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4)
  • 52.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아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몰랐다.

    끝이 있는 관계, 아내를 바라보며 탐닉하는 그가 무엇을 보는지도 이제 알 수 없었다.

    듣기에 야릇한 말을 해 주는 게 어색하면서도 열렬히 뜨거웠을 때가 겹쳐서 떠오르는 게 싫지 않으니 미친 게 분명했다.

    다투다가 친해지는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이런 은밀한 짓을 계속해서 무엇을 얻는 것일까.

    탐닉이 멈추어 버리면 끝이 나겠지.

    계약을 떠나 결혼했던 그 감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시현은 미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진을 밀어내지 못했다.

    계약과 결혼의 끝을 말하면서, 누구도 이별을 원하지 않는 듯한 모순된 행동이었다.

    시현의 가냘픈 몸이 흔들리고 관통하는 전율에 정신이 없었다.

    야릇한 감각은 온전히 그가 주는 것이자 서로를 탐하며 나누는 것.

    상처만 주지 않는다면 이별은 없다고 말해야 할까.

    그는 생일 축하하면서도 그녀를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결혼 생활 중에도 자신을 각인하듯 물고 뜯어서 여린 살갗이 울긋불긋해졌는데, 버릇을 못 고친 것인지 시현 앞에서 자제할 수 없었다.

    “하얀 피부만 보면 내가 짐승이 되나 봐.”

    “이러지 말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무진 씨는 항상 멋대로예요.”

    “너도 날 깨물어. 물어뜯어도 된다니까.”

    “됐어요.”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시현은 몸이 아픈 것보다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흔적처럼 끝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을 상기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을 위해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노력도 안 하는 그가 미워질 것 같았다.

    속이 곪아 언제 터질지 몰라서 시현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희망을 놓고 나서는 은밀하게 서로를 탐하고 나면 허전했다.

    관계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언제나 허탈감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그대로 먼저 놓지 못하는 관계였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 그가 중저음으로 말하는 생일 축하.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생일 따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격렬한 탐닉에 이번 생일은 오래도록 남을 듯했다.

    씻고 나온 시현은 집에 보내 주겠다는 그의 말을 반복하며 옷을 챙겨 입었다.

    “바래다줄게.”

    “괜찮아요.”

    “오피스텔에서도 안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 택시 타는 것보다는 선물 들고 편하게 가는 게 낫잖아.”

    “선물도 있어요?”

    “설마, 생일 케이크하고 샴페인만 있다고 생각했어?”

    가볍게 옷을 입은 그가 쇼핑백을 하나 건넸는데, 고가의 명품 가방이었다.

    생일 선물로 몇 달 치 급여에 맞먹는 가방을 받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의 아내라면 고맙다는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비서로 받는 거라면 사내에 떠도는 헛소문에 흥밋거리를 주는 꼴이었다.

    “전에 쓰던 것과 같은 브랜드야. 평상시에 들고 다녀도 괜찮은 거니까.”

    “난 무진 씨 생일도 잊고 있었는데요.”

    “괜찮아.”

    “남은 케이크도 가져갈게요. 바래다줘요.”

    자정쯤 그의 집을 나와서 오피스텔에 도착한 시현은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내일 봐요. 조심히 운전하고요.”

    “회사로 곧바로 출근해. 택시 타고 오고 가지 말고.”

    “그럴게요.”

    생일까지 챙김을 받자 마음과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애써 공적인 관계인 것처럼 굴었다.

    *** 

    그날 밤.

    피곤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든 시현은 어느 순간 싸한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무진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피스텔 앞에서 헤어졌는데 사람이 있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가운을 걸치고 오피스텔 곳곳을 둘러보았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가운 끈을 여미고 주방 겸 거실에서 무언가 찾는 듯 샅샅이 살폈다.

    그의 집에서 씻고 와서 양치만 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는데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보일러실까지 훑어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있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을 뿐, 원룸처럼 좁은 곳이었다.

    “누가 보는 거 같은데.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사무실에서는 무언가 물건이 흐트러진 적이 있었지만, 자다가 소름이 끼쳐서 흠칫했다.

    이중 잠금이 된 오피스텔에 누가 들어올 일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기묘하게도 누군가 보는 듯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가 이상 행동을 한다고 혼자 사는 집에 몰래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그거야말로 범죄니까.

    도둑질이든 아니든 남의 집에 들어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이중 잠금은 웬만한 도둑이 열고 들어올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한국에 왔을 때 제일 먼저 산 물건이 전기 충격기였다. 어릴 때 미국으로 가서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치안이 좋아서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지만, 자다가 놀란 시현은 서랍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서 침대 옆에 두었다.

    밤길을 걸어도 위험한 일이 없었기에 사는 곳도 안전한 공간이라 생각했다.

    마음 놓고 편하게 쉬는 곳.

    그런데 누가 쳐다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싸한 느낌에 다시 오피스텔을 둘러보고 현관문에 걸린 잠금장치도 확인했다.

