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74)
  • 51.

    금세 볼이 빨개진 시현은 얼음에 소주를 중화하듯 섞어서 마시고 있었다.

    “술을 좀 마시는가 싶더니 소주 마시는 건 그대로네.”

    “습관은 무서운 거니까요.”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포장마차도 처음 와 본 무진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닌 시현이 소주를 아는 게 신기했다.

    술을 가르친 것은 자신이었으니 일탈을 알게 한 것 같았다.

    한잔하는 즐거움조차 그가 알려 준 재미.

    시현은 배가 고팠는지 잔치국수에 주문한 안주를 다 먹고 배시시 웃었다.

    시현은 아버지한테 술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웠다.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은 아버지가 오늘따라 더욱더 그리웠다.

    소주 한 병에 약간 풀린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계약과 결혼을 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늘 사랑이 커지기를 바랐다.

    사랑을 원했지만, 그의 가족과 섞일 수 없으니 다 포기하고 싶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시현과 무진은 계산하고 나와서 잠시 주저하더니 그가 전화 한 통으로 잡은 호텔까지 걸었다.

    길을 걸으며 키스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가벼운 입맞춤은 스위트룸으로 가면서 점점 더 격해졌다.

    문 앞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는 그.

    “지금…….”

    놀라서 눈이 커진 시현은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키스로 바뀌고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호텔 안은 사람의 시선이 닿는 데마다 꽃이 보였고 향기까지 더해져 기분이 좋았다.

    검은 바다 위로 빛이 쏟아지는 듯 일렁이는 게 그들의 마음 같았다.

    손을 뻗어 서로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미련은 여기까지일까요?

    글쎄.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믿음이 깨진 뒤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는데 우리는 여전하겠죠?

    아니, 이제는 달라지고 싶어.

    전할 수 없는 마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11월.

    바쁜 일이 얼추 마무리되면서 회사에서는 몇 달을 쉴 새 없이 달려와 연말 보너스와 휴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 있는 동생은 제대까지 반년이 남았다.

    여전히 혼자지만 시현은 차츰 감정을 회복하다가 다시 예민해졌다.

    무진에게 백혜련의 존재까지 알렸지만, 변화가 없었다. 소문이 잠잠해지고 시현을 손가락질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직 시현의 사무실 책상 서랍을 여닫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던 게 일부러 보란 듯이 망가진 물건을 놓고 가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가끔 가던 햄버거 가게도 못 가고, 생필품도 온라인으로만 사고 있었다.

    계약이 남은 무늬만 부부가 짧은 데이트를 즐겼지만 그게 다시 함께할 기회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왕 할머니가 보내는 감시자한테 혼동을 주기 위함이었으니까.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그의 일에 방해하지 않으려 결혼 문제는 잠시 보류한 상태라 여겼다.

    그러고 나서 사장으로 그를 모시며 신입 비서로 일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관계를 정리할 부부가 은밀하게 밤을 나누고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일로만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문을 개의치 않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은 막은 수 없었다.

    시현이 강무진 사장 옆에서 꼬리를 친다는 헛소문은 그녀의 변화에 더욱더 불타올랐다.

    비서로서 옷 입는 타입은 딱딱해도 색상이 밝아진 것만으로도 흠집을 내려고 했다.

    수군거리는 말이 사그라졌는데, 작은 변화에 또다시 시현을 괴롭게 하는 말이 스멀스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경력을 쌓고 다른 회사로 이직해도 문제가 될 게 뻔했다.

    그래서 소문이 확실히 아닌 것으로 정리가 되어야 했다.

    시현은 소문에 사로잡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움츠러들고 두려움에 떨어도 그간 노력해 온 것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지 않게 애쓰고 있었다.

    회사에 다닐 수 없다면 장사라도 해서 한국에 정착하는 게 목적이었다.

    어쨌든, 더러운 추문에 휘말리지 않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의외인 것은 시현에게 불리한 것을 무진에게 따로 보고 하지 않은 박 실장의 행동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봐주는 것 같았다.

    “시현 씨. 다음 달 20일까지 일정표를 재점검해요. 투자처에 발송하는 초대 카드는 따로 해야 하니까 명단 확인하세요.”

    “취소 건이 있던데 실장님이 확인하셔야 하나요?”

    “내가 표시해 두었습니다. 초록색에 코멘트를 달아 두었으니까 확인 후 정리해요.”

    “알겠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니까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빴다.

    무진이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고 나면 왕 할머니하고 엮인 것도 풀어질 것 같았다. 그러면 계약과 결혼은 동시에 정리될 것이다.

    시현은 내년에 새로운 회사로 이직해야 할지 모른다. 박 실장이 직속상관이니 추천서에 좋은 말 한 줄은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시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고 있었다.

