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비틀어진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이 살벌해 보여 흠칫한 시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오랜만이구나.”
“엄, 백혜련?”
“넌 예의를 밥 말아 먹었니? 어디서 엄마를 이름으로 불러?”
“밥 먹으러 온 거면 그냥 가요. 그쪽이랑 말 섞고 싶지 않아요.”
지난번에는 진짜 우연이었지만, 왕 할머니와 무진이 백혜련이라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게 번뜩 떠올랐다.
시현은 밑도 끝도 없이 앙칼진 목소리로 말하는 엄마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 분위기보다 약간 어두운 화장실 안이어서 엄마의 눈빛이 으스스한 불을 내는 듯했다.
사이가 좋았던 적도 없었다.
버려진 자식이라서 굳이 안부까지 묻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 보험금만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잊을 수 없었다.
“요즘 형편이 좋은가 봐. 얼굴이 폈구나.”
“일행이 있어서 갈게요.”
“대단한 남자를 잡았더구나. 역시 내 딸이 맞아.”
아, 그럼 그렇지.
왕 할머니가 무슨 이유로 백혜련을 찾았을까.
수없이 고뇌한 게 엄마의 한마디로 정의되었다.
왕 할머니는 자신을 무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엄마를 찾았겠지만, 엄마는 더 큰 것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그때 식당에서 본 남자가 맞지? 생긴 게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잘생겼더라. 너도 날 닮아 인물을 따지나 봐.”
다짜고짜 무진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에 시현은 어리둥절했다.
낳아주기만 한 엄마를 찾는다고 해도 무시하고 잊으려고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마주하니 뭐가 뭔지.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마주치자 속이 뒤집히고 정신이 없었다.
시현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갑자기 손을 덥석 잡고 가방에서 꺼낸 봉투를 막무가내로 주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여리여리한 몸에 광기가 서려서 그런지 잡은 손을 비틀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 남자 잡으면 나야 좋지. 그런데 너무 높은 나무더라.”
“뭐예요!”
“이 돈 받고 미국에 가. 너 때문에 내 가정까지 망가지는 거 못 봐.”
“그쪽하고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거 놔요.”
“왜 상관이 없어? 너랑 세현이는 이 땅에 발 못 붙여. 이 돈 받고 미국으로 가.”
시현은 예상이 빗나가서 당황했다.
왕 할머니한테 돈을 받았어도 강무진이 가진 걸 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돈을 주고 미국으로 가라고?
가정을 지켜야 해?
“돈 받고 제발 떠나.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통곡할 일이야.”
“이 돈은 가져가요. 나와 세현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요.”
“내 가정을 망치는 걸 가만히 볼 것 같아! 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야.”
엄마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무진한테 떨어지라고 막말을 해 대니 기가 막혔다.
돈 봉투는 가방에 넣고 다닌 것인지 곧바로 꺼내서 손에 쥐여 주는 행동을 보고 있으니 어이없어서 화를 낼 타이밍도 찾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말이 길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무진의 눈에 엄마와 함께 있는 걸 보이기 싫었다.
자신이 어디서 일하든 무진과 밥을 먹든 누구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계약과 결혼은 당사자만이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낳았다고 자식이고 엄마가 아니었다.
끝내든 말든 그것은 시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지, 남들이 뭐라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쁘게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던 엄마의 번뜩이는 눈빛이 걱정돼서 상황 파악 좀 하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쪽, 엄마가 간섭할 일 아니에요. 어디서 무엇을 들었든지 나와 상관없고요.”
“너희 남매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백야 그룹에서 5억 원을 주겠단다. 그러면서 널 내쫓지 못하면 내 남편한테 과거를 말한대!”
백혜련의 번뜩이는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시현은 겁을 먹고 뒷걸음을 쳤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알고 있니? 저 남자는 네 것이 아니니까 엄마가 주는 돈 받고 미국에서 살아.”
“버릴 땐 언제고 엄마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엄마가 엉망으로 살아서 일어난 일을 나와 세현이 탓하지 말라고요.”
“이래서 버러지 같은 걸 낳아서는 안 되는 건데.”
“뭐라고요? 그쪽 내 엄마 아니야. 난 아버지밖에 없다고.”
한국에 왜 왔을까.
이런 여자도 엄마라고 한때는 그리워하며 마음 아팠던 적이 있었다.
동생이 험한 꼴을 안 보고 있어서 다행일까.
시현은 날뛰는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먹었던 달콤한 디저트가 쓴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악독해도 너무나 악독한 여자.
자기 과거에 발목 잡힐까 봐 내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백혜련이 악에 받친 듯 거칠게 말했다.
“너 그러다가 대차게 버림받고 쫓겨나. 백야 그룹에서 돈은 얼마든지 준대. 흥정이라도 하고 싶으면 말해 봐. 엄마가 받아 줄게.”
