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74)
  • 56.

    운전하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식당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생각한 시현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내려서 택시를 탈게요.”

    “그냥 집에서 쉬다가 출근해. 드레스룸에 당신 옷 여러 벌 있잖아.”

    시현은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하는 말에 뭐라고 대꾸할 힘이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해. 너랑 결혼한 남편 집이야.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도 아닌데 인상 좀 펴.”

    “이러는 거 정말 어떻게든 정리해야 해요. 계약이든 우리 결혼 문제든.”

    “지금은 널 집으로 돌려보내면 안 될 거 같아.”

    차고에 들어선 차 안에서 버티던 시현은 꿈쩍하지 않는 무진의 옆얼굴을 보다가 차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은 무진과 시현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은 식당 매니저한테 연락받기로 했지만, 시현의 상태를 보아하니 해코지를 당한 게 틀림없었다.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그냥 내 실수니까요.”

    “말을 해야 듣는 거고 그렇게 풀어내는 게 좋지 않아?”

    “어차피 우리는 계약과 결혼을 정리할 사이예요.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일 얘기가 아니잖아.”

    “무진 씨.”

    “알았어. 알았으니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쉬어. 난 서재에 있을 테니까.”

    그의 집에 간단한 화장품이며 옷이 있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

    시현은 무진이 서재로 가서 문을 닫자 그제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룸에서 그의 티셔츠랑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속옷, 반바지를 챙겨서 욕실로 갔다.

    한참 후에 차가운 얼음물을 손에 들고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서 달랐을까.

    시현은 동생이 난생처음 저지른 실수를 덮어 주고 싶었다. 큰돈이 필요해서 무진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데이트를 두 번 하고 계약금 5천만 원외에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결혼은…… 너무 행복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행복으로 가득 찰 줄 몰랐다. 강무진이 가진 돈에 현혹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았다.

    첫 인상과 달리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할머니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진과 동생 세현, 자신은 행복하게 지냈다.

    언제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어느 날 출장이라며 집을 일주일이나 비운 무진이 한 아름 꽃다발을 가져왔을 때였나?

    졸업 논문으로 정신없을 때 선생처럼 도움을 주었을 때였을까.

    백야 그룹이 대단해도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걸까.

    시현은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정답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을 돌보며 악착같이 살아온 것은 돈 많은 남자를 꾀어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쩌다가 강무진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계약을 제안하던 강무진에게 흑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애인처럼 행동할 사람이 간절히 필요해 보였다.

    ‘너 웃는 거 예뻐.’

    ‘고용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키스하고 싶을 정도인데?’

    충동적이지 않다며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눈을 감아 버린 시현.

    그렇게 어느새 시현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 버렸고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계약과 별개로 결혼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시현 인생에서의 크나큰 전개였다.

    ‘여기서 결혼할까?’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미국에 살면서 라스베이거스에 한 번은 가야 한다고 말하던 무진을 따라 여행을 갔다.

    카지노에 가서 처음 카드를 쳐보고 최상의 호텔에서 호의호식했다. 국립 공원도 가 보고 멋진 여행에서 그는 장난 같은 프러포즈를 했다.

    ‘말뿐이 아니라면 받아 줄 거지?’

    ‘하는 거 봐서요.’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넘긴 한마디였다.

    그에게는 결혼을 밀어붙이는 용기를 주게 되었을까.

    얼떨결에 강무진의 결혼 제안까지 물어 버린 것이다.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환하게 웃는 미소에 반했다며 결혼해서 잘살아 보자고 말하던 무진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같이 먹고 마시고, 뮤지컬을 보면서 조금씩 키운 사랑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미국에서 시현과 결혼하기를 원하며 오래 곁에 머물고 싶다고 했다.

    젠틀맨 같은 남자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그가 시현한테는 물러 터졌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가족 없이 결혼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시현은 무진에게 가족 얘기를 하지 않았기에 그에게 들어야 하는 말도 없다고 여겼다.

    즉흥적인 결혼이었지만 마주 잡은 손에서 그의 떨림을 느꼈다.

    세상에 하나뿐인 웨딩드레스, 그가 직접 산 결혼반지로 충분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뿐이었지만 좋았다.

    신혼여행도, 그와 함께 사는 그 어느 공간도 시현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 삐걱댔을까.

    왕 할머니가 강무진의 존재를 알려 주었을 때?

    로열패밀리라는 것에 움츠러들었지만, 그게 결혼과 무슨 상관이었을까?

    이제는 낳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휘젓는 엄마까지 나타났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가족이 얽힌 것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혜련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에게 말했지만,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현은 무진의 집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비스듬히 누웠다.