    *** 

    박 실장을 대신해서 무진의 뒤를 따라 시현은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동행하라는 박 실장의 지시를 받아서 주차장에서 그의 차 문 옆에 서 있었다.

    “제이호텔에 잠깐 들러서 로비에서 직원이 주는 거 받아서 가면 돼.”

    무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조수석에 앉았다.

    제이호텔에서 양손 가득한 물건을 받아 뒷좌석에 두고, 무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워낙 말이 없어서 시현도 입을 꽉 다문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시현은 제이호텔에서 가져온 휘황찬란한 리본으로 묶인 물건이 궁금했다. 그에 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띄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상자는 평범한데 리본의 색감이나 묶인 게 화려해서 눈에 자꾸 띄었다.

    “다 왔습니다. 사장님.”

    “최 기사는 내일 7시까지 오고, 이 비서는 잠깐 들어왔다가 가.”

    차를 탄 채로 운전기사가 시현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시현은 무진이 한 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자세로 서 있었다.

    “집에 보내 줄게. 잠깐이면 돼.”

    고집을 피워 봤자 또 실랑이하다가 다툼이 생길 것 같아서 시현은 그를 따라갔다.

    주방 식탁이 아니라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는 화려한 리본으로 묶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슈트 상의를 벗고 앉으라고 손짓할 때까지 시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리본이 참…… 화려하구나.

    상자 안에 뭐가 있을까.

    단순히 궁금할 뿐이었다.

    시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단순한 평가 같은 것을 하고는 멍해진 채로 서 있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시현은 자신의 생일인 줄도 몰랐다.

    며칠 전에 군에 있는 동생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까맣게 잊고서 일만 하고 있었다.

    무진이 상자의 리본을 만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호텔에서 받은 상자의 리본을 풀자 그 속에, 생크림이 얇게 흔적만 있고 과일이 가득 박힌 2단 케이크가 있었다.

    샴페인과 생일 축하 카드까지.

    “뭐, 뭐예요?”

    놀란 시현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일 잘하는 비서의 생일을 챙기는 오지랖 넓은 사장이 준비한 축하 파티지.”

    “이런 건 그냥 선물로 주면 되잖아요.”

    “생일인 줄도 모르고 일만 하는 너를 어떻게 혼자 두겠어. 미역국도 안 먹었지?”

    그가 시현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할 말이 없어진 시현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상 가득 차린 생일상을 얼떨결에 받았다.

    잡채, 갈비찜, 미역국, 흰쌀밥 등 잔칫상이 제대로 차려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주머니가 맛있게 먹으라며 가시는데도 어영부영 인사하고는 앉은 채로 미역국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먹어. 점심도 대충 먹고 일하잖아.”

    “잘 먹을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챙겨도 싸구려 빵을 사서 동생하고 크림을 발라 먹는 정도였다.

    그리고 무진하고 결혼해서도 제대로 챙길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고 서로의 생일을 챙기기에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시현은 일부러 생일을 피했다. 동생의 생일 축하 메시지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짧은 결혼 생활로 그가 자신의 생일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질 남편한테 생일 축하 상을 받을 줄이야.

    태안 안면도에 다녀온 이후에 사이가 좋아졌다고 보기에는 일이 많아서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투었다가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가.

    다시 예전 일로 가시를 세우다가 제풀에 꺾였다.

    생일만 축하해 주고 집에 보내 주겠다는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생일 밥상을 받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현은 그와 침실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옷이 벗겨지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케이크는 지금 먹을래?”

    “지금요? 침대에서?”

    “넌 빵과 과일을 먹고 난 생크림을 책임지고.”

    케이크에 있던 생크림을 장난치듯 시현의 손등에 올리고 날름 핥는 그.

    “진짜 이게 뭐야. 하지 마요.”

    “전에 이렇게 축하받는 거 좋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언제 적이에요?”

    쓸데없는 걸 기억한다고 핀잔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무진이 환하게 웃어서 그저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포도를 먹어 볼래?”

    천진하게 웃으며 케이크 위에 있는 포도를 입에 쏙 넣는 그를 보며 당황했다.

    “포도 맛은 어때? 새콤달콤한가? 이시현은 무척 달콤한데.”

    “간지러워요.”

    시현은 손등을 핥는 그에게 하지 말라고 뿌리쳐 보지만.

    생크림이 묻는 시현의 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입으로 사라졌다.

    조금 밖에 없는 생크림을 서로에게 묻히고 먹고…… 키스하며 또 다른 감각에 빠져들었다.

    금방이라도 알아볼 것 같았던 소문의 진상과 왕 할머니가 심어 놓은 회사 내 직원에 관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기대도 희망도 내려놓은 시현은 친밀감이 있는 지금이 나쁘지 않았다.

    자극적이어서 이런 관계는 부부여도 오래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달아서 아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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