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74)
  • 58.

    무진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우는 듯한 시현의 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역한 냄새의 원인을 찾아볼 새도 없이 온 집 안에 불을 켜둔 채, 서재로 도로 가서 핸드폰을 들었다.

    “강무진입니다.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합니다만, 연말까지 우선 할 일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박 실장한테 언질은 받았습니다. 여기 일도 내일이면 마무리하니까 바로 일해도 됩니다.

    무진은 내년부터 박 실장하고 같이 일할 홍선우 실장한테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개인적인 일을 부탁했다.

    “경호업체를 연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집에 쥐새끼가 들어오는 모양인데 확실하게 잡을 만한 장비와 사람도 필요하고요.”

    -사장님의 경호입니까?

    “아닙니다. 안사람 주변에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이 있는 거 같은데 잡지 못했습니다. 감시 목적이 아니라 보호 목적이니까 일을 잘하는 사람을 구했으면 합니다.”

    -이시현 씨 모르게 하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경호원과 집, 사무실에 보안 경비를 강화하겠습니다. 여기 일 마무리하고 따로 보고하겠습니다.

    “늦은 시간인데 고맙습니다. 난 며칠간 호텔에서 지낼 테니 집은 완전히 뒤집어 놓아도 됩니다.”

    전화를 끊고 무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겁에 질린 시현의 표정을 보니까 뭐라도 해야 했다.

    이것저것 조사하고 있고 결과를 받아 보았지만, 할머니가 뚜렷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시현에게 털어놓지 못한 게 많았다.

    솔직히 깜짝 놀라서 울먹이는 아내를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가 붙은 감시자가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밖에서 지켜보고 한 방에 시현을 나락으로 보낼 만한 것을 찍어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감시자가 변질했다고 생각하는 시현의 처지도 이해가 되었다.

    지켜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다가오니까 말이다.

    무진은 시현이 말한 대로 친구인 진보라 본부장부터 장소연, 그리고 시현의 어머니인 백혜련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시현을 때린 사람이 백혜련이라는 것에 경악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시현이 알면 속상해할까 봐 모른 척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시현을 괴롭게 하는 일에 할머니가 얽힌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기서 더 시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 

    며칠 후, 무진은 홍선우 실장의 연락을 받았다.

    -경호원은 만나 보셨습니까?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자분들이 경호 일정도 제때 보고해 주고 있어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댁에서 도청 장치를 두 개 발견했습니다. 침실과 거실에 각각 있었는데 어디로 전송되는 게 아니라 저장 장치가 있어서 누군가 드나든 것 같습니다.

    “도청? 서재에서 가끔 일하는데, 서재에는 없었습니까?”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사장님이 사용하는 침실과 거실에만 발견된 건 개인적인 일 같다고 하더군요. 보안 카메라를 추가로 달았고 사장님이 출타하면 바로 작동됩니다.

    “회사 일을 집에 가져와서는 안 되겠군. 출근 전까지 이 일을 우선으로 알아봐 주기를 바랍니다. 개인 일을 부탁할 만한 데가 없어서 미안합니다.”

    -믿고 맡겨 주시니 저는 인정받는 기분입니다. 이시현 씨의 오피스텔은 본인의 허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니까 얘기 한번 얘기를 잘해 보십시오.

    무진은 통화를 끝내고 그저께 박 실장한테 시현이 하소연하는 것을 곱씹었다.

    꽃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이 시현의 개인적인 일이어서 보고를 안 한 것 같았다.

    또한 도발하는 듯 시현이 가끔 가는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친 남자가 있으며, 길에서 망신당했다고 했다.

    신고하라는 박 실장의 말에 시현이 막아서며 어떤 일에도 연루되기 싫다고 말했다.

    “꽃이라니…… 로맨틱하게 괴롭히는 건가.”

    경호원을 둬도 집을 뒤집어 발견된 도청 장치도 할머니가 한 일 같이 않았다.

    희한한 일인데 무엇도 누가 했는지 왜 그런지 알 수 없다는 게 무진을 한계로 몰아가는 기분이었다.

    부디 할머니가 벌인 일이 아니길.

    *** 

    무진과 시현의 사이에 문제가 없자 더 조급해진 장소연의 집착은 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현만 미치게 하려던 계획을 무진에게까지 뻗친 것이다.

    정 비서하고 의논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람을 사서 무진의 집에 침입한 것이다.

    무진이 뭘 하는지 말소리를 들으려고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돈만 주면 범죄자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검침하는 사람으로 위장해서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저장된 걸 가지고 오게 했다.

    장소연의 집착은 성공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비롯되었다. 시현과 무진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정보가 필요했다.

    남녀의 관계는 배신으로 끝장난다는 걸 시험이라도 하듯 시현의 주변에 여러 명의 남자가 접근하게 했다.