    예민해진 탓이라고 안심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유에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시현은 자꾸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남은 케이크를 반찬 통에 담고 상자는 재활용 바구니에 접어 놓고도 계속 머리를 움직였다.

    이게 뭐야.

    욕지거리가 올라올 것 같았지만 고요한 집에서 혼자 욕설을 듣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새벽에 느꼈던 찜찜한 기분에 출근 준비하면서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혼자서 지내는 공간이어서 찜찜함을 털지 못하면 잠들지 못할 거 같았다.

    생일 축하받고 기분 좋은 것도 몇 시간뿐, 시현은 왕 할머니가 어디까지 손을 뻗었는지 의구심이 커졌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본부장실.

    보라는 왕 할머니로부터 무진의 결혼에 관해 전해 들은 말이 있었다.

    무진의 집안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라 진보라는 그를 남자로서 욕심낸 적이 없었다.

    무진이 갑자기 한국에서 투자 회사를 인수하자 황당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학에 다닐 때 강무진이 누구인지 알고서 친해지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월가에서 잘 나가고 있어도 여자에, 동양인이라는 것에 한계에 부딪힐 때였다.

    그래서 무진이 회사를 인수했을 때 상황을 파악하려고 잠시 귀국했다가 시현하고 일하는 것을 알고 나서 얼마나 분개했던가.

    한국에 눌러앉을 것처럼 미국 생활을 전부 정리해 버린 무진의 사정을 알아내고 보라도 부랴부랴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어 버렸다.

    백야 그룹이 자신의 성공에 밑거름이 되어 줄 거로 의심하지 않았다.

    곁에서 친구로 지낸 세월을 생각하면 시현을 빨리 처리해야 했다. 까닥하다가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도 몰랐다.

    한국에서 기반이 없는 건 진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미국에서 완전히 시현을 무진의 곁에서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 할머니가 제안한 것은 달콤하지만 위험이 따랐다.

    다행히 무진이 먼저 1년 단기로 스카우트를 제안해서 왕 할머니의 제안도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보라에게도 낯설고 시현하고는 친분이 없어서 다가갈 수 없었다.

    대학에서부터 거의 10년 넘는 세월 동안 무진하고 친구로 잘 지내 왔다.

    백야 그룹 차기 총수가 될 무진이 보잘것없는 이시현을 놓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무진하고 같이 식사하던 날도 보라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스캔들을 터뜨리기 전에 소문을 부풀리고 있는데, 그마저도 타오르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진보라는 사랑 따위 믿지 않고 무진을 보자마자 성공만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유학하러 가서 치열하게 공부하며 능력을 키웠지만, 처음부터 가진 자한테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무진이 멋진 남자지만, 성공의 발판으로만 생각했다.

    말로만 강무진에 관심을 보였던 뭇 사람들과 행동이 달랐다.

    까칠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편이어서 보라는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재력과 지성을 가진 무진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무진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서 성공할 거라고 다짐했건만, 여자한테 미쳐서 한국으로 갔다는 뜻밖의 소식으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진보라는 이시현을 처음 소개받던 날을 떠올리고 얼굴을 구겼다.

    ‘뭐? 결혼했어? 친구들도 초대 안 하고?’

    ‘그냥 그렇게 됐어.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결혼은 환상적이었어.’

    ‘설마, 강무진이 비밀 결혼이라도 한 거야?’

    ‘거창하게 무슨 비밀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내 아내도 한국인이니까 잘 지내 봐.’

    보라는 무진의 결혼이 자신의 성공에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집안을 따져서 결혼해야 백야 그룹이 자신에게 해 줄 것이 많다고 계산했으니까.

    들리는 말로는 애인인 척 접근했다고 했는데.

    그런 여자가 무진을 방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진보라는 미국에서 시현을 떼어 놓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상대가 얼굴 예쁜 것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보라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무진의 아내를 알게 된 보라는 주변 상황만 지켜보았다.

    미국에서 뭔가 하기도 전에 결혼이 깨졌다는 말을 들었고, 무진이 느닷없이 귀국했다.

    품격 있는 집안끼리 혼인해야 무진에게도 좋다고 생각했다.

    “진보라 씨가 어르신의 의중을 알고 있으니 다른 말은 안 합니다. 이시현만 치우세요.”

    “격이 안 맞는다는 건 알고 있어요.”

    “뭐든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백야 그룹에 자리를 보장한다고 말씀하신 것만 지켜 주세요. 한국에 가서 이시현을 떼어 놓을 테니까요.”

    “어르신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몇 마디로 금세 일이 꾸며지고 진보라는 입이 가벼운 사람을 모색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강무진이 백야 그룹으로 갈 때, 함께 입성하면 되는 거니까.

    이시현을 잘 알지 못해서 꺼림한 것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머무는 곳도 왕 할머니 쪽에서 마련해 줘서 진보라는 편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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