    ***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사는 백혜련은 인맥도 돈으로 사는 존재일 뿐이었다.

    젊은 날에 몇 년 동거하던 남자하고 자식을 두 명 낳았지만, 과거는 깨끗하게 세탁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결혼한 남자하고는 자식을 낳지 않았다.

    백혜련은 자기애가 강해서 두 번 다시 발목 잡힐 일에 뛰어들지 않으려고 자식이 필요 없는 남자를 만난 거였다.

    식당을 나와서 부들부들 떨며 감정적으로 시현을 만난 걸 후회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다가 백야 그룹하고 남편의 사업이 엮이다 보니 욱해서 일을 저질렀다.

    백혜련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운전대를 잡고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렀다.

    “고자질하지 않겠지. 백야 그룹이 웬 말이야. 정말.”

    너무 황당하고 짜증이 났다.

    돈 많은 남자를 꾀어낸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지금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갈 수 있었다.

    마르지 않은 샘을 가진 것처럼 사치로 평생을 살아온 백혜련이었다.

    자그마치 20년 넘게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딸 때문에 삶을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남편과 백야 그룹이 친분이 있으니 이시현을 쫓아내야 했다.

    백야 그룹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해서 어찌나 놀랐던지.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평판이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백야 그룹의 도련님이 봐 줄 게 아무것도 없는 시현에게 정신이 팔려 결혼까지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인간관계에서 돈을 빼고 계산하지 않는다는 건 백혜련에게 의미조차 없는 행위였다.

    “그깟 푼돈에 내가 나서다니. 악! 짜증 나.”

    백혜련은 한 번의 경고로 시현이 마음을 돌리길 바랐다.

    “죽어서도 자기 딸을 챙겨야지. 이게 뭐야. 왜 날 물고 늘어지려고 하는지. 참나.”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남편한테 알려지면 망신으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다.

    도무지 시현의 마음을 돌려서 미국으로 쫓아낼 방도가 없어서 속이 시커멓게 탔다.

    남편한테 말할 수 없으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백야 그룹 차기 총수라는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코가 꿰인 거냐고!

    백혜련은 시현이 딸이라는 것을 망각하듯 거친 말을 내뱉었다.

    “끝까지 문제야! 끝까지.”

    *** 

    진보라는 며칠째 출근을 안 하는 장소연이 신경 쓰였다.

    왕 할머니한테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장소연이 안 보이자 초조해졌다.

    그리고 비서라도 무진의 옆에서 알짱거리며 독차지한 시현이 싫었다.

    왕 할머니 측에서는 계속해서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니 이젠 시현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

    미국에서도 은근히 따돌리면서 하찮은 주제라는 걸 알기를 바랐다.

    시현이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무진의 아내라는 게 알려지자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진의 곁에서 물러나 주기를 바란다고 직접 말까지 했는데.

    돈독이 오른 시현이 황금알 같은 그를 놓을 리 없는 듯했다.

    “장소연이 뭘 하는지 알고 나서 터뜨리면 되겠어.”

    진보라는 이시현을 끌어내릴 스캔들을 고민하다가 장소연을 주시하는 게 빠르다고 판단했다.

    백야 그룹의 입성을 염원은 삐뚤어진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왕 할머니 측에서 재촉하니까 초조함보다는 곧 기회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에 기뻤다.

    “남녀 사이에 배신만큼 효과적인 게 없는데, 잘 될까.”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스타우트 될 때만 해도 금세 강무진 주변에서 시현을 치울 수 있을 줄 알았다.

    진보라는 무진에게 틈이 없어서 이시현을 공격하는데 먹히지 않으니까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몇 달이 걸리는 일인지.

    “으음……, 이시현이 너무 강적이야.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견디지.”

    생각처럼 일이 정리되지 않아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만약에 무진에게 시현이 지난번 일을 떠벌이면 상황이 악화할 수 있었다.

    진보라는 무진이 미국 생활을 단숨에 정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진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서 방심하는 사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처지가 곤란해졌다.

    일을 그만두고 백야 그룹으로 가는 길에 강무진을 이용하려던 게 삐걱거렸다.

    이시현이 사라져서 강무진이 미쳐 날뛰었다는 것을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

    “정말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내뱉으니까 진보라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줄을 잘못 선 게 아닌가 싶었다. 왕 할머니 쪽이 아니라 친구인 무진의 편에 섰으면 더 나은 결과를 손에 쥐었을까.

    진보라는 생각만 많아지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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