    시현한테 경호원이 생긴 걸 몰랐는지, 꽃을 사무실로 몇 번 보낸 남자가 잡혔다.

    무진은 시현한테 접근한 사람 자체가 없었는데, 의아하다는 생각보다는 기가 찼다.

    “최문규 씨. 이시현이라는 사람을 압니까?”

    TS 투자 자산 운용사 소회의실에서 마주한 남자는 키도 190cm가 되고 웃지 않아 위협적인 홍선우 실장이었다.

    그보다 뒤쪽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의뢰인이 보여 준 강무진이라서 움찔했다.

    “다시 묻습니다. 이시현을 압니까?”

    “알, 알아요. 몇 달 전부터 사귀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저를…… 왜 이런 곳에 끌고 와서.”

    “끌고 오다니요. 몸이 결박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원하면 언제든지 여기를 나가도 됩니다.”

    “그건…….”

    무서울 것이다.

    회의실 테이블에 똑같이 시현에게 하듯 꽃바구니를 선물한 최문규를 쫓은 것처럼 찍은 사진이 쫙 펼쳐지자 최문규의 얼굴이 굳었다.

    “사귀는 사이라서 꽃다발을 보낸 거다. 이겁니까?”

    “그게…….”

    “여기는 TS 투자 자산 운용사 회의실이지 심문하는 사법 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딱딱한 홍선우 실장의 말투는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높낮이가 없는 말투에 건장한 체구는 상대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어 보일 테니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는 행동도 무언의 압박으로 보이는 것은 죄를 지으면 더러 겁부터 먹게 되니 움찔할 수밖에.

    “돈을 받았습니다.”

    최문규가 포기한 듯 말했다.

    “어떻게 받았습니까?”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소개받은 겁니다. 간단한 일이라면서 이 여자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꽃다발을 회사로 보내면 돈을 준다고 했습니다. 꽃을 보내면 백만 원, 만나서 말이라도 하면 2백만 원을 받는데,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돈은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통장에 확실하게 꽂아 주는데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아서 몇 가지 질문을 해 봤지만, 누가 시킨 일인지는 본인도 모르는 듯했다.

    두 달 전부터 이시현을 따라다녔는데, 돈을 준 사람도 모르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였다.

    무진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무진이 최문규 앞에 다가가서 물었다.

    “이 일이 범죄라는 거 아는 건가? 한 번 더 이런 짓거리 하면 조용히 안 끝나.  이런 일을 소개한 사람은 만났을 테니 연락처 넘기고 꺼져.”

    최문규는 득달같이 앞에 놓인 종이에 일을 소개한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 놓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제기랄.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무진은 최문규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일이 커져서 곤란한 것은 시현이었기에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랐다.

    무진은 돈을 쓰는 배포나 시현에게 불명예를 끼칠 사람이 한정적이라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어디 가서 손가락질받을 만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으니 시현이 누군가의 미움을 받았다고 볼 수 없었다.

    할머니 때문에 망신당하는 것이 시현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장님, 저 사람이 집에 침입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온종일 게임만 하는 놈이 허우대가 멀쩡하니 이용하기 좋다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보안을 뚫고 내 집에 침입할 정도면 전문가거나 내부에서 도움을 받았을 겁니다.”

    “진보라 본부장과 장소연, 백혜련까지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그리고 저 최문규는 아마 돈이 필요하면 또다시 헛짓거리할 인간입니다.”

    “이 일은 홍 실장한테 일임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그룹 일과 투자사까지 몸이 두 개라도 남지 않을 정도라서.”

    “알겠습니다.”

    *** 

    소회의실을 나와 사무실에 간 무진은 시현의 책상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 비서, 잠깐 나 좀 보지.”

    “네.”

    잠시 후 무진의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시현은 그가 하려는 말이 뭔지 몰라서 눈만 깜박였다.

    시현은 머리를 굴리며 실수한 업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 크게 질책을 받고 이후 박 실장한테 매번 재검토를 받고 있었다. 무진에게 정리해서 올라갈 자료는 허투루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회사 일이 아니면 따로 할 말은 없었기에 그가 묻는 말에 당황했다.

    “저번에 내 집에서 뭘 본 거지?”

    느닷없는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사무실 물건을 손대는 사람이 있고…… 이상한 냄새를.”

    “꽃다발 보내는 놈도 있다고?”

    “……네?”

    “사무실에서 생긴 일을 내가 모를 거 같아서 정작 할 말은 쏙 뺀 건가? 아는 놈도 아닐 텐데 보안 팀에 신고라도 하지 가만히 있었어?”

    “확실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 실장이 보고하지 않아서 굳이 그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사장실에 누군가 드나든다면 보안보다 투자 문제가 불거질 테니까.

    구멍가게도 아니고 투자 회사인데다가 인수 합병으로 한창 바쁜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현은 계약과 결혼이 해결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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