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74)
  • 54.

    왕순자는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사정도 보고받고 있었다.

    시현을 둘러싼 소문은 제대로 퍼져서 모르는 직원의 입에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고 들었다.

    비서의 말에 의하면 무진도 아는 듯하다고 해서 지금은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미행하는 사람의 보고는 시현과 무진이 잘 붙어 있단다.

    미칠 노릇이었다.

    떼어 놓아도 늦은 판국에 사장과 비서로 매일 붙어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문드러져 갔다.

    왕순자는 70년을 살아오면서 돈으로 해결 못 하는 게 없고, 얻지 못한 적은 없었다.

    손자들과 며느리들이 전부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무진이 왕순자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손자였다.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손자한테 집착하는 수준이었다.

    “무진이만 동떨어져서는 안 되네. 알겠냐?”

    “이번에는 틀림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겁니다. 진보라 본부장에 장소연까지 어르신의 의중에 답을 하고자 합니다.”

    “그 애 엄마라는 사람도 확실하게 해. 몇 달을 참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말게.”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정 비서를 질책하고 나서 왕순자는 무진과 시현이 찍힌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사진은 제이호텔에서 리본이 잔뜩 묶인 화려한 포장이 된 상자를 든 시현의 모습이 있었다.

    제이호텔에서 뭘 가지고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왕순자는 무진의 기이한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애를 붙잡고 있는 게지.”

    이시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건 무진하고 연관이 없을 때 좋게 봐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백야 그룹과 무진을 위해서는 가난뱅이는 떨어져야 했다.

    왕순자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진의 변화가 신경 쓰였다.

    “애정은 아니야. 그 애가 무진의 약점이라도 잡은 건가.”

    왕순자의 집무실에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자신의 손자에게 약점 따위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어릴 적부터 무진에게 약점이 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왕순자는 사람 한 명을 떼어 내지 못한 것이 못마땅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시현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사내 소문을 무시한 채 계약에 따른 데이트를 진행하는 게 어이없었다.

    운전해서 식당까지 오는 길에도 무진의 심리가 궁금했다.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지도 않고 소문이 부풀려져도 상관없는 듯한 무진을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퇴근을 빨리하게 된 것은 좋아도 그와 함께 온 식당에서 한마디를 안 할 수 없었다.

    강릉에 가고 태안에 가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사장과 비서라는 게 사실이어도 회사에서 멀지 않은 식당이라는 건 불편했다.

    아직 사내에 퍼진 소문이 잠잠해져도 여전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밖에 나와서 식사하는 거 불편해요.”

    시현의 마음을 다 아는 듯한 무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소문 때문이라면 더욱더 아닌 것처럼 행동해도 되지 않나? 사장과 비서가 밖에서 밥 한 끼도 못 먹는 게 더 웃기는 거지.”

    “박 실장하고는 안 먹잖아요.”

    “박 실장하고 외부에 있을 때 같이 먹어. 그리고 박 실장은 입이 까다롭다고.”

    “그래도 다음에는 박 실장도 함께 먹어요. 그게 소문을 잠재우는 데 효과적이잖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박 실장은 네가 같이 있으면 안 먹을 거야.”

    “왜요?”

    “박 실장이 은근히 가리는 게 많고 입맛이 정말 까다로워. 미국에서도 박 실장이 우리하고 밥 먹은 적 있어?”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후배라고 소개받았던 박 실장하고 한 번도 밥을 같이 먹지 않았다.

    시현은 입을 삐죽였다.

    직원을 차별하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상사하고 밥 먹는 걸 박 실장이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일 선물이 고마워서 내가 밥 한 끼 사는 것으로 해요.”

    시현은 사무실을 나오면서 데이트라는 말에 밥 한 끼를 자신이 사겠다고 말했다.

    당황한 기색에 역력했던 무진은 투덜거리면서 스테이크를 먹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번에 진보라 본부장하고 왔지만 먹지 못한 요리를 먹을 생각이었다.

    “네가 사는 거면 비싼 거 먹어도 되겠지?”

    “그렇게 하세요.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 주문해요.”

    데이트는 아니라면서 기분을 내고 있으니 지금도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기분을 만끽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빚을 청산하는 중이었다.

    뭔가 받고 다시 돌려주면 싸움이 날 테니 이제라도 무언가 받으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강릉에 갔던 날,

    다투면서도 조금이나마 상황을 설명하던 때,

    그는 무언가 알아보려는 의지보다는 탐닉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보였기에 이제야말로 진정 놓아야 할 때 같았다.

    다툼은 언제나 시현의 침묵으로 끝나는 편이었다.

    느닷없이 강릉에 가고, 태안의 서해를 보는 건 어쩌면, 그가 시현을 배려해서 한 행동일 수 있었다.

