행동에 많은 변화가 생긴 건 시현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저녁을 같이 먹고 온갖 핑계를 들어 주말에도 만남을 이어왔다.

“일이 많다고 말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퇴근하고 어디는 가는 거예요?”

지금 누군가 무진과 자신을 본다면 영락없이 데이트라고 할 것 같을 정도였다.

감시자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뮤지컬도 보고 강릉, 태안으로 여행도 가는데, 이게 뭔 대수일까 싶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