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74)
  • 57.

    무진의 저택.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시현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접점이 없다고 생각한 일을 곱씹으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장소연과 진보라 본부장, 그리고 엄마의 막말이 뭐가 맞아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뭘 원하는지 몰라도 더럽고 추해.”

    시현은 무진을 돈 때문에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백야 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거리감을 느꼈다. 결혼했어도 보이지 않는 벽이 단단히 가로막는 것 같았으니까.

    그가 백야 그룹의 최대 주주이자 차가 총수가 된다는 것을 왕 할머니의 등장으로 알았다.

    그래서 온몸으로 무게감에 짓눌려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랑 하나에 맹목적인 것은 그가 가진 재력이 아니었다.

    프러포즈는 가볍고 결혼은 즉흥적이었지만 신 앞에서 장난스러운 사랑의 맹세가 진짜라고 믿었다.

    무진의 올곧은 눈빛 때문이었다.

    누구의 아들, 로열패밀리가 아닌 한 남자로 바라보았다.

    실질적으로 백야 그룹의 최대 주주로 확고한 자리에 세를 불리는 그의 진취적인 행보에 수군대는 사람도 많지만.

    왕 할머니가 돈 없는 거지라며 그의 옆에서 시현이 할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시현은 묵묵히 할 수 있는 게 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1년이 채 되지 않은 만남과 계약 그리고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마음이 작은 게 아니었으니까.

    사랑하는 마음에 서서히 망가지는 게 싫었다.

    돈을 받고 무진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낸 것에 조금, 아주 조금 감동했다.

    호텔에 숨어서 스트레스에 불안 장애로 고생했지만, 무진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었다.

    장난감일까?

    함부로 해도 되는 인형 놀이에 당첨이 된 걸까?

    사랑에 지쳤고 엄마까지 모질게 돈 봉투를 주며 쫓아내려고 하니까 지겨워졌다.

    계약이고 결혼이고 다 버려두고 숨고 싶었다.

    “후유…….”

    시현은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 외에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다시금 되살리는 듯 눈을 감아 보았다.

    그날, 무진의 집을 나와 지친 상태로 곧장 침대에 뻗어 자다가 깼다.

    “왜 깼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으며 혼잣말을 나직이 내뱉으며 오피스텔을 둘러보는 느낌을 살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침실을 나와 주방 겸 거실, 욕실, 보일러실까지 둘러봤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맞아. 오피스텔은 아침에 출근한 그대로였어.

    시장에서 산 밑반찬이 냉장고에 있지만, 밥을 해 먹을 시간이 마땅치 않아 주말이면 비빔밥으로 반찬을 쏟아 넣고 먹었다.

    “냉장고도 열어 볼 거 그랬나. 아! 무슨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너무 진하게 느껴져서 누군가 쏟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단순히 예민해서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거 같아서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을 둘러보고 다시 잠들었다.

    다음에는?

    그 이전에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 것은 며칠 전이었다. 물건에 손을 댄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왜 서늘한 눈빛을 느꼈을까.

    시현은 보통 퇴근해서 집에 가면 씻고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며 꼼짝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

    몸이 힘들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기에 아르바이트하던 시기에도 몸을 혹사할 때가 있었다.

    “또 그런 일이 있었을까?”

    없었다.

    한국에 온 지 불과 몇 달 지났을 뿐이었다.

    사무실에서 물건에 손을 타는 것도 소름이 끼치는데, 막말까지 들어야 했다.

    시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사무실을 헤집는 사람이 있다면 무진의 집은?

    시현은 감았던 눈을 뜨고 무진의 집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선 채로 다시 눈을 감고 오피스텔에서의 느낌과 지금 무진의 집에서 싸한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 봤다.

    꿈이라도 꾸는 듯…… 눈이 번쩍 떠졌다.

    뭐야? 이 느낌.

    진흙 같은 어둠이 깔리는 시각.

    거실에 작은 조명을 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사물이 잘 보였다. 사람 형체는 없어도 남자 화장품 냄새가 희미하게 땀과 섞인 듯했다.

    당황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안이 철저한 무진의 저택.

    담벼락도 높고 사방에 보안 장비가 깔려 있어서 도둑이 든 것 같지는 않은데,

    누군가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할 수 없는 곳.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불쾌한 냄새만 나니까 서재에 있는 무진을 불러야 할지, 그냥 소리를 내질러야 할지.

    시현은 숨이 막혔다.

    “꿈인가. 소파에서 잠들어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어디선가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까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시현.

    그녀에게 다급하게 다가오는 손길은 무진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서재 문이 열리면서 들렸던 소리는 문을 여닫는 게 아니라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았는데.

    “무진 씨?”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건가?”

    시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주방에 가서 바닥을 살피고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하려고 심호흡했다.

    따라온 무진이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시현은 뒤돌아서 무진을 빤히 보다가 손끝으로 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가리켰다.