    하지만 포장마차도 잘 모르는 남편과 어정쩡한 관계로 상사인 그는 시현에게 혼란 그 자체였다.

    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져 망설이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게 되었다.

    한가락 희망을 품었기에 실망이 큰 법인가.

    진실을 그가 밝혀 주면 아주 조금, 그가 말하는 애증에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고, 독특한 입맛도 알고 있으며 이전보다 더 다정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사장실에서 조심하고 있어도 헛소문은 사그라지지 않는데 여전히 시현은 무진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퇴근 준비하라는 한마디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건 설렘보다 두려움인가.

    빚 청산이라는 나름대로 그럴싸한 핑계를 붙었지만, 같이 저녁을 먹으면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거 먹고 체력을 유지할 수 있겠어?”

    “코스에 스테이크 추가해서 남들보다 많이 먹은걸요. 사장님은 모자란 거예요?”

    “내가 누구처럼 고기만 먹는 사람이 아니라서 충분해.”

    “그러면 디저트 먹고 일어나요.”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뭘 해도 느긋하던 사람이 왜 안절부절못하고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느낌일까.”

    약간 비릿한 웃음이 보인 건 찰나였나.

    시현은 질문도 혼잣말도 아닌 그의 말투에 별다른 대답 없이 디저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문할 때부터 이상했던 것.

    “아이스크림 같은 거 안 먹잖아요.”

    “입맛이 변할 걸 수 있지.”

    “딸기 셔벗인데요?”

    “식후 입가심에 좋다고 웨이터가 추천하는데 안 먹으면 아쉬울 거 같아서 주문했는데 바꿀까?”

    과일즙에 설탕, 젤라틴 등을 넣고 얼린 셔벗은 상큼하면서도 달아 그가 즐기지 않는 디저트였다.

    그런 걸 기억하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입맛이 변한 것만큼 강무진은 어느 정도로 달라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상사한테 생일 선물 받은 것을 근사한 저녁으로 대처하는 꼼수, 속내를 조금 비친 일이 그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테이블 사이가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말소리에도 조심스러워 무진과 시현은 가까이 몸을 맞대고 있었다.

    “바꾸지 마요.”

    “디저트? 그런데 왜 주문했냐고 물어보는 건데?”

    “한 입 먹어 보려고요. 딸기 셔벗은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요.”

    “딸기가 딸기 맛이지. 별거 있나.”

    둘러댄 말에 그가 농담이 섞인 가볍게 말하니 웃음이 터졌다.

    사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홍시가 홍시 맛이 난다고.’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시현을 쳐다본다.

    “뭐가 웃겨?”

    “그냥요. 딸기 셔벗 나오면 한 입 줘요. 먹어 볼래요.”

    일할 때는 일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쉴 때는 뒹굴뒹굴하는 게 정상일 텐데.

    시현은 그와 같이 있으면 비약적으로 딴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렇게라도 웃으니 묵직한 게 조금 털어 버린 느낌도 들었다.

    시현은 이상하고 찜찜한 기분을 무진보다는 낯선 시선에 떨치지 못했다.

    사무실에서 사람의 손을 타는 것과 집에서 낯선 기운을 느끼는 건 차원이 달랐다. 작은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싸하고 불쾌한 기분이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식사하며 그의 동향을 살피면서 자신의 안전을 고민하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오래오래 살고 싶은 한국에서 공포가 자신의 주변을 휘감는 느낌.

    빚 청산이라는 약간 어긋난 논리로 무진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깊이 묻어 둔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민해진 상태이나 일하고 있으면 경력과 이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변화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찜찜하고 두려운 느낌이 별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감시자가 있는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일이든 사생활이든 매일 되새기는 게 습관이 될 지경이었다.

    디저트가 나왔다.

    애써 밝은 톤으로 말하며 시현은 한껏 웃어 보였다.

    “우와. 색깔이 예뻐요.”

    “한 입 먹겠다면서 먹어 봐.”

    “무진 씨가 먼저 먹어야죠. 내 것부터 먹고 딸기 셔벗은 한 입만 먹을게요.”

    “먹어.”

    역시 그의 입맛이 변한 게 아니라 디저트를 추가해서 먹지 않는 그녀에게 두 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양하지 않을게요.”

    역시 디저트는 달콤해야 맛있었다.

    그가 말없이 쳐다봐도 디저트 그릇이 싹 비우며 딸기 셔벗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시현은 티스푼을 내려놓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올게요.”

    차고 달콤한 것을 먹었는데 남들 시선에 개의치 않고 밥을 먹으려 애쓰다 보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민해진 상태를 들키기 싫어서 한껏 웃고, 대화에 집중하다 보니 울긋불긋해진 얼굴을 진정시키려고 화장실에 갔다.

    볼일 보고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식혔다.

    물기를 닦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는데 낯익은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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