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74)
  • 53.

    시현의 취향 정도는 알고 있어서 말을 옮기는 사람을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어디서 시작된 줄 모르는 말이 활활 타오르다가 싹 사그라져서 의심할 사람도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무진과 이시현은 헛소문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당사자의 반응이 없어서 그런지 소문은 커지지 못했다.

    보라는 정 비서의 부탁으로 장소연을 비서로 채용했다.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장소연이 몇 마디 거들자 이시현에 관한 험담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스캔들을 터뜨릴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신입 비서 이시현을 험담해도 동요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현이 사장 비서여서 친해지려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었다.

    보라는 시현에 관한 나쁜 말이 무진의 귀에 들어갔는데도 일을 같이하는 게 황당했다.

    자신이 만든 소문이 진짜처럼 이시현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무진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왜 그런 여자를 안 버리는데. 백야 그룹으로 가는 길을 이시현이 막고 있어.”

    시현이 회사에 남아 있는 게 짜증이 난다며 사무실에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보라가 꾸민 일은 시현을 미치게 하는 헛소문이었다. 사람을 매수해서 그럴싸하게 시현을 궁지로 몰아갔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작업은 돈이 있으니 아주 쉬운 일거리였다.

    시현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도를 넘어 심각해져도 꼬리를 밟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라는 시현을 쫓는 사람이 있어서 정 비서한테 일상을 낱낱이 듣고 있었다.

    보라의 책상 서랍에는 시현에 관한 보고 자료와 사진이 가득했다.

    무진이 이시현 때문에 한국에 왔고 투자 회사를 인수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시현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끝은 자신의 승리였다.

    무진이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해 버리자 인내심은 극에 달하고 시현을 괴롭히는 데 혈안이 되었다.

    정 비서가 기한을 짧게 주고 이시현을 떼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을 뿐, 구체적으로 준비되기 전까지 조심하라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백야 그룹에 정신이 팔려서 친구 무진의 사정 따위 생각도 안 하고 시현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무진이 백야 그룹을 등진 것도 아닌데 보라의 삐뚤어진 집착일 뿐이었다.

    성공을 원한다고 그럴싸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보라가 시현만 괴롭히는 건, 만에 하나라도 무진이 알게 되더라도 발뺌을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성공에 관한 보라의 집착은 잘못된 대상을 괴롭히면서 제 것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이런 작은 투자 회사에서 내 능력을 어떻게 보여 줘.”

    보라는 빨리 백야 그룹에서 제 능력을 보여 주고 한 자리 차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장소연은 정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시현의 주변에 나타난 사람이 왕 할머니와 자신하고 연관된 게 아니어서 당황했다.

    어쨌든, 남자 문제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

    보라는 시현을 회사에서 쫓아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안 되면 돈으로 회유해서라도 퇴사하라고 하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무턱대고 막 행동하면 일만 망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남을 속인 채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우스운데 무진이 시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달라지지 않아서 불안했다.

    정 비서한테 받은 시현의 사진.

    손에 든 사진이 선명하지 않지만, 차고에서 나오는 차 안에서의 무진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보라는 책상을 꽝 내리쳤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몇 주면 될 일을 몇 달을 끌고 있어서 보라의 눈빛은 포악해졌다.

    사람을 이용하는데 항상 돈은 넉넉하게 줄 수 있었다.

    접근 방법을 달리하며 절대로 하지 말라는 시현이 사는 곳까지 둘러보았다.

    보라는 제 앞길을 막는 시현을 어떻게 무진의 곁에서 떼어 놓을지 궁리했다.

    보라는 정 비서한테 들은 말을 토대로 시현이 회사 밖으로 나오면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셔터를 눌러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회사 건물 사이에서 촬영하는 사람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 밖 시현의 일거수일투족 쫓으며 밀착해서 광범위하게 사진을 찍었다.

    보라는 정 비서로부터 받은 시현의 사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정말 거머리 같네. 이런 애들이 돈 냄새를 잘 맡지.”

    시현을 어떻게 떨어뜨려야 할지 감을 못 잡아 방황하는 게 싫었다.

    *** 

    진보라와 같은 사무실에 있는 장소연도 마음이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왕 할머니한테 연락받은 지 몇 달이 지난 상태여서 정 비서가 메시지만 보내도 몸을 떨었다.

    진보라의 비서가 따로 있어서 출근이 자유로운 만큼 강무진을 불륜으로 엮어야 했다.

    장소연은 기태마저 이시현을 엮지 못해서 초조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장소연은 기태를 데리고 옥외 휴게 공간에 갔다.

    근무 시간이어서 휴게 공간에는 사람이 없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서라도 이렇게 불어 다니는 거 심하지 않아? 이시현한테 접근 못 하고 있지?”

    “집 밖으로 안 나와. 사는 곳에 가 봤는데 접근이 쉽지 않아.”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도 희한하게 꿈쩍 안 해.”