    “무진 씨가 깬 거예요?”

    “방금 서재에서 나왔는데 이걸 내가 깼다고? 집에 와서 아까 생수 꺼내고 나서 주방에는 안 들어갔는데.”

    “이거 내가 깬 거 아니에요. 혹시 모르니까 무진 씨 안팎으로 보안 시설을 검사해 봐요.”

    “뜬금없이 왜 이래?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러면 나라도 무섭다고. 혼자 지내는 집에 귀신이라도 있다는 건가?”

    말할까?

    이렇게 좋은 집에 보안 장비도 만만치 않은 공간에 누군가 몰래 들어왔다고 말하면 믿을까. 분명히 남자 화장품과 땀 냄새가 섞인 불쾌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무진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미국에서부터 시현이 추천한 걸 지금도 쓰고 있기에 다른 냄새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진은 향수를 쓰지 않았다.

    화장품도 향이 거의 없는 천연 제품에 가까운 것을 사용하는데.

    싸구려 화장품은 아니었지만, 향이 강하고 땀 냄새까지 섞여 희미해도 역하게 느껴졌다.

    설마, 사장실을 드나드는 사람이 무진의 집까지 들어왔을까.

    시현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면서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말을 해. 뭔데 소리를 지르고 깨진 유리잔을 보라고 했는지.”

    “…….”

    망설이는 시현을 보며 그는 주방을 나가 집안 전체 불을 다 켰다.

    누군가 침입하면 울리는 보안 경보도 살펴보고 자신이 있었던 서재부터 침실, 주방, 차고, 정원까지 둘러보았다.

    급하게 집을 사들였지만 500평이 넘는 저택이었다.

    정원을 조성한 부지와 주차장을 빼고 2층 건물이 250평이었다. 수영장, 와인저장고, 라운지에 침실만 해도 8개, 욕실은 사우나 시설까지 해서 10개였다.

    그래서 침입자가 있으면 보안 시스템이 울리고 보안 요원과 경찰까지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집안을 쭉 둘러보던 무진은 창고로 쓰이는 자그마한 공간 주변으로 움푹 파인 흔적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침입할 수 없는 곳이어서 정원사가 실수한 거로 생각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진은 집을 둘러보고 올 때까지 주방 바닥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시현 곁에 서서  툭 말했다.

    “뭔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어.”

    “…….”

    “잠결에 뭘 보고 놀란 모양인데…….”

    “미안해요.”

    시현은 자신만 냄새를 맡았다는 게 소름이 돋아서 화장실로 가 변기 뚜껑을 열고 구역질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무진하고 끝이 좋지 않아도 짧지만 강렬하고 행복한 시절이 있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한몫 잡겠다고 무진에게 몸을 던졌냐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무진을 사랑하는 건 순수한 감정이자 열화 같은 것이었다.

    “이시현. 문 열어!”

    화장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숨을 죽이고 눈물을 흘렸다.

    목 놓아 울고 싶어도 그의 집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꾹꾹 감정을 눌렀다.

    ‘나만 없으면 될까. 정말 사라지면 나쁜 일이 안 생기는 걸까.’

    작은 바람은 그저…… 소문의 진상만이라도 조사해 달라는 거였는데.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만약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뭐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은 미국에서 적응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어차피 미국이나 한국이나 가까운 사람이 없으니까 동생이 원하는 곳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게 된 남자는 가져서는 안 되는

    “이시현. 거기서 뭐 해? 안 나오면 문 부순다. 문이라도 열어.”

    바닥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시현은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문을 열었다.

    “무서운 꿈을 꿔서 그래요. 깨진 유리잔은 무진 씨가 치워요. 자야겠어요.”

    “얘기 좀 해.”

    “할 말이 없어요. 오늘 기분이 별로인가 봐요.”

    시현은 붙잡는 그의 손을 쳐냈다.

    스치듯 옆으로 지나가면서 시현은 우리의 인연은 이렇듯 지나가면 끝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의 침실이 아닌 여러 방 중에 제일 작은 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근 시현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무진의 집은 안전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누군가 있다는 생각만 해도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울지 않으려고 꾹꾹 울음을 삼켜 보지만, 숨을 죽이며 눈물만 흘릴 뿐이다.

    ‘정말 기분 나빠. 강무진도 미워.’

    멍해진 무진은 시현이 작은 방으로 뛰어가는 걸 붙잡지 않았다.

    집에 와서 아무 짓도 안 하겠다고 한 말은 지켜야 하니까.

    계약대로 할머니가 그의 결혼을 포기하면 시현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했다. 그래서 붙잡을 기회를 보며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서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피하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무진은 주방 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치우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 이게 무슨 냄새야.”

    사용하지 않은 방향제 냄새가 역하게 났다.

    냉장고에 먹을 게 있다고 해도 썩은 것도 아닐 텐데, 희한하게 집에는 없을 방향제에 뭔가 섞인 냄새가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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