“됐어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꺼지라고! 너희 남매 때문에 내가 이 나이에 혼자가 되어야겠니?”
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자신을 낳아 준 사람한테 대놓고 저렇게 막말을 들어야 하는 시현은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무진한테 전부 까발리고 싶은 충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시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내 인생은 그쪽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나한테 가라 말라 말하지 말아요.”
“너 정말!”
“듣고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요. 그리고 세현이 앞에 나타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내가 그쪽 남편 만나서 다 까발릴 거니까.”
“뭐라는 거야? 엄마한테 협박해? 미쳤니?”
막 나가는 사람한테 좋게 말해 봤자 들어먹지 않았다. 시현은 엄마가 겁내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아주 못된 것만 배웠구나. 저런 남자는 네 것이 아니야.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는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시현의 눈이 커졌다.
비틀어도 빠지지 않던 손목을 놓아주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세차게 뺨을 후려치는 엄마의 행동.
폭력성에 너무 놀라 반격할 생각조차 못 했다.
“이러지 마세요. 참는 것도 이번뿐이니까요.”
“너야말로 제발 들러붙어서 저 남자 힘들게 하지 마! 멋대로 굴면 뺨 한 대로 안 끝나.”
시현은 작은 체구에 악에 받쳐 손을 휘두르는 엄마를 보며 겁이 났다.
황당하고 기가 막힌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낳고 버렸어도 끈끈한 정이 없다고 해도 폭력을 쓸 줄은 몰랐다.
시현은 똑같이 뺨을 후려치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어서 화를 삭이느라 가라앉힌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은 그쪽이 지나치게 흥분해서 넘어가지만, 다시 한번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얌전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 엄마 말을 들어. 돈 받고 미국으로 가라고!”
“내 주변에 맴돌지 마세요. 세현이한테는 더욱더 그쪽 존재 들키지 말라고요. 이건 경고입니다.”
“네까짓 게 경고하면 무섭겠니? 남자 문제가 아니라 백야 그룹이잖니. 너야말로 세현이 생각을 안 해?”
“그쪽이야말로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내 눈에 띄지 마요!”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는 말이 여기에 쓰이는 걸까.
시현은 맞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 식사는 데이트가 아니라 생일 선물의 답례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래서 무진을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방과 핸드폰도 식당 자리에 있고, 감시자도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퀸 자국만 없을 뿐, 뺨을 맞아 빨갛게 부어올라 가릴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텐데, 엄마와의 일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정리되지 않았다.
왕 할머니가 한 짓을 보라고?
백혜련을 찾은 이유가 고작 이런 거냐고?
백야 그룹이 뭐가 대단하다고 사람을 이토록 비참하게 하는지 따져야 할까.
시현은 왕 할머니가 사람을 돌게 하는데 대처도 못 하고 있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무진의 곁에서 떨어지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무진이 계약을 운운하며 자신에게 집착하는 느낌도 이상했다.
곰곰이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해서…… 달라질 게 있었을까.
낳았다고 다 부모가 아니었다.
엄마까지 그녀를 비난하고 욕하니까 좋은 게 아니었다.
시현은 빨개진 뺨을 만졌다.
화장실을 나와 무진이 있는 자리까지 걷는데, 수천 킬로미터 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늦…… 얼굴이 왜 그래?”
시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얼굴을 본 무진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시현은 눈을 내리깔고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만지며 별일 아는 듯 말했다.
“화장실 문에 부딪혔어요.”
“…….”
“문을 여닫는데 실수한 거니까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아요.”
덧붙여서 빠르게 말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여서 신경이 쓰였다.
실수? 무진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현의 반대쪽 뺨을 보며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가지.”
식당에서 시시콜콜하게 말해 봤자 대답은커녕 상황 설명도 안 할 게 뻔한 시현을 붙들고 다그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식당에서 매니저를 찾았다.
화장실 문에 손님이 다쳤다는 한마디에 드나드는 사람을 CCTV로 확보해 주겠다는 협조를 받고 나왔다.
남녀가 구분된 화장실, 그것도 식당 손님만 이용하는데 다칠 일이 있을까 싶었다.
뺨은 부어오르고 조수석에 앉아서도 몸을 떠는 게 눈에 띄었다.
토를 달지 않고 자리를 바꾸는 시현의 태도만 봐도 단순히 본인이 실수해서 다친 게 아니었다.
정신을 놓고 있어도 화장실 문에 세게 부딪혀도 광대뼈 부근이 아니라 얼굴 반쪽이 시뻘겋게 부어오를까.
집으로 가면서도 그는 어떤 말로 운을 떼고 시현과 진지하게 대화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가지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니까.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일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혹여 일부분을 말한다고 해도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이다 보니 뭔가 놓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