    가끔 성질을 부리면 눈이 돌아가는 소연의 눈치를 보며 기태는 이시현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기태는 시현의 주변을 확인하고 적당한 말을 섞어 말했다.

    “한 달이 또 지났어. 저쪽에서 우리 입을 막을지 몰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일이 틀어져도 착수금은 돌려주지 않는 거라며.”

    “기한 내에 내가 강무진한테 접근을 못 했잖아. 이건 일을 시작도 못 한 거니까.”

    “내가 한 일이 있잖아. 그래서 소문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며. 그런데 왜?”

    소연은 기태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보라 본부장의 상황도 꺼림칙하고 서너 번 마주친 박 실장이 자신을 의심하는 듯 눈매가 매서웠다.

    불륜 조장은커녕 꼬리를 밟힐 위험이 감지되었다.

    왕 할머니 측에서는 닦달하고, 남자가 있는 것처럼 꾸몄는데 이시현은 너무나 멀쩡하다는 것이다.

    “내가 접근을 못 해서 다른 수를 내야 해. 직접 나서기 뭐하면 사람을 더 쓰는 건 어때?”

    “그럼 돈이 또 나가잖아.”

    “착수금에서 몇백만 원 더 쓰는 게 어때서. 자그마치 성공하면 몇 배가 되는지 몰라?”

    “그렇긴 하지.”

    장소연은 기태를 부추겼다.

    자신은 강무진을 전담하고 기태는 이시현을 잡게 해야 했다. 장소연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짓을 하는 게 전부 시현 탓이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진 건 쥐뿔도 없다는데 하여튼 떨어지지 않아.”

    “그 여자도 돈맛을 본 거지. 그렇지 않고서 길에서 개망신을 당하는데 어떻게 버텨.”

    장소연은 왕 할머니조차 이시현을 어찌 못 해서 더러운 수를 쓴다고 생각하며 입을 히죽거렸다.

    계속해서 자리 한 번 만들지 못하고 사무실 밖에서조차 시큰둥한 무진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시현한테 눈은 안 떼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회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 흥신소 직원이 따라붙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 명 때문에 여럿이 고생이네. 어떻게 백야 그룹의 남자가 그런 여자를 골랐을까.”

    “왜 너 딴마음 먹으려고?”

    “내가 아무리 유부남 킬러여도 그건 돈 때문이잖아. 손자한테 불륜하게끔 부추기는 할머니는 좀 그래. 소름 끼쳐.”

    장소연과 기태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옥외 휴게 공간에서 장소연과 기태는 모종의 계획을 세우듯 키득거렸다.

    “제대로 할 거니까 장소연 너, 나한테 지원 사격이나 잘해.”

    “알았어. 망신 한 번 더 주고 잘 끝내.”

    *** 

    평창동 왕순자의 저택.

    손자와 시현이 같이 일한 지 몇 달이 지나자 화가 난 왕순자는 고용인을 질책했다.

    정 비서부터 시현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고용인까지 호되게 혼이 나고 있었다.

    여자에 미쳐 백야 그룹과 셀 수 없는 주식과 현금, 황금까지 손에 준다는데도 꿈쩍 안 하는 무진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평창동으로 불러서 이 사람 저 사람 소개하고, 이시현만 아니면 된다고 타이르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벌써 몇 달째인가. 그깟 여자 한 명을 못 떼어 내!”

    시현을 미행하는 사람이 여럿이어서 햄버거 가게 앞에서의 소동을 뒤늦게 보고받았다.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하면서 누구한테서도 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백혜련이라는 여자는 어떤가? 이용 가치가 있는 건가?”

    “돈만 주면 이시현을 미국으로 쫓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동거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남자 집안에서 몰라서 곤혹스러운가 봅니다.”

    “돈만 주면? 그렇게 호락호락 쉽겠나?”

    “조사 결과 사치가 엄청나더군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빚도 여러 번 갚아 준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가진 게 돈이라서 왕순자는 이시현조차 돈으로 회유했다고 믿었다.

    갑자기 무진이 시현을 찾아내서 이혼시키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무진이 알아서 포기할 때쯤 이혼시키고 마음에 드는 집안과 사돈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깟 투자 회사에서도 그 애를 쫓아내지 못하는데 백혜련으로 되겠어?”

    “확실한 답을 받아 오겠습니다.”

    “우리 무진이가 그렇게 보는 눈이 없을까. 나름대로 적당한 집안을 정했는데 해가 넘어가겠네.”

    “죄송합니다.”

    왕순자는 이시현이 너무 강력한 것 같아서 이젠 조바심이 났다.

    상황 파악을 하고 정 비서한테 넘겼지만, 몇 달을 지켜봐도 시현은 무진의 곁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물이 반반한 장소연한테도 손자를 유혹해서 불륜을 저지르라고 했건만, 접근할 기회조차 버거운 것 같았다.

    그럴싸한 소문을 만든 진보라와 장소연을 묶어 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수집된 정보는 이용하기에 파급력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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